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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Mar 08.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13장 - 아스피 독자용III


항상 ‘분쟁'은 ‘위기’가 있을 때 발생한다. 


조직 구성원들이 시간이나 달성 목표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뉴로티피컬들 사이에는 원망이 생겨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근접한 존재를 원망하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자기가 발견한 어떤 대상에게 돌리고, 자기가 상상한 나쁜 의도를 그 대상에게 투사, 즉 비추듯이 상상하는 것이다. 즉, 그 대상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아주 약한 형태의 일종의 피해 망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성향을 정신분석에서는 '투사(projection)'라고 한다. 


사회학적으로도 전세계의 대중은, 경제의 부를 점거한 상위 0.1%를 원망하지 않고, 신기하게도 50대50 혹은 30대70 으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한다. 뉴로티피컬은 거대한 사회적 구조를 보려 하지 않으며, 당장 눈 앞에서 자기보다 적게 일하는 동료, 일찍 퇴근하는 직원을 비난한다. 


소위 말하는 군대에서의 '고문관'. 단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멸칭. 

하지만 인류학적으로 보면, 한국의 군대에 잘 적응하는 청년들이 단체로 정상이 아니다. 

군부심. 

겉으로는, 가능하면 군대는 당연히 안 가는것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군대에 잘 적응한 나는 뛰어난 사람이고, 적응 못했던 누구는 고문관이었다'는 경험담들.  

선임이, 신병 A 가 말을 못 알아듣고 일처리가 느리다며, A 대신 B를 불러 일을 시키면서, 

'아, A새끼 말귀 못알아쳐들어.' 라며 B에게 A를 비난하는 상황이 있다.

이런 경우, 갈등의 근원은 군대 그 자체에 있고, 그 다음 원인은 임무를 재배당한 선임에게 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선임과 B 사이의 정서적 공모가 이루어지고, 함께 A를 비난한다. 

A가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회피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서양의 앵글로 색슨 백인, 히스패닉, 흑인들을 한국 군대에 입영시켜놓으면 당장 총기난사 발생하고 대부분 공황장애나 PTSD 상태로 의가사 제대할 것이다.  


격심한 집단적 단합을 '정상'이라며 서로 강요하는 한국 집단. 

OECD 자살률 1위. 노동시간 2위. 

그런데 서로, 눈치 없이 연차를 낸다느니, 회식에 빠진다느니,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한다느니, 같은 노동자들끼리, 남녀로, 좌우로 갈라치기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갈라치기 소재인, '사회성 부족'이 있다. 


이러한 사회성, 공감이나 마음 이론 기능은, 조직 내부의 의사 소통을 더디게 만들기는 하지만,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듯이, 여유로운 조직에서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이 서둘러 어떤 프로젝트를 신속히 해결해야할 때 원망이 생긴다.


즉, 문제의 원인은, ‘위기’ 즉 ‘스트레스 요인’ 그 자체다. 어느날 아침 갑자기 주차장 앞에 눈사람이 나타났다면, 그 눈사람의 탄생도 특이하지만, 그걸 굳이 발로 차는 애가 문제다.      


‘마음이론’이 부족한 친구가 또래 그룹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친구를 무리지어 공격하는 것은 공격자들의 문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라도 그 공격을 방치하거나, 은근히 동조하는 것은, 그 학급에 집단적으로 가해지는 스트레스, 감정적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의 결여, 억압된 분노들로 인한 ‘집단적 병리’의 표출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조직에서는, 

‘사회성’이나 '마음이론'이 부족한 사람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공감과 마음이론’ 기능이 부족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여기까지 잘 살아왔다. 

내가 농담을 못알아듣는구나, 다른 친구들이랑 뭔가 다르구나 놀라웠고,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학교도 졸업했고 일을 해서 돈도 벌었다.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맞아. 너 좀 특이하긴 해’라고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이를 먹고 직장 생활을 몇 차례 실패하다가, 점점 내가 우울해지는 이유는, 

원래 인간은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직장 생활은 힘들다. 나이 불문,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없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며, 자신에게 없는 것이 치명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억울해한다. 그 한두가지가 없기 때문에 나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만 얻을 수 있으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요소를 원하며 불행을 느낀다.  

