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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Feb 22.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5장 - 공감과 사회성이라는 족쇄 


뉴로티피컬(Neurotypical, 신경전형)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자폐증이, 질환이나 장애가 아니라 소수자임을 천명하는 운동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뇌신경적 속성을 정상, 비정상으로 나눌 수는 없으며, 통계적인 전형들과 소수자들로 구분하라는 것이다. 


요즘 2~3년 사이에 성인 ADHD 진단과,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관심이 늘고, 수많은 온라인 상에서의 자가 진단이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보건 계몽과 정신의학의 진보 덕분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현상은, 열악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조직 사회에서, 좌절하고 우울해진 청년들이 그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안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인 ADHD 와 아스퍼거 증후군이, 유병율에 비해 진단율이 낮았던 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진단 증가의 계기가, 순수하게 환자들 자신의 내부로부터 느껴진 고통이 아니라, ‘직장과 대인관계의 문제’ 때문에 촉발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최근 청년들은 사회에 적응하는데 엄청난 피로와 좌절감을 겪고 있으며, 일에 집중이 되지 않고 항상 피로하니 자신이 ADHD 가 아닌가,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어렵고 자주 다투게 되니 자신이 사회성이 부족한가 고민을 한다. 


사람은 어떤 트라우마를 겪은 후, 사건의 책임을 자신의 안에서 찾으려는 속성이 있는데, 왜냐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조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약물 의존 환자가 집요하게 수면제나 페니드 처방을 요구하다가 실패하고 떠나면서, '너가 의사면 다냐? 재수 없다' 라고 소리 지르면, '내가 더 부드럽게 회유하거나 거절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우울해지게 된다. 

 

하지만 ‘내가 더 싹싹했어야 했다’ 거나, 아니면 나 자신에게 ADHD, 아스퍼거, 사회소통장애, 비언어성학습장애, 경계성 지능, 경계성 인격 등의 자가 진단을 붙이고 전문가의 검증을 받아봐야, 직장이나 대인관계에서  크게 변하는 것은 없다. 만나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미묘하게 다르고, 내원한 환자 자신의 생각도 다르며, 그 진단이 합당하다고 생각되어도 딱히 도움이 되는 것이 없고, 그러니 여러 병원을 전전하거나 여러 검사를 받다가 혼란에 빠지고,  결국은 의사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된다.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는, 요즘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ADHD 진단과 신경자극제 처방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있다. 많은 청년들이 유튜브를 보고 '나도 ADHD 인것 같다'며 정신과를 방문하는데, 그들이 흔히 호소하는 증상이 집중력 저하와 무기력감이다. 공부나 일에 집중이 되지 않고 자꾸 실수를 하게 되며, 모든 것에 항상 흥미를 잃었고 기운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증상들은 기본적으로 정신의학적으로 가장 흔한 우울증과 불안증의 기본 옵션이다. 고된 근무 환경과 작업량으로 인해 번아웃된 청년들이, 나도 ADHD 인 것 같다고 내원하는 것인데, 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심신이 지쳤다면 일이 하기 싫고 실수가 늘고, 쉴 때도 재미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 경우 신경자극제를 투약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고양되고 의욕이 항진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직장이나 공부에 ‘집중’하고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이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 다음, 관심이 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소위 ‘공감’ 능력이라던가, ‘사회성’이라던가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먼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자폐적 성향, 사회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부족한,  ‘이 기능’을 뜻하는, 간단하게 통일된 전문 용어가 없다. 이 용어들은, ‘사회성’, ‘공감 기능’, ‘사회인지’, ‘정서지능’, ‘마음이론’, ‘정신화’ 기능, ‘심리적 통찰’ 등 다양한 분야에 조금씩 교집합을 이루며 산재되어 있다. 


나로선, 가장 익숙한대로 ‘공감’이란 단어를 쓰고 싶고, 실제로 상담할때도 많이 쓰고 있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이 ‘공감’이란 단어가 일반인들에게 사용되면서 곤란한 부분이 생겼다. 요즘 사람들은 ‘공감’이라는 단어를, ‘타인을 정신적 및 물질적으로 배려하는 능력’으로써 사용하기 때문이다. 


