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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Mar 07.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12장 - 아스피 독자용 II


(직접 아스피 환아를 돌보고 있는 가족이라면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격려와 응원, 혹은 철학일 테니까) 


자폐증(autism)은 언어기능,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애, 강박행동의 세가지 특성을 보이는 선천적인 장애다. 세가지 증상 모두, 개인에 따라 중증도와 비율이 다른데, 이 중에서 언어기능의 발달은 평균 이상으로 잘 된 경우를 아스퍼거 증후군 혹은 고기능자폐라고 따로 정의하곤 한다. 


1970년대, 영국의 정신과 의사였던 로나 윙은, 자폐 장애를 앓고 있던 자기 딸을 위해, 그리고 많은 환우와 가족들을 위해 연구하고 사회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자폐 장애 그룹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나 윙이 도입한 새로운 개념은, 지금 보기에는 당연한 내용인데, 

‘자폐가 있음. 경증, 중간, 심각’ vs ‘자폐가 없음’ 으로 이렇게 잘라나눌 것이 아니라, 

‘마음 이론’ 기능을 연속선(continuum) 혹은 스펙트럼(spectrum) 상의 수적(number) 개념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자폐장애를 앓고 있음에도 사회에 잘 적응하여 살아가는 케이스들을 발견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때 인용것이 1940년대 오스트리아 의사 아스퍼거가 발표했던 오래된 논문이었다. 


결론은, 우리가 어떤 아이를 ‘계산이 빠르다, 느리다’, 혹은 ‘달리기가 빠르다, 느리다’ 는 개념으로 규정할 때, 이 과정에서 수학 점수 혹은 달리기 속력 등의 연속선 상의 양적 평가를 도입할 수 있다. 


하지만 함부로 아이를, ‘착한 애, 못된 애’, '잘난 애, 못난 애'라고 규정해서는 안되는데, 이처럼 ‘자폐다’, ‘아니다’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폐적 성향이란, 사회적 상호작용과 언어소통의 장애, 무언가에 지나친 집착이나 반복 행동의 집합체이다. 전형적인 자폐증의 경우, 외양적으로 볼때,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확연이 눈에 띄고 구분이 되므로, 진단에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언어 소통이 충분히 가능하고 지능이 평균 이상이면(즉 아스퍼거 증후군이면), 진단이 되지 않기도 하고, 전문가마다 진단이 다르거나, 진단이 되어도 부모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사회적 상호작용'을 수적으로 객관적 평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타인이 보기에, 언어 문제나 강박 행동 등은 객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정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평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정신과 질환이나 ADHD 와 같이,  자폐증 역시 뇌영상이나 혈액 검사로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문진과 관찰로 진단한다.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을 정확히 진단하는 심리 검사란 없으며, 가장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심리검사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부모와의 면담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진단을 받지 않고 이미 성장한 성인 아스퍼거 증후군의 경우에, 고령의 부모를 불러서 20여년 전의 성장사를 문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인 아스퍼거 증후군은, 성인 환자 한사람을 대상으로, 현재의 상태에 근거하여 검사와 진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한 진단 과정을 최대한 객관화시키기 위해 표준화된 설문지를 사용하는데, 그 안에 ‘사회적 상호작용’ 분야를 평가할때 사용되는 용어들을 살펴보자. 


‘사회적 교섭 개시의 질’…의 수준이 어떤가?

‘사회적 반응의 질’…의 수준이 어떤가?

‘상호 의사소통의 양’…의 수준이 어떤가?


…라는 식으로, 검사 항목에서 뉴로티피컬 검사자의 주관적인 직관적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니 전형적인 예시를 들어 교과서에 다량수록하기도 어렵다. 자폐증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에 관한 전문가의 컬럼을 보면, 대부분 아동의 케이스 만을 사례로 든다. 아동의 자폐적 행동 사례들이 훨씬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개시의 질? 반응의 질? 소통의 양? 


다른 분야의 평가에 쓰이는 우울증이나 불안증, 각종 인지기능에 대한 심리검사지에는, 평가 항목이 이렇게 개념적 용어로 이뤄지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 우울증 검사지라면, 


‘매사에 기운이 없다 0~3점 / 식욕이 줄었다 0~3점‘ 이라는 식이고, 


불안장애라면, 


‘불안, 걱정, 예민함 0~4점 / 불면, 피로, 악몽 0~4점’ 같은 식이다. 


즉, 평가 검사 질문에는 구체적인 단어가 쓰여야 마땅한데, 자폐증 검사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가 들어간다. 이러한 약점을 전문가들도 알기 때문에, ‘확진’은 보호자 면담을 근거로 함을 원칙으로 한다. 