    

호모 사피엔스는 수렵과 채집 생활을 기반으로, 언제 우발적으로 나타날 지 모르는 맹수와 독충에 대처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 및 적응된 생물체다. 항상 뭔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정체불명의 적에 대비하고 있어야하고, 적이 튀어나오면 얼른 싸워서 해결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고, 그 후에는 안심해서 먹고 자고 성관계하고 뭐 그런 반복이다. 그런 생명체를, 먹고 자는 것이 충분한 문명 사회 안에 집어넣고 의식주를 충족시켜주니, ‘내가 뭐가 없어서 계속 불행하다’고 서로 원망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얘기하는 뉴로티피컬들이 마냥 행복해보이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그들이 그때 보여주고 있으니 부러운 것 뿐이다. 수많뉴로티피컬들이 모두 우울하고 불안해서 술에 의존하고, 폭식하고, 종교에 의지하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다들 우울한 이유가 제각각이다.     


성인아스퍼거, 내가 불행한 이유가 뭘까? 자폐라서?  


절대 아니다. 모든 인간은 그저 모두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낀다. 아무 스트레스 요인도 없을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기본값(default)이 불안과 공허감이다. 그러다가 심한 우울증에 걸리면 그 나름의 이유를 자의적으로 설정하는데, 아스피는 그 이유를 ‘나는 자폐이기 때문'이라고 정의내린 것 뿐이다. 게다가 지금 거기서의 ‘자폐’란 기호는, 적절한 단어도 아니거니와, 현실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줄 상황 분석도 아니다. 그런 사악한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를 뉴로티피컬에게 배우지 말자.      


성인 아스퍼거들이, ‘나 자폐인가?’, '병원에서 나 자폐래' 라고 할때 그 ‘자폐’의 언어적 기호는, 실제 의학적인 용어 ‘자폐’와 담겨진 의미가 다르다.   


일반인은, '정신병'이라는 기표(記票)에, '사회적인 규칙을 어기는 악당'이라는 기의(記意)를 담는다. 

'미쳤다'라는 단어는 그런 사악한 '기의'에 대한 상스런 표현일 뿐, 실제 정신의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의사는, '정신병'이라는 기표에, '망상이나 환각을 동반한, 현실검증력의 결여'라는 기의를 담는다. 

일반인과 의사가 똑같은 단어로 말하지만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자폐' 역시, 일반인들은 '자폐'라는 기표에, '내 집단에 합류시키기 싫은 나쁜 존재'라는 기의를 담는다. 그러한 광적인 투사는, 전체주의적 속성, 집단주의적 속성이 두드러진 곳에서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의학적인 용어로서의 '자폐'는, 사회적 관계와 소통의 질적 문제, 언어적 문제, 상동행동과 강박적 집착의 총체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자폐’라는 용어 대신, '자폐 스펙트럼'이라던가, '전반적 발달 장애'라던가, 아니면 '고기능 자폐와 아스퍼거는 절대 다른 개념이다'라고 주장한다던가 해서 별 다른 효과는 없다. 왜냐면 이런 단어들은 결국 언젠가 다시, 뉴로티피컬 집단 히스테리의 투사를 뒤집어 쓰기 때문이다.    자폐증(autism) 이란 용어가 좋지 않다고 해서, '전반적 발달장애(pervasive developmental disorder)'라는 용어가 등장했지만, 줄여서 'PDD' 라는 말이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고, 이제 자폐스펙트럼장애가 되었지만, 10년 안에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가령, 뉴로티피컬들은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이 일요일에 혼자 방문 닫고 들어가서 점심 식사도 안 하고 저녁까지 게임만 하고 있으면, 저녁 때 쯤 부인이 화가 나서 문 쾅 열고 들어가면서, ‘너 자폐냐?’하고 소리 지른다. (왜 부인이 화가 나냐면, 같이 남편과 상호작용 하고 싶은데, 그걸 직접 요구하기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아니면, 부인이 무거운 택배 여러개 낑낑대면서 갖고 들어오는데 남편이 tv 보고 있으면, '우리 남편 자폐증인 것 같다'고 욕한다. (부탁하면 되는데 그러긴 싫어서. 부탁 안해도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으니까. 왜냐면 원초적인 부모상들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      


남자애들이 pc방에서 게임 롤 할 때, ‘야! 상대 정글 온다고 핑 찍는데 왜 안와. 거기서 왜 원딜 탓을 해 병신아. 너 자폐야?’ 라고 한다. (왜냐면 젊은 뉴로티피컬들은 경쟁 게임에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책임자를 원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인들은 ‘자폐’라는 기호를 남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집단 광기에 종속된 부적절한 용어로 함부로 낙인 찍지 말자. 

 

즉, 내가 괴로운 이유는,  

    

지금 직장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서. 

아니면 며칠 전에 친구가 화냈는데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서. 

아니면 나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고, 다들 결혼하는데 나는 이성 교제 경험이 없어서. 

