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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Mar 05.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10장 - 원리원칙과 수치심


컴퓨터의 기능은 크게 나누어, 정보가 저장되는 하드디스크와, 정보를 처리하는 CPU 반도체가 있으며, 

그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저장 및 유지하는 메모리 디스크가 있다. 


1 + 2 = 3 이라는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1,2,3' 이라는 아라비아 숫자와, 더하기(+)와 등호(=) 등 사측연산에 대한 기호가 담고 있는 의미 등이 하드 디스크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CPU 반도체는, 반도체 내부 실리콘의 전자의 이동을 통해, 이런 작업의 전자기적 동력을 구현한다. 


그리고 CPU 반도체가 이 '더하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1’, ‘+’, ‘2’ 라는 것들의 ‘기호’와 ‘의미’가 전자신호의 형태로 연속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메모리에 ‘2’ 가 출현한 순간, 그 이전의 ‘1’이 사라져버린다면, 더하기 작업은 수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눈 앞에, 마치 책상 위에 벌어진 도구들처럼, 지속적인 이미지, 존재로써 도구적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메모리 램이다. 그래서 메모리 디스크의 성능이 떨어지면, 하드디스크와 CPU 의 성능이 좋다고 해도, 2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행할 때, 에러가 발생하거나 컴퓨터가 멈출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간에게 있어, 이러한 실시간 기억이 바로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다. 작업 기억은, 실생활에서 항상 작동하고 있는 필수적인 전두엽의 인지기능이지만, ‘암기력’이나, ‘과거 기억 회상’ 등에 비해 자각하기 어렵다. 

    

고령의 노인들이나 성인 ADHD 환자들에게서 많이 부족한 것이 이 작업 기억인데, 메모리 RAM의 용량이 적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한 가지 문제 해결에 봉착했을 때, 다른 문제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출근하기 직전, 나의 메모리 RAM 에는, ‘휴대폰과 지갑과 가방을 챙겨야지’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여분의 메모리 공간을 사용하여 ‘오늘은 나가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야지’라고 기억하면서 두가지 작업기능을 동시에 완수할 수 있다. 만약 나의 RAM 이 좀 더 여유가 있다면, 갑자기 출근 직전에 발견한 부고 문자를 보고, ‘아, OOO선배님이 상을 당하셨으니, 퇴근 길에 들러야겠구나. 장소가 어디지?’라며, 작업 기억을 추가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메모리 용량이 적다면, 

‘음식물 쓰레기’를 떠올리는 순간, ‘휴대폰, 지갑, 가방’ 의 작업 기억이 상실되므로 휴대폰을 빠뜨리게 되며, 음식물 쓰레기를 현관에 놓고 잠깐 선배의 장례식장 주소에 대해 생각하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현관 앞에 그대로 놓고 나오게 된다.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 역시, 주로 메모리에 상주하는 일종의 기본 프로그램으로써, 다른 문제 해결에 신경을 쓰다보면 사용이 멈추어버린다.  

    

즉, 현재 자신이 마주친 사건 그 자체와 부정적인 감정 반응들이 하드디스크에서 소환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모리를 점거하면서, 더 이상 타인의 마음 상태를 추정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느 공공기관 직원이 적은 푸념의 글을 보았는데, 민원인을 상대하면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발급 신청서를 적어 주세요”

“재발급인데요?”

“그래도 써야 합니다”

“ID를 몰라요. 알아서 써주세요”

“ID을 알아야 재발급 신청이 가능합니다."

"난 그런거 모르는데..."

"이전에 누가 신청하셨나요?”

“이전에 딸이 대신 했어요."

"딸에게 물어보세요"

"(전화로 물어보니) 딸이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와 같은 패턴이 한 사람 당 3~4차례 넘게 반복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공격적인 단어들로 자신의 분노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글을 본 이들의 댓글 반응 중에는 가끔, ‘민원인이 모를 수 있는데, 직업인 사람이 지나치게 분노한다’ 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담당자의 분노에 편을 들어 주었다. 


여기서 글쓴이와 관객들은, 민원인이 부적절한 질문이나 부탁을 공무원에게 부담시키고 있다며, 일종의 ‘무능'이나 '부도덕’의 문제를 보고 있다. 

      

위 패턴을 분석해보면. 

