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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Mar 06.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11장 - 아스피 독자용 I 


이전 장에서, 카페에서 주문에 어려움을 겪던 ‘노인’의 케이스를 다시 써보자.

  

“어떤 것 주문하시겠어요?”

“그거 줘요. 그거.”

“어떤 것 말씀하시는지요?”

“그게 뭐더라 저번에 먹었었는데.” 

“...저번에 어떤 것을 주문하셨나요?” (이 경우,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겠지만, 결국은 고객이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이 통상적이다) 

“모르겠네. 그냥 아무거나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괜찮으실까요?”

“그건 너무 추워서 싫어요.”     

“아이…ㅆ…“


맨 뒤에 한줄을 더 추가했다. 


자, 눈치보거나 하지 말고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어차피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스피는 왜 뉴로티피컬들이 저런 류의 경험담을 공유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저게 왜 그리 화가 날 일인지도 모르겠고, 직업상 주문을 받던 사람이 왜 마지막에 ‘ㅆ’라는 소리까지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비속어야 말로 비윤리적인 것 아닌가. 


만약 아스피가 대신 저 자리에서 주문을 받는다면, 노인이 의도하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노인이 결국 자신이 과거에 주문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내면 그것을 주문할 수 있고, 기억 못해내면 주문을 못하는 것이다. 만약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직원이 나서서 다른 사람부터 먼저 주문을 받게 해주면 그만이다. 


극단적인 경우, 노인이 그자리에 서서 하루 종일, 뭘 주문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해서, 직원에게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직원은 그 자리에 서서 근무 시간 채우고 나서 급여 받는 사람인데, ‘자신이 주문해야할 품목을 결정하지 못하는 노인’의 주문을 완수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런 류의 경험담을 포함하여, 뉴로티피컬들은 부정적인 분노나 긍정적인 갈채를 선동하는 컨텐츠들을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사회적 선동이나, 가십, 뒷담화, 데모 등의 형태인데, 아스피는 여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평생을 고민해 왔다. 


이럴 때마다, 내가 아스피 상담에서 하는 말이 있다. 


‘맞는 말, 맞는 말, OOO님이 하는 말은 1부터 100까지 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건의 원인은, 할머니가 자신이 예전에 먹었던 메뉴를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으로든 직업 윤리로든, 다시 설명하고 기다리면 그만입니다. 직원이 할머니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뉴로티피컬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때, 가까이 있는 타인을 원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냥 그러니까 일단 외워두세요.’ 


뉴로티피컬들의 습성을 알고 있으면,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뉴로티피컬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타인을 원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뉴로티피컬들은, 정의(正義 justice)나 시비(是非)를 무시하고, 무조건 그 원망을 공유하는데, 그것을 ‘공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은, 개체의 유전적 형질에 따라 0점부터 100점까지 다양한데, 선천적으로도 차이가 있고, 후천적인 발달 과정에서도 그 차이가 극대화될 수 있다.  아스피는 이 공감에 본능적으로 동참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일단 뉴로티피컬들에게 그런 습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아두자. 


나를 포함하여 4명의 친구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어떤 연예인에 대한 가십과 비판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2명이 그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연예인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더러, 내가 확인한 근거 없이 그의 죄를 판단하여 비판에 동참하기 싫다. 이때, 내가 그 공감대에 동참하느냐(공감하는 척 하느냐) 마느냐는 나의 자유다. 


1. 자신이 있으면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꾸해도 좋지만, 아니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만 해도 좋다. 


2. 물론 그냥 아무 반응 없이(무표정하게) 있어도 좋다. 


3.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내 친구 등급 1번 랭크의 친구들이라면 말해도 좋지만, 2번 랭크라면 신중해야하고, 3번 랭크라면 하지 않는게 좋겠다. 왜냐면 뉴로티피컬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경우, 심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은 뉴로티피컬의 습성에 대해,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이고, 그에 따른 이득이나 손해의 문제일 뿐, 도덕적 문제는 아니다. 


수천년 전, 어떤 호모 사피엔스들이 조그만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외친다. "얼마 전부터 강가 건너에서 머물던 나쁜 놈들이 쳐들어왔어!" 라고 소리를 지르면, 모든 구성원들은 당장 분노하여 그 전쟁에 동참한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이틀 전에 먼저 걔네들의 야영장에 가서 식량을 빼앗어 왔으니 그렇지.' 라던가, '일단은 서로 전투가 가능한 인원 수를 점검해보고 가능하다면 대화를 시도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따위의 사유는, 원시시대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오히려 떨어 뜨릴 것이다. 그리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적(敵)이 쳐들어왔으니, 민(民)은 충(忠)하'는 식의 윤리가 탄생하여, 그러한 집단적(공감적) 행동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  