아니면 결혼한 친구들이 더 이상 나랑 안 놀아줘서. 

아니면 이제 게임도 재미없고 여행도 재미가 없고 심심하거나 공허해서. 

아니면 이성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아무리 시도해도 자꾸 거절당해서. 

아니면 돈이 부족해서, 부모님이 아파서, 노인되면 어떻게 먹고 사나 불안해서. 

아니면 우울증이 걸려서, 강박증이 걸려서, 

아니면 운이 나쁘게도 위에 이유들 중에 여러가지가 해당되거나, 

아니면 모조리 다 해당되어서 그런것이나, 

아니면 그냥 이유를 모르겠는것이지.  

내가 자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계속 나쁜 생각, 진로나 미래, 사고나 죽음에 대한 강박 계속 되면 그냥 그걸로 치료만 받으면 된다. 그 증상 치료 받고 나서, 사회성이나 자폐 성향에 대해서 궁금하면 그 부분에 대해 하나씩 상담하면 된다.

      

그 대신 질문할 때는, 구체적으로 묻는게 좋다. '제가 자폐인가요? 앞으로 어떻게 하나요?' 같은 추상적인 질문은 도움이 안된다. 그러면 뉴로티피컬 전문가는 '아닙니다. 힘내세요' 정도의 답변을 해줄것이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하게 될까요?’라고 물어봐야 효과가 없다. 최소한, ‘어떻게 해야 영어 어휘력이 빨리 늘까요?’, ‘수학 문제집은 뭐가 좋나요?’, ‘고전을 많이 읽으면 언어영역 점수가 오르나요?’ 라고 물어야 선생도 답해주기 쉽다.      


그러니, 광기의 기호에 편승한, 무의미한 자기 낙인 찍기를 그만두고, 눈앞의 문제부터 하나씩 해결하자.  


그렇게 모든 급성 혹은 만성 증상들이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고 나서 생활이 안정된 아스피는, 

곧, '뉴로티피컬들이 서로 관심을 갖는다는게 어떤 느낌일까? 정서적 욕구라는게 뭘까?'라는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아스피 역시 인간 관계를 선호하고, 타인이라는 대상을 지향하지만, 뉴로티피컬에 비교하면, 그 정서적 색채가 훨씬 약하다. 


‘정서적 욕구, 정서적 니즈(needs)’란 무엇인가? 뉴로티피컬은, 자신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며,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서로 대화하고 싶어하며, 특히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 자체, 대화 그 자체 보다, 대상과의 관계 유지를 더 중요하게 지각하기 때문에, 싫어도 좋은 척 하고, 내가 말하고 싶어도 일단은 듣는 태도를 유지한다. ‘대화 자체 보다, 관계 유지를 선호하기 때문에, 싫어도 좋은 척한다'는 점에 대해, 뉴로티피컬은 ‘당연히 그럴수 있지’ 라고 받아들이지만, 아스피라면 ‘도대체 왜 그럴까?’ 라고 궁금해진다. 훗날 동료가 나중에 경제적 이득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친구간의 의리 혹은 멤버쉽 때문에? 도덕적 이유가 아니다. 그냥 그러고들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어떤 전문가는, '아니요! 아스피도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공감합니다. 단지 말이나 표정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에요.'라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말은, 위로는 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도움이 안된다. 아니, 사실 아스피들에게 그런 온정적인 수사는 위로가 안된다. 그건 뉴로티피컬들이 투사한, 아스피가 감사하거나 안심할 것이라는 판타지다. 


우리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왜 꼭 공감해야 한단 말인가? 공감 안하면 안되나? 인간이 살면서, 범죄만 안 저지르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공감 안하는 아스퍼거가, 훨씬 고지식하고 관습적 규칙도 잘 지킨다. 

양심적이고, 거짓말도 안하고, 횡령도 안한다. 


왜 꼭 정서적 욕구를 보유해야 하고 왜 꼭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가? 

배고프지 않으면 굶어도 되고, 외롭지 않으면 혼자 살아도 된다. 

왜 먹기 싫다는데 식사 시간이라고 억지로 먹이려 하고, 

왜 나는 혼자도 괜찮다는데 결혼 안하거나 친구 없다고 이상하게 보나? 

왜 꼭 미래에 전망 있는 직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일해야 하나? 나 혼자 만족하면 되는것 아닌가? 


아스피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부적절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현실적인 스트레스 요소와 미묘한 대인관계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일단 가능한 구체적으로 요약, 정리하는 것이다. 

자기가 '해결하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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