     

* ID를 모른다 -> ID를 알아야 신청이 가능하다 -> 알아서 써달라      


최초에는, 민원인 자신이 ‘ID 를 모른다’는 점이 갈등의 발단이다. 민원인이 ID 를 알고 있거나, 애초에 저러한 민원 신청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과는 관련없이) 이러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민원인이 ID를 모르므로, 민원 담당자는 자신의 임무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민원인은, 담당자의 곤혹스러움이나 답답함을 공감하지 못했으며, 담당자와의 협동 작업이 난관에 부딪혔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사람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의도를 악하거나 공격적인 내용으로 상상한다. 그래야 미지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 제공자가 장애물에 부딪쳤음을 공감하지 못한 고객은, 서비스 제공자가 고의로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며 불만을 갖는다. 

      

* 이전에 신청한 사람이 누구인가? -> 내가 안했다, 딸이 했다 -> 전화로 물어보라 -> (전화해보니) 딸이 안 했다고 한다      


아마, 민원인은 여기서 갑자기 담당자가 왜 '이전에 이 카드를 신청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지 몰랐을 것이다. 민원인의 의도가, 자신의 카드를 이전에 신청했던 사람을 물어보고, 그로부터 ID 를 추적하여 알아내려 하였음을 추정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담당자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고, 대충 ‘딸이 했다’고 답한다. 


‘공감과 마음이론’ 기능이 낮으면, 타인의 마음 상태를 추적하지 않게 되며, 이는 특히 자신이 불안하거나 압박을 느끼고 있을 때 더 심해진다.      


다른 사례로, 여권 수령자에게 수령자의 직장 주소를 말해달라고 묻는데, 민원인이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령 하실 직장 주소를 말씀해주세요”

“나도 몰라요”      


이런 패턴 역시, 자신이 직장 주소를 모름으로 인해 상대방이 난관에 봉착했음을 예측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반응이다. 이 경우 민원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자신의 직장 주소를 모르는 것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당황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하지만 당황스러움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 뿐 아니라, 담당자와의 협동 작업도 정지되기 때문에, 담당자는 스트레스를 겪는다. 자신이 압박을 받고 있을 때, 상대방의 마음 상태를 추적하지 않게 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만성적으로는 10대부터 사회공포증이나 분리불안 장애를 갖고 살아온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경우가 많다. 긴장하여 눈치를 보고 노심초사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 외, 여러 선천적 원인 혹은 발달 과정에서의 영향으로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이 낮을 수 있지만, 실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은, 노인들과의 대화에서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성숙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이며, 인간은 노년기가 되면 지식과 어휘력 외에는 모든 인지기능이 저하된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게 되고, 자신이 젊을 때부터 갖고 있던 성격적 약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어떤 노인이 카페의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다.      


“어떤 것 주문하시겠어요?”

“그거 줘요. 그거.”

“어떤 것 말씀하시는지요?”

“그게 뭐더라 저번에 먹었었는데.” 

“...저번에 어떤 것을 주문하셨나요?” (이 경우,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겠지만, 결국은 고객이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이 통상적이다) 

“모르겠네. 그냥 아무거나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괜찮으실까요?”

“그건 너무 추워서 싫어요.”      


이 고객은, 노령에 이르러 그렇게 된 것이든, 젊었을 때부터의 기질 때문이든, 현재 자신이, ‘그거 달라’라고 했을 때, 상대방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주문을 받을 수 없음’을 사유하지 못한다. 나는 적당한 음료를 주문하고 싶으며, 그것은 저번에 먹었던 것이지만, 지금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욕구와 당혹감이 메모리RAM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결론 내자면,      


1. 이런 경우들에서 서비스 제공자가 답답하며 분노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그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      


2. 하지만, 분명히 고객은 일말의 부도덕이나 결례를 저지르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화가 난 담당자가, 자기도 모르게 욱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뱉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부도덕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녹취되어 현실적으로 지탄 받게 되는 일이 많다.)     


3. 그리고 문제의 본질은, 담당자와 고객의 성격이 아니라, ‘여권 재발급’이나, ‘음료 주문’이라는 과제 자체에 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뉴로티피컬들이 가볍게 읽어 오기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

   

4.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다른 직면을 하자면, 담당자 역시 ‘공감과 마음이론’이 부족했다. 담당자는, 고객이 애초에 자신의 무지(자신의 ID를 모름)으로 인해 당황했었음을 공감하지 못했다.      