뉴로티피컬들이 이런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음을 모르면, 아스피들은 곧, ‘도덕’적 갈등의 문제로 빠져버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 친구들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동의하는 척 해주는 것이 옳은가요? 도대체 왜 그게 옳은거죠?' 라는 식의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뉴로티피컬들은, 그래야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자기가 밥값을 내겠다고 해서 내도록 한 것인데 그게 왜 제 잘못이죠? 제가 억지로 그 선배를 밀쳐내고 돈을 냈어야 했다고요? 그게 예의라고요? 무슨 근거로요? 어디에 그런 내용이 써있습니까? …라는 부류의 도덕적 논쟁이, 내외적으로 반복된다. 왜냐면 ‘사회성’ 문제는, ‘도덕적 가치’로 위장되어 있고, ‘집단적 억압’을 합리화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특히 뉴로티피컬들 중에는, 자신의 정서적 니즈를 충족시켜주지 않는 경우에, 도덕이나 관습을 근거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캐릭터들은 아스피와는 상극이다. 애정 욕구가 높거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아스피가 이기적이라며 분노한다. 


그래서 그런지, 잘 성장한 아스피의 오랜 친구들은 대부분 무척 쿨하다. ‘넌 왜 필요할 때만 연락하냐?’ 라던가, ‘넌 친구한테 관심이 없냐?’ 라며, 도덕적 명제를 사용하여 정서적 불만을 표출하는 친구는 일찌감치 옛날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아두도록 하자. 뉴로티피컬중에는 '오랜만에 너를 만나싶으니 이번 주말에 보자'고 직접적으로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표현해주는 친구가 과반수를 넘지 않는다.  


아스피와 친구들은 공통된 놀이 문화가 있다면, 10대부터 어울리는데 큰 문제가 없다. 특히 남학생들은, 정서적인 대화보다, 함께 게임이나 운동을 하는 것이 친목의 수단이 된다. 쿨하거나 털털한 남자 아이들 그룹에서는, 우연히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아스피 친구를 깍두기처럼 챙기고 끼워주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친구 그룹은 극도로 귀한 사회적 자산이다. 사회적 경험 외에도, 외부 세계를 편집적으로 보지 않게 해주는 방어막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은 그리고 가끔씩 반은 농담, 반은 훈계조로, 일반적인 사회적 기술에 대해서도 가르쳐준다. 


‘야 임마! 그럴때는 그냥 알았슴미다아~ 죄송함미다아~ 다음부턴 자라겠슴미다아~ 하고 넘어가는거야!’ 하면서 말이다. 


모르겠지만 일단 외워두자. 


또, 가끔 지하철에서 보면, 공중에 대고 길을 묻는 할머니들이 있다. 


‘아~ OOO 역이 어느 쪽으로 가야되나?’ 라고 크게 외친다. 도대체 왜 공중에 대고 길을 묻는걸까? 지나가던 나로 하여금, 멈춰서서 길을 가르쳐달라는 정신 지배인가? 


아니다. 나를 노린 것이 아니라, 원래 뉴로티피컬 중에는 답답하면 혼잣말을 하는 습성이 있다.


직장 동료인 나이 많은 선배는, 더운 여름날 사무실에 들어오며 크게 외친다. 


‘아~ 덥다!’ 


자신이 덥다는 말을 왜 저렇게 크게 외칠까? 나보고 에어컨을 틀라는건가?


아니다. 그냥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른 말을 한것이다. 


이런 뉴로티피컬의 습성을 숙지하지 않으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의 마음 내외적으로 도덕적 논쟁이 발생한다. 


노인이 길을 모르면, 요청 받기 전에 도움을 줘야하는가? 직장 선배를 위해 에어컨을 틀어줘야 하는가? 길거리에서 주는 전단지는 받는 것이 예의인가? 상대방이 나의 호의를 거절할 때 예의상 몇번까지 권해야하는가? 축의금이나 부조는 얼마가 정답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정답을 모르는 나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으며, 모든 개인은 자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오로지 ‘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위의 문제들을 ‘도덕’과 ‘죄’의 문제라고 믿게 되면, ‘이 세상’은 점점,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미지의 도덕률에 의해 나를 비정상으로 매도하는 악당들의 세계로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편적인 ‘도덕률’에 위배된 부적절한 존재라고 자책하게 된다. 가뜩이나 메모리 공간도 모자르고, 부족한 '공감과 마음 이론'기능을 보상하기 위해 다른 지식과 습관을 탑재해야 할 상황인데(메모리 램, 작업기억을 사용하여), 엉뚱한 '자책과 경계심, 억울함, 좌절감' 등이 메모리에 상재하게 되어 버린다. 


이러면 상대를 경계하거나 화를 삭이느라, 더욱 인간관계의 갈등은 악화된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편집증이 되어, 불특정 다수를 반복하여 고소고발을 하고 원망하는 것이, 내 정신 생활의 주요 과제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 자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에서 혼난 것들? 새로 배우면 된다. 커피 사고, 아부하고, 무거운 것 들고 하는 그런 버릇들? 배우면 그만이다. 직장에서 지적 받은 사회성이란, 결국 상관에 대한 예의나 복종, 조직의 업무 규칙에 대한 숙지, 동료들에 대한 붙임성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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