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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Feb 27.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7장 - '공감'과 '마음 이론'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했다. 수습기간 동안 나름 열심히 배우고 적응하려고 노력 중인데, 평소부터 짜증을 자주 내던 사수가 갑자기 말했다. 


‘너는 너무 눈치가 없다, 사회성이 부족하다’


나는 뜨끔하고 자괴감이 들었다. 이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내게 결여된 무언가가 나의 적응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   


왜 나는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선배님들의 식탁에 휴지를 깔고 젓가락과 수저를 세팅해두어야함을 몰랐는가, 

왜 ‘괜찮다’고 하는 팀장님의 외투를 억지로 뺏어서 옷걸이에 걸어야함을 몰랐는가, 

왜 다른 부서 실장님을 찾아가서 업무 부탁을 하려면 커피라도 한잔 사가야한다는 점을 몰랐는가. 


이런 사례는,  

피상적으로는 사회적 관습과 규칙을 따르지 않음이지만, 

신경인지학적으로는 타인의 행동과 감정을 ‘무조건’ 내 안으로 복사해오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 


살다보면 학생 시절 언젠가, 우리 식탁에 휴지를 깔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아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간다며 녹차캔을 사는 친구를 본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사회적 맥락에 포함된 감정을(그 감정이 잘 보이고 싶은 애정 욕구이든, 밉보일까봐 걱정하는 사회 불안이든)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복사해오지 못했다. 그러니, 저 친구는 왜 저런 행동을 할까? 라는 궁금증만을 느꼈다가 곧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타인의 행동과 감정을 내 안으로 수시로 복사해오지 못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1>

타인의 표정과 발성에서, 타인의 감정과 생각 정보를 얻는 능력 자체가 부족했을 수 있다. 

(경계성 지능, 학습장애, 자폐 성향, 아스퍼거 증후군)


<2>

타인의 모습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며 집중하지 못했을 수 있다. 

(ADHD)


<3>

타인 앞에서 긴장하고 초조하여, 외부로의 감각은 모두 차단되고 자기 내부의 걱정만 반추하고 살아왔을 경우도 있다. 

(분리불안장애, 사회불안장애)


<4>

기존의 대인관계 자체를 떠나서, 유별난 강박 사고(세균이나 냄새, 전염 등) 자체에 매몰되어 살아온 경우도 있다. 

(강박장애)


<5>

동년배와의 교류 없이, 자신을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며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양육자와 결합되어, 타인을 관찰하거나 배려해야할 필요를 전혀 못 느껴왔을 수도 있다. 

(교육 문제, ADHD양육자)


이 중에 어떤 이유가 되었든, 결과적으로 결여된 것은 사회성, 공감 기능, 사회인지, 마음이론, 정신화 기능, 정서지능, 심리적 세련도 기타 등등이다. 


이전 장에서는 ‘공감’이라고 했지만, 이 용어들 중에서 자폐증을 포함하여 사회성에 가장 큰 약점을 주는 용어를 고르자면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 가장 근접하지 않나 싶다.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은, 자폐 아동 관찰을 토대로 정립된 인지기능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추론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오로지 그 상황에서의 타인의 ‘감정 상태’만을 규정하지만, ‘마음 이론’은, 그 사람의 ‘생각 상태’를 말한다. 


나는 일단 이 두가지를 합쳐 ‘공감과 마음 이론’이라는 용어를 쓰려고 한다. 


‘공감과 마음 이론’의 부족은 선천적인 결여일 수도 있고, 성장과적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가령 언어 발성의 해부학적 이상이 없어도, 선천적인 청각장애를 갖고 자란 경우, 발성도 어려운 것처럼, 비공감적인 부모로부터 양육된 사람은, ‘공감과 마음 이론’이 부족해질 수 있다. 


‘공감과 마음이론’은, 타인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 시선과 주변 상황을 토대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추리하여 내 안으로 복사해오는 본능적 반응이다. 타인의 슬픔을 동정하거나, 같이 우울해지는 것은,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부러 노력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꾸 힘들다고 징징대면 듣는 사람도 피곤해지는 이유도 역시 공감 때문이다.) 


인간은 마음 이론 기능을 통해,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을 보고 그의 마음 상태를 추론할 수 있다. 