아마 담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내 일 하는 것도 바쁜데 왜 내가 민원인들 마음까지 공감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공감은 도덕적 의무가 아니고, 본능적 인지 반응이다. 공감적 행동 즉, 민원인을 위로해주라거나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외적으로는 저 담당자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똑같이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해도, 상대의 곤혹스러움을 공감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요점은 민원 업무 처리가 더디고 해결 방도는 없지만, 민원인의 당혹스러움에 공감한다면, 저 글쓴이만큼 심한 분노를 느끼지는 않는다.      


다시 다른 예시, ‘여권수령을 위해 직장 주소를 물어봤을 때’의 내용인데,  


“수령 하실 직장 주소를 말씀해주세요”

“나도 몰라요”      

   

이 장면 전후의 심리적 맥락은, 민원인이 가능한 여권은 빨리 받고 싶은데, 그러려면 직접 수령을 해야 하고, 그런데 출장을 자주 다니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그런 자신의 당황스러움 속에서 발생한 발화(發話)였다.  

    

하지만 담당자가 그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면, ‘이 민원인이 왜 나한테 그걸 묻지? 나보고 찾으라는 건가? 나를 호구로 보나? 나를 놀리나?’ 라는 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즉, 자신을 이기적으로 착취한다고 생각하므로, 저런 민원 케이스 하나하나를 해결하기가 힘들고 격심한 증오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 정답은 이미 현장에 있다. 민원이나 서비스 업계에(정신과 진료도 포함하여) 이런 붙통(不通) 사례는 지나치게 흔하다. 그래서 은행이나 우체국, 관공서의 접수대에서 보면, 어르신들의 푸념이나 사소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모두 방치 및 수용하면서, 매우 천~천~히 업무를 진행하는 직원들을 볼 수 있다.      


완벽주의를 가진 젊은 직원은, 눈 앞에 놓인 문서 처리나 행정 업무를 서둘러 해치우고 싶겠지만, 이 방면에 어느 정도 노숙하게 경험을 쌓게 되면, 이런 행정이나 민원 업무는, 신속하게 완료해야 하는 부류의 일거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나인투식스의 ‘시간제 근무’ 같은 느낌으로, 되면 되고 아니면 말고, 뒤에 다른 고객들이 많이 기다리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고, 빨리 하든, 늦게 하든 내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으니... 민원만 안 들어오게 하자... 라는 식의 습성이 몸에 배게 된다. 그리고 서비스 제공자에게 이러한 매너리즘은, ‘좋은게 좋은거고 애 써봐야 소용없다’는, 타성이면서도 자기 적응의 방어기제다. 만약, 서비스 담당자가 이런 매너리즘을 탑재하지 않는다면, 그 청년은 곧 통제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다수의 대상들로 인하여, 무능감을 느끼다가 번아웃될 것이다.

      

정신과 상담 중에도 이런 류의 화법은 비일비재해서, 치료자는 환자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가령,      


"어떤 점이 힘이 드세요?" 

"달라진 게 없어요." 

(나는 이 분을 처음 뵙기 때문에 어떤 점이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다)     


"몇 시 쯤 일어나세요?"

"일찍 자려고 노력해요" 

(나는 이 분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라는 식으로, 비껴간 대답이 흔하다.      


어떤 환자분은 내원 첫날 수면제에 대해 궁금하신 것이 많았다. 그리고 갑자기 다시 묻는다.      


“선생님, 또 궁금한게 있는데요… 그 항목에 있는 내용 보고 걱정이 많이 되어서 어제 잠도 못자고, 그때 병원 올까 하다가 못 왔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 항목이란 것이... 어떤 내용을 보신 건가요?”

“제가 여름에 준비하고 있는게 있거든요.”     

(뭔가 불안해서 질문하시는데 나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으신지...”

“그 뭐라고 하지? 뭐더라...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여기까지 듣고 나는 경험적으로, 그 분이 말하던 내용이, 자격증 취득 시험에서 요구하는, 정신과적 질환에 대한 평가 항목과 진단서 발부에 대한 것임을 추정 가능했다. 일단 내가 그 의도를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의 언어에는 정보 전달이 매우 빈약하다.      