‘공감(共感)’은 같이(共) 느낀다(感)는 말이다. 그 사람의 힘든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능력’일 뿐, 꼭 추가로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는 것,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속상해 하는 사람에게는 사과하는 것을 ‘공감’이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는 ‘공감’이 도덕적 가치가 있는, 교양인의 의무처럼 되어 버린다. 그리고 ‘공감이 부족하다’라는 말이, 도덕적 비판이 되어 버렸으니, 임상에서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공감은 그저, ‘느끼는 것’까지만이 공감이다. 그 ‘공감’을 기반으로 ‘표현’을 하게 되면 그게 ‘공감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동료가 점심을 못 먹고 일하고 있으니 표정이 안좋군...  하면서 나도 찜찜하긴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이것도 공감이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나 때문에 속이 상한 것 같은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러고보니 오히려 나도 억울하고 짜증이 난다...고 해도 공감은 가능했다. 


직장 상사나 배우자 간의 갈등에서, 내가 싫어하거나 상대방이 그 버릇을 고쳐주지 않거나, 내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때, '아, 우리 남편 공감능력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부분을 알고 있지만, 그 부분을 들어줄 의도나 능력이 부족한 것일 뿐, 아내의 불만을 모르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어느날 이러한 불만을 넌지시 표현하는 아내에게,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죄책감을 자극하니까)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써, 상대의 태도와 표정,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의 사회적 맥락을 근거로, 그 사람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추론되고, 그 감정이 (자동으로) 내 마음 안에서 비슷하게 재현되는, 본능적 기능이다. 굳이 하고자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기억력이나 반사신경처럼 그 대상이 지각이 되면 본능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자나 상담자가 치료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자비심이나 적극적인 위로 멘트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힘든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을 ‘성공하라’는 것이다. 

  

힘든 감정을 듣는 것을 ‘성공한다’라는게 무슨 말이냐면(그러니까 의외로 그게 왜 어렵냐면),

 

실제 심리전문가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든 감정을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표현불능(alexithymia)이라고 하는데, 자기 자신의 처한 상황의 사실들을 나열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자책하거나, 치료자의 눈치를 보거나 할 뿐, ‘내가 그 일 때문에 슬프다’라고 털어놓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분들은,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의미를 알지 못하며, 다른 이에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민폐에 불과하고, 설령 용기를 내어 말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힘든 감정을 타인에게 표현한 후, 타인이 내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해줄 때, 약간은 기분이 편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지인이나 가족에게 틈틈이 뭔가를 불평하는 것이다. 가끔은 술의 힘을 빌려야 용기 내어 말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그 불평의 빈도가 지나치게 잦아서 지인들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자기 감정을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공감의 행사와 경험이 결여된 사람들인데, 쉽게 말하면 자라오면서 공감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해줄 수도 없는, 그런 경우이다.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가령, 엄마와 너댓살 정도된 어린 아이가 함께 길을 가는데, 앞서 가던  아이가 심하게 넘어졌다고 하자. 그러면 흔히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아이들은 즉각 엄마를 찾고 엄마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엄마가 와서 안아 일으키고 달래면, 그때 아이는 울기 시작한다. 


넘어진 어린 아이들은, ‘통증’이라는 감각은 알고 있다. 두뇌의 감각 중추로 통증의 정보가 입력되면서, 동시에 편도체에서 불안의 신호를 보내는데, 그 생소한 일련의 두뇌 전기 신호 앞에 혼란스러워진다.  이때 엄마가, ‘아이쿠! 아프겠구나! 놀랐겠네!’ 하며, 달래줌으로써, 이것이 ‘불안’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임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엄마의 감정적 거울화(mirroring)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감을 통한 위로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부모의 오해와 관련이 있다. 영아를 기를 때부터 아기의 엄마는, 한동안 수많은 인간적이고 자애로운 ‘오해’를 하게 된다. 아기가 나를 알아보고 웃었다, 장난감을 보고 기뻐한다, 혼자 있으니 무서워한다, 아플까봐 불안해한다라는 등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아기가 보유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함께 기뻐하고 웃고 달래고 안아줌으로 인해, 아이의 정서를 학습시킨다. 이러한 부모의 조그만 오해는 인간의 정상적인 정서 발달에 필수적이다.  


