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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Feb 23.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6장 - 안타고니스트 ‘인싸’의 환상 


‘사회성’이 부족하면 미움을 받는다고 한다. ‘사회성 부족’을 비정상으로 진단하는 것이 가능한지, 어떻게 사회성 부족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사회성이 부족하다면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고립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고들 믿는다. 


사회성(sociality)은 동물이 집단을 형성하려는 욕구와,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각 개체들의 습성이다.  일개 포유 동물의 사회성이라면, 그 집단을 떠나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위계가 높은 개체에게는 먹이를 양보하는 것, 적의 출현에는 함께 대항하는 것 정도면 될 것이다.


인간 역시, 혼자 살지 않으며 집단을 이루려고 한다. 청년들은 도시로 몰리며, 은둔형 외톨이라도 인터넷으로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 


하지만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인간의 집단은 커지고 복잡해지는데, 통치 도구로 제시된 법률 외에도, 사회적 계약에 따른 여러가지 규율이 탄생한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 필요한 사회적 관습은 시대마다 질과 양이 변화한다. 가령, 근대까지 ‘생존’ 만으로도 버거웠던 대다수의 서민들에게는, 지배계층에게 복종하며 명시된 도덕률을 엄수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암묵적인 규칙이 없었다. (그리고 근대까지의 일반 시민들의 가족 및 동료 관계는 현대에 비하면 훨씬 충동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예절’이나 ‘매너’는, 귀족으로부터, 그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제례’와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악수’라는 관습이 중세 유럽에서 서로 칼을 뽑지 못하도록 ‘오른손’을 맞잡는 것에서 유래되었듯이, 귀족들의 예절은 친밀감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권위와 안전 확보를 위해 발달 되었다. 이러한 ‘예절’이나 ‘관습’, ‘인사’나 ‘선물’ 같은 규칙들은, 지금까지도 계급 구조를 공고히 하고, 기성 세대의 권위를 보충하는데 사용된다. 허리 굽혀 인사 하거나, 깍듯한 어린이를 더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과정에서, 사회성에 윤리적 가치를 내포시킨다.   


조직에 소속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필요한 여러가지 암묵적인 규칙(unwritten rule)들은, 문화, 국가, 지역에 따라 다르다. 특별히 가정이나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이 사회적 관습들은, 그 지역 문화의 역사를 반영한다. 그 성분들은, 그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지, 그 성분이 더 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관습이 더 도덕적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모르는 사이라도 미소 짓고 인사하는 것을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근한 사이가 아니라면 신체적 접근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직장이나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며 분노해서는 안된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대뜸 인사하는 것은 이상하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누군가가 가까이 지나가려고 하면 알아서 비켜주어야 하고,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맨다. 그리고 직장이나 공공장소에서, 사연이 합당하면 고성과 폭언도 가능하다. 심지어 폭력이 발생해도 전후사연에 따라, ‘그래. 그럴 만하다.’며 넘어갈 수 있다. 


만약 내가 식당에서 제육 볶음을 주문했는데, 새우 볶음밥이 나왔다고 치자. 음식이 잘못나왔다고 했더니 사장이 나와서, ‘ㅆ…그냥 대충 먹고 가쇼’라고 한다면, 내가 사장에게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 사장이 파출소에 가서 내게 쌍욕을 먹었으니 고발하겠다고 해도 경찰관이 반려하고 수습해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무조건 행동에 나선 사람이 경관에게 체포 된다. 


2022년 미국의 영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윌스미스가 자신의 배우자를 소재로 농담을 하던 코미디언의 따귀를 때렸다. 그 뉴스가 전해진 직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잠깐 윌 스미스를 두둔했었다. 그 코미디언이 윌 스미스의 배우자의 난치성 질병으로 인한 탈모를 노리고, ‘삭발하고 여군으로 나오는 영화 찍을 거냐’라는 스탠딩 코미디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여론이 일제히 윌스미스를 비판하자, 한국인들도 곧바로 방향을 바꿔서, ‘사실 윌 스미스 부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면서 괜히 오버했구나’ 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때리면 안되지!’ 가 아니라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폭이나 따돌림을 심하게 당한 자녀의 아버지가, 가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식으로 전후 사정이 납득이 되면, 역시 폭력의 당위성을 인정해주는 면이 있다. 


몇 달 동안의 지나친 야근과 상사의 잔소리, 연봉 동결에 어느날 폭발한 김과장이, 팀장 앞에서 ‘씨발 때려치면 될거 아냐!’라며 파일을 던져도, ‘그래, 그동안 오죽 힘들었겠어?’라며, 다른 사람들이 끼어 들어 달래고 부장이 용서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무리가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폭행은 고사하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무언가를 치거나 던지면 체포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사람이 싸우다보면 흔히 ‘너 죽는다!’ 라며 엄포를 놓지만, 미국에서 ‘I will kill you’ 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이 차이는 문화적으로 유래가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인구 밀도는 낮고, 총기가 허락되어 있으니,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훨씬 높다. 미국 사람들이 초면에 활짝 웃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공적인 자리, 공적 관계에서의 고성이나 폭력을 금기시하는 것은, 저변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다. 백인들이 더 교양있거나 합리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이 우리보다 천성적으로 붙임성 있거나 합리적이라는 의견은 사대적 오해이다. 그들도 인간관계에서 항상 피로감을 느끼며, 충분히 내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단지 그들이, 사회 문화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도록(대외적으로 친밀하게 행동하라, 공적인 자리에서는 화를 내지 말라)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젊은 남성들은 마초성과 근육량에, 그리고 여성들은 외모의 매력을 과시하는데 훨씬 더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화 참여와 자연스러운 대화 진행,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화술에 대한 강박도 심하다. 