가령 누군가 커피를 마시다가 잠깐 컵을 내려두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 그 커피 컵을 어딘가로 가져가거나 치워버렸다면, 나는 돌아온 사람이 커피가 사라졌음을 발견하고 되찾으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의 커피를 결국 되찾지 못한 후, 기분이 나빠진 것 같은데, 나는 그 표정과 몸짓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이것이 ‘공감’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동정심, 혹은 불안감, 혹은 분노에 공감하여, ‘공감적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너가 커피를 다 마신줄 알고 OO씨가 그걸 치웠어’라고 알리면서 동정적인 표정을 지을 수도 있고, 추가로 ‘내가 한잔 더 사다줄게’라고 할 수도 있다. 


타인의 마음 상태를 추론하는 ‘마음 이론’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이론을 통해서, 누군가 갑자기 어떤 위험 요인(예를 들면 맹수나 독충)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렸을때, 나 역시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돌아보면서 위험 요인에 대비할 수 있다. 그리고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협력하여 해결할 때, 타인이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추정할 수 있는 능력은, 집단의 성공률을 높여준다. 


만약 우리가 시간에 쫓겨 어려운 팀 과제를 진행해야한다면, 자신의 마음 상태와 불안을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을 팀 동료로서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팀 과제를 나누어 수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포착(공감)하는 사람, 나의 일을 도와주는 행동을 취하는 동료에게는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왜 나는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될까? 절대 선(善)에 대한 지향? 아니다. 내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지는 이유는, 그가 믿을 만한 사람으로서 이후에 내게 추가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나의 긍정적인 파트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것은 본능적 반응이자, 무의식적 욕구로서 유전자에 학습되어있는 행동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감’이란, 무조건적인 이타주의, 휴머니즘, 자비심의 일부처럼 느껴지지만(혹은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인간의 환경 적응 및 개체 상호 이득을 위한 인지 기능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각 기능은, 타인의 얼굴과 미묘한 표정, 발성 변화를 포착하는 능력이다.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거나, 표정에 담겨있는 감정을 지각하는 능력은 분명히 ‘신경학적 기능’이며, 선천적으로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후천적인 병리에 의해 상실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표정한 사람’을 경계하며, 특히 보편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어야 마땅한 순간에 무표정하거나 무감정한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선한 웃음을 짓는 사람을 선호하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줄 알고, 진심으로 그를 지원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렇게 ‘공감’ 역시, 사회적 규약과 예절처럼, 인간의 본능적 필요에 의해 탄생하였지만, 문명 발달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가 부여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어릴적 함께 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우정 관계를, 성인이 되고 스트레스 환경에 놓이고 나면, ‘내가 어려울 때 이득이 되느냐’ 혹은 ‘내게 손해를 주느냐’로 재평가하곤 한다. 그러면서 '사람이란 마땅히...', '우정이란 무릇...' 이라는 식의 도덕률을 들먹인다. 


그러므로 인간의 여러가지 감정들 중에서 ‘공감’이 발휘되는 분야는 대부분 슬픔, 불안, 공포 등의 부정적인 상황이다. 이런 감정을 누군가에게 호소할 때, 타인이 공감적 위로를 받고 내가 어느 정도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일종의 정서적 희석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나는 심각한 위기라고 판단했지만, 그 얘기를 듣고 불안해하지 않는 타인의 감정 상태를 보면서, 자신의 위기를 하향조정할 수도 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며, 이타적인 행동 밑에는 대부분 자기 이득에 대한 계산이 깔려있다. 인간의 이타주의와 양심 모두, 내가 도움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 기반한 인지기능이다. 나아가서는 이타주의가 발달된 조직이, 그렇지 못한 조직보다 우세해진다. 휴머니즘과 자애, 자비가 아무리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는 하지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현실에서 가치를 구현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사회적 교육을 받은 결과, 그러한 도덕과 봉사, 적선이 중요하다고 알고만 있을 뿐이다. 

 

타인의 마음 상태를 추론하는 마음 이론 기능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집단적 업무 수행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포착하고 동시에 나 역시 그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은, 일종의 인간관계적 ‘보험’에 가까우며, 내가 처한 상황이 열악하지 않은 이상,  ‘마음 이론’ 보다 필요성이 적다. 


즉,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열악하거나, 내가 소유한 자원이 부족할 때, 우리 모두가 시시때때로 돌아가면서 괴롭거나 난처해질 때, ‘공감’은 중요한 협력 도구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풍족하고 여유로운 상황에 있을 때는 ‘공감’의 사용이 적어진다. 