<1> 

만약 아까 전의 그 아이가 길에서 심하게 넘어졌을때, 엄마의 반응이 무표정하며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아기는 울지 않을 것이며, ‘통증’과 ‘불안 혹은 슬픔’이 두뇌 회로 내의 ‘세트’로서 묶이지 않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엄마가 아이를 일으켜세운 후 먼지를 털면서 짜증을 내면 어떨까?  ‘경우야! 그러니까 조심 하라고 했잖아!’ 라면서 말이다. 이런 경우, 아이는 ‘통증’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의 회로 세트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즉 엄마는, 비록 인간적이거나 성숙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정서적 반응은 있었다)


<3> 

그러나 2번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아예 엄마의 정서반응만 결여된 경우이다. 엄마가 만약 단순히 아이를 기계적으로 일으켜세우고 먼지도 털어주지만, 무표정하고 전혀 흥분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다면? 건조하게 ‘조심해야지’ 정도 짧게 말하고 끝난다면? 이런 경우에는, ‘통증’과 ‘현실적 문제 해결’의 신경 회로 세트가 남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1번과 같은 과정을 겪고 자라난 사람은, 힘든 일이 있으면 타인에게 그 일을 털어놓고, 상대방의 온정적인 표정과 어조로부터 약간이나마 마음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2번과 같은 과정을 겪은 사람이라면, 문제가 생겼거나 힘들 때마다, 은근히 자기에게 ‘잔소리’하고 ‘훈계’하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3번과 같은 성장사를 겪는다면,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주는 것만이 의미가 있게 된다. 


누군가의 고민을 타인이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유년기까지 뿐이다. 인간이 성인이 되어 겪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부모나 친구가 대신 해결해줄 수 없으며 결국 혼자 감내해야한다. 그 과제를 완수할 수도 있고, 결국은 실패할 수도 있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은, 그때 그때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해결할 수 없으면 좌절하고 슬프고 상처가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3번과 같은 감정표현불능의 내담자들은, 공감을 주고 받은 경험이 적음에 따라, 상대적으로 공감 기능이 약해지게 된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아봐야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기에, 고민을 말하지 않는다. 즉, 자신이 갖고 있는 공감 받고 싶은 정서적 욕구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친구의 고민은 무차별적으로 들어주고 현실적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저들은 왜 항상 저렇게 징징댈까? 혼자서 해결하지 못할까? 뒷담화에 관심이 많을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쓸데없는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까?’하고 궁금해 하고 피로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나 타인의 ‘고통’을 보상하기 위해, ‘위로’나 ‘공감’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치중하기 때문에, 항상 다방면에서 일이 많고, 타인들을 물리적으로 돕는데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이런 부분은 어떻게 보면 가족이나 동료들이 보기에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항상 다른 사람들을 무한정 보살피던 사람이, 어느날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의 스트레스를 겪고 우울증이 걸리면, 이들은 오래 망설이다가 어느날 ‘큰 마음 먹고’, 정신과에 ‘한번 와보게’ 된다. 그럴때 이들이 우울증 진단과 약물 치료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치료가 진행될 수 있지만, 만약 약물 치료가 싫다면 치료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 분들이 생각하는 심리 '상담'이란, 은행 상품이나 전자제품 판매 상담과 같아서, 고객이 필요한 물건을 말하면 판매자가 여러가지를 설명하며 구매 목록을 제시하고, 그 중에 여러가지를 따져 고른 후 물건을 고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신과에 와서도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를 나열한 후 ‘그러니 어떻게 해야되겠느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에 대해 치료자는 본능적으로, 평범한 한명의 인간으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싶어진다. 만약 치료자와 내담자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면 실제로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조언도 가능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러한 조언은 큰 의미가 없는데, 현실적인 해결책이나 조언은 이미 환자도 충분히 찾아보거나 지인들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상담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공감과 위로 뿐인데,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므로, 치료자 역시 공감이 어렵다. 어렵게 마음에 대한 얘기를 끌어내고 위로를 해도, 내담자는 그것이 의미 없는 공치사거나 직업적 멘트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효과가 없다고 해도, 내담자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스트레스 상황과 슬픈 감정을 정리하여, 그 부분에 위로를 던지고 슬픈 표정을 짓는 것. 그것이 바로 치료자의 치료기술로서의 공감이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내용은 별것 아니다. 그냥 ‘거기서 그 사람한테 그런 일을 당했으니 속상하셨겠군요’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치료자의 표정과 말투는, 수십년 전, 아이가 넘어졌을때, 엄마가 지었어야 할 그 표정과 말투인 것이다. 이러한 공감적 경험이 누적되면, 내담자는 공감 받는 것, 평가 받지 않고 위로 받는 것, 그로 인한 안정감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라포를 형성하여 장기적으로 공감을 훈습하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공감’은, 타인들이 나를 비난하지 않을까 항상 긴장하면서, 타인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거나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 착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라도, 심리적인 ‘공감 기능’은 약할 수 있다. 