만약 북미에서 파티에 참석했을 때, 쑥쓰러움을 많이 타서 오랫동안 침묵한다면, 그것은 자기 무능감을 넘어, 타인에 대한 ‘결례’에 해당하며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낯가림이 심한 사람을 그대로 둘지언정, 비난하거나 조롱하지는 않는다.  


미국인들이 새로 옆집으로 이사온 가족들을 꼭 초대해서, 마당에서 바베큐 파티를 열고 와인을 주고 받는 것은, 그들이 사람을 마냥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호 탐색과 안전을 위해 발달시킨 ‘관습’이다. 그들도 그러한 행사를 무척 피로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절반은 의무라고 생각한다. 막상 참가하기는 싫지만, 가서 놀다보면 해볼 만한 직장 회식처럼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회성의 규율이란 것들은 모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도덕이나 가치가 아니다. 


사회성은 의무나 기술적 요소도 포함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욕구’다. 타인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함께 보고 싶고, 한 공간에 함께 있고 싶은 정서적 욕구가 사회성의 본질이다. 일단은 타인과 함께 하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고, 그러기 위한 습성이 점차 마련되거나 학습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볼 때. ‘어떻게 하면 사회성을 기를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방향 설정이 틀렸다. ‘지금 걔랑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까?’ , 혹은 ‘나도 단짝 친구나 이성 친구를 만들고 싶다’ 라는 욕구의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회적 욕구, 우정이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없이 사회성을 기르겠다며, 화술이나 외모를 가꾸고, 관심도 없는 소모임이나 동아리로 무조건 뛰어드는 것은, 식욕이 없는데 요리와 재료의 종류, 메뉴판을 분석하는 스킬을 연습하는 것과 같다. 


내가 오늘 점심 식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일단 배가 고파야 한다. 배가 고프면, 신중하게 혹은 대충, 한가지 메뉴를 골라서 식사를 할 것이고, 오늘 나는 그렇게 한끼를 떼운 것이다.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맛도 없고 비싸서 별로였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점심의 식생활을 유지했다. 


하지만 내가 식욕이 없다면, 메뉴 선정과 식당들의 위치에 대해 공부해봐야 의미가 없다. 억지로 먹은 다음에 괜히 이런 음식을 먹었나, 이 음식에는 무슨 재료가 빠져서 맛이 이런가, 다시는 그 식당 가지 말아야지 하는 강박적 고민만 늘어난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성의 시작은, 일단 누군가가 그립고 함께 있고 싶어야하며, 그렇지 못하므로 외로워야 한다. 이런 사회적 욕구가 없다면 일단 서두르지 말고, 정서적 욕구 그 자체부터 배워야 한다. 


언젠가부터 소위 ‘인싸’니, ‘아싸’ 하며, 모든 조직에서 붙임성이 좋고 발화(發話)와 대사량이 많으며, 기분이 고양된 상태로 여러 소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을 우월한 것으로 보는 풍조가 생겼다. 화려하게 눈에 띄면서도 능숙한 인간관계를 구사하고, 다방면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그런 이상적인 캐릭터들이 대중 매체나 문화 컨텐츠를 통해서 반복 제시된다. 


하지만 그런 외향적인 인사이더의 이미지는 이상(ideal)일 뿐이며, 통계적으로 보아도 그 수가 많을 수 없다. 한 조직에서 한 명이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침묵해야하는데 어떻게 모두 똑같이 눈에 띄겠는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각종 모임에 참석하면서 한 가운데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으며, 기분 나쁜 상황을 노련한 유머로 넘기는 캐릭터는 대부분 자기애적인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들이다. 동서양 모두 대부분의 주인공은 섬세하고 고민이 많으며 위축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드라마에 나오는 파티의 달인들처럼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으며, 나 자신의 내부에 어떤 종류의 사회적 욕구가 자리잡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먼저다. 


임상에서 보면, 여러 해 동안 외로움을 타지 않고 혼자 잘 지내왔으면서도, ‘자신에게 친구가 없는 것은 무능한 것이며 병적인 것이다’라는 열등감에 빠져서, 강박적으로 대인관계를 시도하는 모습을 본다. 이런 경우에는 먼저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의 정체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혹시 우울함과 지루함, 심심함과 공허함을 외로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모종의 인간 관계를 형성하면 공허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로부터 신선하고 흥미로운 자극을 받고 싶다는 유아적 욕구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공허감'이나 '외로움'을 단숨에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섯부른 기대를 하지 말자. '타인'은 나의 영혼을 충만하게 해줄 '종교'나 '사상'이 아니고,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줄 '게임'이나 '컨텐츠'가 아니다. '타인' 역시 나처럼 '공허감'과 '외로움',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존재들이 모여서 서로 눈치를 보고, 함께 있으면서 외롭다고, 서로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억울해하고 다툰다. 


충동적, 강박적으로 개시하는 인간 관계는, 

외롭고 적막하며 열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아무 것도 없이 끝없는 사막과 같은 지옥으로부터 도망치고자, 

맨발과 맨몸으로 바닥에 돌조각과 유리조각이 가득한, 울창한 가시덤불 숲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한랭 지옥이 춥고 외롭다면서, 화염 지옥으로 뛰어드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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