혹자는 ‘기쁜 감정’에도  공감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과연 그런가. 나와 혈연 관계에 있는 가족들 외, 지인의 큰 성공과 행복에 함께 기뻐하며 공감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이미 나도 갖고 있는 소소한 행복에 대해서는 공감하기도 하지만, 내가 갖지 못한 거대한 이득을 타인이 얻게 되면, (특히 그 타인이 나와의 정서적 거리가 멀수록), 사람은 공감보다는 질투를 하게 되고, 서로 비교하며 불행해진다.  


‘‘마음 이론’이 결여된, 자폐장애를 포함한 여러 선천적인 뇌기능적 장애, 낮은 지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더 짧다. 콕 집어 주로 어떤 원인으로 인해 더 사망한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타인과의 교류나 협력 부족, 정보부족, 그로 인한 자기 관리 부족으로 인해, 다양한 사고나 의학적 문제로 인해 조기 사망하게 된다. (조현병 환자들 역시, 그 정신병적 병리와 무관하게 평균 수명이 20년 이상 짧다)


하지만 공감은, 가령 지능을 예로 들자면, 경계선 지능 이하에서도 낮지만, 영재 수준의 지능에서도 낮은 분포를 그린다. 공감이 순수한 인지기능이라면, 고위 지능인들에서도 사회성이 높아야하는데, 아시다시피 고도의 영재나 석학일수록 사회성이 부족하고, 타인을 배려하거나 공감하는 빈도는 낮아진다. 


이것은 ‘공감’이, 결국은 자기 이득을 위한 생물학적 기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역에서 앞서 가던 누군가가 갑자기 넘어졌을 때, 당장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보며 함께 놀라는 공감은 물론 인간적 가치가 풍부하다. 하지만, 그 순간, 고지능의 관찰자가 보기에, 넘어진 사람이 전혀 다친 곳이 없다면, 공감과 공감적인 도움은 불필요하다. ‘넘어진 사람이 전혀 다치지 않았으니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판정할 수도 있고, 혹은 ‘저렇게 심하게 다쳤거나 의식을 잃었다면 119에 신고하는 것 외에, 내가 흥분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감’은 ‘스트레스 원인’과 공존한다.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현실적인 위기에 서로 협력하기 위한, 인지기능의 상위 옵션인 것이다.  


맨 앞으로 돌아가면, 


‘공감과 마음 이론’이 부족한 내가, 

'회식 자리에서 휴지를 깔고 숟가락을 놓음, 상사의 외투를 빼앗음, 선배에게 커피나 녹차를 대접함' 등의 기술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입사 전까지는 내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모관계와 친구 관계에서는 끊임없이 타인의 마음 상태를 추적하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었다. 


하지만 스트레스 사회에 진입하면, 관습과 타인의 부정적 감정을 모니터링하지 않는 습성이 갈등을 발생시키기 시작한다. 몰랐던 관습이야 하나씩 배우면 되지만, 조직에 부여된 압박이 클수록, 사수는 불만을 신입 사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자신의 스트레스에 대한 공감이나, 기성 관습의 때이른 숙지를 도덕적 의무로 판단하려 한다. 흔히 ‘이 정도는 알아야지, 이 정도는 기본이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또 흔한, ‘요즘 어린 애들은…’ 이라는 비난을 하게 된다. 

 

주어지는 스트레스는 심하지만, 내적 권위가 결여되고 업무 효율이 낮은 조직일 수록, 허례허식이나 부조리한 의식이 많다. 낯선 청년들이 모인 스트레스 조직에는 항상 ‘군기’나 ‘규율’이 생겨나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맞춰보라는 농담이나 학대가 자연발생한다. 


이러한 ‘공감’이 스트레스 조직 내부에 강요될 때, 그 조직이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다. 이른바, 틀에 박힌 인재들만 살아 남거나, 독창성을 상실한다는 점인데, 한국은 OECD 1위 수준의 교육량,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석학이나 연구 성과, 혹은 걸출한 사업 성과가 없다. 업체들은, 독창성이나 아이디어 보다는, 구성원들이 임금을 적게 받고 많이 일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 자기 의견을 유지 혹은 표현하는 능력이 없으니, 독창성이 없고, 예상하지 못한 위기에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2010년 G20 정상회담 후, 오바마 미국 전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강제로) 주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도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절대 체면치레나 절제가 아니었으며, 한국인의 탁월한 공감 능력과 사회성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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