공감은, 타인이 놓여진 상황, 그의 표정과 말투, 말하는 내용 등을 접수했을 때, 타인이 느낀다고 예상되는 감정을, 나 역시 똑같이 경험하는 기능이다. 위로하느냐, 돕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요점은 나 역시 ‘느낀다’는 것이다. 나의 그 느낌은 사실 그가 느낀 느낌과 다를 수도 있다. 그가 화가 났으리라 믿고 나도 분노를 느끼게 되었지만, 사실 그는 화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요점은 나 역시 동시에 ‘느꼈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공감의 경험이 부족하며, 경험하는 정서의 질이 얕고, 자신의 감정을 격리시키는 경향’은, 흔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강박적 인격의 사람들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즉, 자신의 괴로운 감정을 스스로 자각하기 어려워서, 우울증에 걸리고도 자신이 우울증인지 모르며, 타인의 우울감을 말로만 위로하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항상 물리적으로 돕거나 대신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도 바로 ‘공감 부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공감’이 부족하다는 말이, 무책임함이나 반사회적 경향처럼 남용되고 있으니 곤란하다. 다행히 이러한 신경증적인 경향이나 우울증, 불안증 환자들에게 ‘공감’이라는 용어를 직접 쓸  필요가 별로 없다. 


내가 ‘공감’이라는 용어를 실제로 환자에게 설명하면서, ‘공감 기능이 부족하다’고 하는 경우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성인 ADHD, 혹은 양극성 장애 환자를 상담할 때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모종의 문제로 인해 대인관계나 직장 생활이 계속 어렵게 흘러가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막연한 자책을 되풀이한다. 이럴때, 조심스럽게 당신에게 부족한 것은, 단순히 ‘사회성’이나 ‘인성’, 혹은 ‘사회적 성숙’이 아니라, 선천적인 공감 기능의 부족이라고 설명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가령 사람마다 타고난 운동 감각이나, 수학 문제 풀이, 언어 이해, 집중력, 기억력,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 전화 번호를 외우는 능력에 다양한 차이가 있을 수 있듯이, 타인의 감정을 추리하여 내게로 복사해오는 이 공감 기능 역시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있다. 


이 공감 기능을 0점과 100점 사이에 놓고 볼때, 

100점이라면 피암시성이 지나치게 높아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무조건 믿고 보거나 혹은 선동되는, 보이스피싱 연쇄 피해자나 사이비 종교의 신봉자가 될 것이다. 

0점이라면 소위 말하는 소시오패스처럼, 인간의 감정을 배제하고, 타인을 그저 ‘도구’로만 보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공감 기능이 완전히 결여된 인격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심리학적 용어면에서는  반사회성인격의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자기애적 인격의 나르시스트가 맞다. 나르시스트들은, 타인을 도구로 보고 공감적 기능이 없어서, 타인을 착취하고 이용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은 지키며, 통념적인 관습적 규칙도 제법 따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법과 규칙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바로 소시오패스다.


그러므로 요즘 흔히 쓰이는, 비난의 관용어구가 되어 버린, 

‘걔는 공감 능력이 없어. 소시오패스 아니야?’ 라는 말은, 학문적으로 오류 투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에는, 이전 장에서 얘기했던 내용, 즉 한국인들의 ‘사회성’이라는 집단적 가치에서 위배된 존재들에게 투사한 ‘광기’의 기호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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