전형적인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 목록에는, 

가장 핵심이 되는 사회적 소통 문제 외에, 

무표정한 말투, 단조로운 발성과 억양, 

어떤 소재나 규칙에 지나치게 집착, 소리나 촉각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등의 특성이 있다. 


가령, 성인이 되어서도 목 뒤나 허리의 태그를 제거해야한다거나, 낮에 길거리를 걸을때 혹은 지하철을 탈때 귀마개를 쓴다거나, 밤에 잘 때 꼭 안대를 쓴다거나, 책상의 물건 배치에 규칙, 자세한 수집 목록과 배열 규칙,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뜰 때마다 숫자를 센다거나, 자신이 보거나 즐기는 영상과 게임 속의 수치들을 모두 외우는 등의 ‘상동’이나 ‘강박 증상’이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사회성 문제 즉, ‘공감’이나 ‘마음이론’ 혹은 ‘지능’에는 명백한 저하 소견이 있지만, ‘집착’이나 ‘상동행동’이 보이지 않을때,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전문가들 사이에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아니다’ 의견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스피에 따라, 자신의 상동행동이나 버릇에 대해 숨길 수도 있고(왜냐면 그것이 특이하거나, 치료자가 주목할 것이라고 추정을 못하니까), 전문가가 발견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스피가 집착하는 분야가, ‘전공 분야’와 '직업' 같은 현실적인 전문 기술에 관련된 소재들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강박이나 상동증이 전혀 없어도, 분명히 아스퍼거 증후군에 준하는 ‘공감과 마음이론’의 결여가 있고, 만성적인 사회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아스퍼거 증후군'일까 의심이 된다면, 초기 확진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자. 고기능자폐일지, ADHD 일지, 경계성 지능일지, 비언어성 학습장애일지, 조울증이나 조현병 전구기일지, 만성 우울증과 적응장애일지 모르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 병원을 순회하거나, 혹은 좌절하여 치료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사회적응이 어렵고, 그 본질이 자신의 사회성에 있다고 생각된다면, 일단 사회기술훈련을 목표로 삼으면 되겠다. 


물론 이해는 된다. 아스피의 기질이라면, 무엇이든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고, 내가 정말 아스퍼거 증후군이 맞냐 아니냐 확실하게 보장을 받고 싶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보고 싶고, 그 설명을 해준 전문가가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고, 그 전문가가 어떤 치료나 상담을 하자고 하면, 계획을 자세히 들어보고 자기도 그 윤곽을 잡고 그 이론에 대해 알아보고 확인을 해보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임상 정신과 진료의 특성을 한가지 얘기해야 겠다. 바로 초기 진단이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임상에서 환자를 처음 진료할 때, '확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의무기록에서도 진단(diagnosis) 보다 인상(impressio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질환은. 한가지 질환이라도 여러가지 증상을 한꺼번에 보이면서, 같은 질환이라도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또 여러 질환이 중복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경골의 골절이나, 비골의 골절이냐, 완전 골절이냐, 불완전 골절이냐, 1형 당뇨인가, 2형당뇨인가, 전형 협심증인가 비전형 협심증인가라는 진단으로 인해 치료가 달라지는 다른 전공 분야와 달리, 정신과는 불안, 두근거림, 불면 등 증상들을 치료의 목표로 삼게 된다. 즉 차원적 접근(dimensional approach)의 치료를 시도한다. 우울증과 불안증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SSRI 와 항불안제를 선택하거나, 치매와 섬망의 행동 문제를 모두 조절할 수 있는 항정신병 약물을 선택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예를 들면, ‘감기’란 정식 진단명이 아니며, 그것은 세균성 후두염일 수도 있고, 바이러스성 비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침과 콧물을 호소하고 있는 환자에게 증상에 따른 약을 먼저 처방하며, 심할 경우 항생제를 포함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진단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세균 배양 검사를 하지는 않는다.  


‘치매’라는 말 역시 진단명이 아니다. ‘치매’를 일으키는 병은, 알츠하이머와 뇌경색, 뇌출혈이 흔하며, 그외 파킨슨병이나 전두엽성 치매, 비타민 결핍도 치매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일단은 인지기능 개선제를 투여하며 증상을 관찰하고 추가 검사를 진행한다. 


우울증과 불안증, 조현병과 조울병, 치매와 섬망 등이 각각 모두 급성기에 구분이 어렵다. 두가지진단이 혼합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치료자는 일단 증상에 준한 치료를 하면서, 정확한 진단은 뒤로 미루게 된다.