이 분들은, 내가 표정을 찡그리지 않는 한, 내가 거듭 추가 질문을 해도, 내가 ‘답답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추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왜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상대방의 마음을 실시간으로 공감적 추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언젠가 한번은 상담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치료자가 느끼는 ‘답답함’ 내지는 ‘이해할 수 없음’은, 단지 ‘이해할 수 없음’ 그 자체이며, 내가 ‘답답하다’면, 그 원인은 단지 환자를 이해하지 못해서 돕기가 어렵기 때문임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설명한다.      


내가 내담자의 마음이나 말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담자를 나쁘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며, 이러한 답답한 상황이 얼마간 계속 되더라도, 그것은 내담자의 잘못이나 무능이 아님을 계속 얘기해드려야 한다. 왜냐면, 이 분들은 이미 자신의 다른 인간관계에서, ‘사회성’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 주눅 든 적이 있으며, 이러한 지적은 집단적인 히스테리(광기의 투사)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공감’이나 ‘사회성’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그 뒷면에는 ‘수치심’이 있다.      


‘돌려서 말하기’, ‘비껴간 대답’, ‘지엽적 사실 나열’ 등으로 인해, 치료자는 환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어렵지만, 더 큰 어려움은, ‘당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움’을 알리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환자는, 나의 눈치를 보면서, 용기 내어 찾아왔건만 혹시 의사가 자기를 나쁘게 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진 시에 ‘공감과 마음 이론’이 부족한 케이스의 환자분을 만나게 되면, 상담 보다는 검사지를 통해 증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급성 증상이 가라앉고 의사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면, 나중에 필요에 따라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된다. 그러면 대부분, ‘친구’나 ‘회사’ 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숨기고 있는 강한 고집이나, 독특한 사고방식을 넘어서, 진지한 심리 상담이 가능해진다.

      

‘공감과 마음이론’이 부족한 분들은, 겉으로 보이는 예의바르거나,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와는 별개로, 자기 고집이 매우 강하고, 사고방식이 독특하다. 오래된 자기 직업 스트레스 때문이든, 사회공포증 때문이든, 대인관계 경험이 적고 타인의 마음을 추정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신념이 강화되고, 자신만의 언어적 개념 사용이 특별해질 수 밖에 없다.      


환자가 자신의 심적 고통으로 인해 내원했다고 하더라도, 마음과 공감 이론이 부족할 경우, 원활한 심리 상담은 어렵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용기내어 털어놓고 펑펑 울어버리는 정서적 환기의 장면은 임상에서는 매우 드물며,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자각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신체증상이나 불면증, 강박에 대한 호소가 주되다.      


이 분들에게는, ‘공황장애 증상이므로, 당분간 쉬시면서,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술과 커피를 자제하시라...’고 설명하기 조차 어렵다. 그러면, ‘일이 바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쉴 수 없으며’, ‘커피를 마셔도 나는 체질상 불안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한다.(즉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심적 고통 그 자체와 진료 상황에 대한 긴장감 때문에, 자신이 의사의 권유를 모두 반대했을 때, 의사가 느낄 당혹감을 추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약 이 점을 표현한다면,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게 정신과 의사의 직업인데 왜 그런걸로 당혹스러워합니까?')  


그러므로 이 부분, 즉 진단과 생활방식에 대한 설명은 일단 뒤로 미루고, 확인된 급성 증상을 먼저 치료한 후에, 안정되면 필요에 따라 이렇게 겉도는 언어 소통에 대해 직면하게 된다. 그 후, 조금씩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고,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구체적인 갈등 사례에 대한 상담이 가능해진다.      


다시 한번 동전으로 예를 들자면,      


사회성이나 공감의 빈 자리에는, 부족한 정서적 단서를 보상하기 위한, 고지식한 신념과 원칙주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뒷면에는, 사회적 집단 심리의 투사물인, 광기의 기호를 뒤집어 쓴, 강렬한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전 장에서 말했던, 고지식한 ‘원리원칙 주의자’가 드리운 그림자는, 그 ‘원칙’이, ‘교과서’나, ‘법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양육한 부모 혹은 자신의 내적 심리 세계 혹은, 자신이 접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상’이란 어떤 면에서는 도덕이 아닌 통계적인 개념이며, 독창성과 비사회성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백프로 옳다고 생각했던 규칙이나 생활 패턴이, 비효율적인 강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렬한 수치심을 극복하고 만나게 될 자신의 마음의 모습은, 혼란스럽고 억울하기 그지 없다. 

어렵게 열어젖힌 마음의 문 안에서, 천사가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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