특히 우울증이지만 초조성 우울증(agitated depression)의 경우, 환자는 불안감과 두근거림, 걱정거리를 주로 호소하며, ‘엄청나게 불안할 뿐, 우울하지는 않다, 우울증은 절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떤 초조성 우울증 환자가, ‘몇달 전부터 너무 불안하고 숨이 차고 두근거린다’며, 여러 정신과를 돌면서 ‘이거 공황장애 맞지요?’ 라고 의사에게 묻는다면, 어떤 의사는 ‘그렇다’고 해줄 것이고, 어떤 의사는 ‘그냥 불안 장애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의사는 ‘전반적 불안장애’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의사는, ‘불안증이 아니라 우울증인 것 같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의사가 동일하게 환자를 위로하며 안심시키고, SSRI 와 신경안정제를 처방할테니, 치료에는 큰 차이가 없다. 


초조성 우울증이 심한 환자가 '난 불안장애이지 우울증은 절대 아니다'라고 고집할 때, 굳이 '당신은 공황장애가 아니고 우울증입니다'라고 논쟁을 벌여봐야 분위기만 험악해지고, 라포도 깨진다. 어차피 약물치료를 해서, 급성기의 거품 같던 불안감이 가라앉고 나면, 점차 밑에 깔려있던 심한 피로감과 우울감이 드러나는데, 그때 가서 우울증 진단 얘기를 하면 된다.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환자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처음부터 정확한 진단을 설명해주는게 의료인의 의무 아니냐고? 아...그냥 일단 의사들이 그런 습성이 있구나…하고 넘어가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공감과 마음 이론’ 의 부족은,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 스펙트럼, 비언어성학습장애, 경계성 지능 외에도, 사회소통장애, 조울병, ADHD, 오랫 동안 치료 받지 않은 강박장애나 분리불안장애 등에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의사가 처음 환자를 진료할 때, 사회성이나 공감기능의 심각한 공동(空洞)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점에 대한 진단은 뒤로 미루게 된다. 환자가, 불면이나 우울, 불안감 혹은 집중력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면 그 증상의 치료에 먼저 목표를 두기 때문이다. (물론 조울병, 양극성장애만은 처음에 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성인 ADHD 환자들이, 진단을 안 받은 경우는 많을지 몰라도, 정신과 치료를 안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에서 장기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 인격장애의 상당수가 이미 ADHD 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기성 현대정신의학의 DSM 진단기준에서는, ‘A군,B군,C군’으로 나뉘는 인격장애의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데, 자폐적 성향을 가진 이들의 상당수가 이미, 분열성 인격장애, 자기애성 인격장애, 편집성 인격장애, 상세불명의 인격장애로 진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상에서 의사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은 물론이고, ‘인격 장애’의 확진에 적극적이지 않다. 왜냐면 그러한 진단을 토대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자폐적 성향이든, 인격장애이든, 성인ADHD 이든,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은 장기심리치료, 사회기술 훈련이나 언어치료 뿐인데, 과거 정신과 개인 의원에서는 이것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개원가에서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인격장애를 진단함으로 인해, 낙인 밖에 주는 것이 없고, ADHD 진단 역시 신경자극제 외에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 글을 쓰다 말고 나도 잠시, 오랫동안 진료를 보고 있는 환자들 중에, 검증하지는 않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이겠구나…싶은 케이스들을 떠올려 본다. 


6년 넘게 매일 똑같은 복장으로 한달에 한번씩 찾아와서 똑같은 약 한가지를 처방 받아가는 그 분. 항상 무표정하며 약만 처방 받으면 서둘러 떠나는, 내가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항상 대답을 회피하는 그 분. 그러다 어느날 뜬금없이, ‘~~ 같은 증상 보이면 치매에요? 정신병이에요?’ 질문 한가지 한다음에 설명 듣고 ‘아 그렇구나’ 하고 휙 떠나는 그 분. 


처음부터 ‘내가 우울증인 것 같으니 푸로작을 처방받아야겠다’고 왔던 그 분. 역시 항상 무표정하고, 자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없으며, 내가 뭔가를 물어보면 회피하는 분. 10년 동안 혼자 살면서, 직장은 다니고 있지만 친구도 없고 연애도 해본 적이 없다는 그 분. 


어색한 표정으로 활짝 웃고, 관용적인 과잉 친절의 인사를 늘어놓으며 소견서 발부와 수면제 처방은 원하시는 그 분. 항상 똑같이 활짝 웃는 얼굴, 똑같은 감사 인사, 과하게 취하는 저자세의 말투.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받아낸 후 훌쩍 떠나는 모습. 


이렇게, ‘공감과 마음이론’이 결여된 것은 확실하지만 자신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게 아닌 경우에는, 내가 자폐성향을 특별히 평가하거나 진단하기 위해 개입할 수 없다. 


그래도 윤리적으로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의사면 환자가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이라고 해도 적극적으로 검증해서 진단하고 도와줘야 하는것 아니냐고? 끙... 미안하지만 뉴로티피컬들은, 타인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관철시키지는...않는 습성이 있다. ...라고 써도 내 미안한 마음을 포착하지 못하겠지. 그냥 그렇게 알고 외워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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