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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진 Feb 28. 2024

뉴로티피컬의 신화

사회성이라는 새로운 희생량을 선택한 광인의 기호

8장 - 사회성 컴플렉스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운 사건을 겪으면, 그것을 해소하려 한다. 하지만 그 사건을 피할 수 없고 억지로 계속 경험하게 되면, 점차 정신생물학적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스트레스(stress)’ 즉 ‘압력’을 받고 있다고 정의한다. 인간이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하며, 피로와 불면, 자율신경 각성과 여러 신체증상을 겪게 된다. 그리고 신체증상과 더불어, 심리적인 변화도 일어나는데, 불쾌했던 스트레스 요인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상관없는 다른 요인을 비난하게 된다.    

  

근대 산업화 이후, 자유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지만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도시 산업 사회의 피고용인들의 심한 스트레스는, ‘일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분노’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 통제와 분노는 ‘일하지 않는 것은 병(病)이며 악(惡)’ 이라는, 정신병 혹은 ‘광기’라는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회의 경제적 총생산량이 수요를 넘어서면,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구성원이 생겨나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구성원은, 어찌 보면 노동하지 않기로 결정할 자기 권리가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고 직장도 다니지 않고 있는데, 자신의 여생을 부모님의 연금이나, 미래에 물려 받은 부동산을 매매한 차액을 이용하여 살거나, 기초생활 보호 대상자로 지정되거나 하여 매월 130만원 정도만 쓰면서 만족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악행’이나 ‘부도덕’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도 그 사람에게는 나름의 합리적 결정일 수 있다.     


무직자에 대한 복지는 정치논리에 의해 쉽게 정책 비판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무직’에 대한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은, 각종 폭력이나 경범죄, 횡령이나 위조, 정치적 부패나, 비리에 비해 지나치게 나쁘다. 

     

이것은, 사람들이 집단적인 분노를,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투사하여, ‘광인’의 기호를 만들어내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양상은 때로는 ‘마녀 사냥’의 한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마녀 사냥’은, 소수자에 대한 대다수 군중의 공격이며, 당시에는 합리적인 분노이고 징벌이라고 여겨진다. 수백년이 지나고서야, 그것은 집단적인 히스테리이자 광기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내부의 저열함, 광기에 대한 편견을 수정하거나 깨닫기 어렵다. 


현재, 21세기의 한국 경제 사회는, 장기적인 양극화와 경직성, 그리고 생산성과 성장력 저하로 인해, 장기 구직자와 실직자를 증가시키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무직’과 ‘실직’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나 비난은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무직’에 투사되어온 광기와 수치심의 기호가, 새로운 대상을 찾아 옮겨가고 있으니, 바로 ‘사회성’이나 ‘공감’의 결여라는 기호이다.

      

만성적으로 열악해진 경제 구조와 조직 안에서, 구성원들은 서로의 인간성, 사회성, 공감 능력 따위를 비난하며 반목하고 있다. 


하지만, 타인의 마음과 감정 상태를 추론하는 능력은, 단지 뇌의 인지기능의 일부일 뿐이며,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속한 조직에게 스트레스가 과중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러한 기능, ‘공감과 마음 이론’의 기능 부족은, 갈등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사회성’은 집단을 이루어 살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그에 따른 여러 행동 패턴들의 집합체일 뿐이지, 도덕적 과업이 아니다. ‘사회적 관습’이라고 제시되는 모든 것들은, 결국 과거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불필요한 것들은 서서히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러한 관습과 무관한 환경에서 성장해왔기에 그런 사회적 관습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는 그러한 관습을 배울 기회와 시간을 보장 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이전 장에서, 타인의 마음 상태를 본능적으로 나의 마음으로 복사해오는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이, 사람마다 다양한 스펙트럼 상의 차이가 있는 인지기능일 뿐임을 설명했다. ‘공감’적인 행동은 도덕적 가치가 있지만, ‘비공감'이 부도덕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도덕은 권유되는 것이지,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높이 매달린 나뭇가지에서 과일을 딸 수 없다면, 낮은 덤불이나 밭에서 수확을 얻으면 된다. 암기력이 부족한 사람은, 메모해두는 습관을 가지면 된다. ’공감과 마음이론‘ 기능이 낮은 사람은, 그에 따른 자기 적성과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약점을 보상할 시간을 배정 받아야 한다. 


매몰된 사회성의 강요는, 단기적으로는 집단의 업무 효율성을 극도로 향상시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집단의 위기 대처와 적응 능력,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동물학적 해석은 의외로, 오랫 동안 대중적으로, 과학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도 여타 ’동물‘의 한가지 종일 뿐이라는 가설도, 결국은 하나의 연역적 가설일 뿐인데, 19세기부터 ’다윈주의‘와 ’과학주의‘라는 기조 아래, 무리한 억측과 유사과학적 이론들을 누적시켜 왔기 때문이다.

      

특히 동물 행동학적인 인간에 대한 이론들은,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거부감과 더불어, 남자의 공격성과 성성, 남녀차별을 합리화 시키는데 남용되었다. 가령 남성의 공격성이나 성욕으로 인한 행동 문제를 합리화하거나, 여성의 사회진출을 제약하는 기득권의 발언 속에 그런 화법들이 사용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지‘ 정도의 얘기를 하는 사람이 경제학적 소양을 가진 것은 아닌 것처럼(본인은 그렇다고 믿을지 몰라도), ’남자는 원래... 여자는 보통...‘ 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사람이 인류학적 소양을 가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의 동물적 습성들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 원래 그런 습성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합리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원시적인 동물성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간성'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양심, 이타성과 공감, 나아가 공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며, 미래의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한 습관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나 공감이 적은 사람은 적은 대로, 높은 사람은 높은 대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성이나 공감의 부족을 도덕적 문제로 치부하며 그들을 비난하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고도의 스트레스 조직을 분쇄시켜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의 ’공감과 마음 이론‘ 기능으로부터 도덕적 가치를 배제해야함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그 '기능 부족'이 부끄럽지 않아야, 필요에 따라 그 기능을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하지 않다면 성장시키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경직된 스트레스 조직으로 편입되어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 기능을 발달시켜야 한다. 혹은 내게 그 기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면, 그런 사실을 깨닫고, 보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자신의 ’공감과 마음 이론‘ 부족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죄의식을 갖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은 정규분포를 그리는 하나의 인지기능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성‘이나 ’대인관계‘에 대한 기술이나 가치는, 유독 심한 수치심과 자기 무능의 그림자를 달고 있다. 근육이 적으니 피트니스를 해야겠다거나, 살이 쪘으니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스펙이 부족하니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내적 수치심을 갖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자신의 부족한 면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성과 공감의 문제에서는, 자신의 사회성 부족이나 소심함, 답답함에 대한 자기 비난을 오랫동안 누적해왔으며, 이 주제에 접근할 때 매우 수치스럽거나 억울해하며, 혹은  익숙한 자기 비난의 태도로 도피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손등에 난 상처에 피가 나고 끔찍하거나 징그럽다고 해서 손을 돌려버리고 시선을 피해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결국 내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반창고를 붙이던 병원에 가서 꼬매든 할 것이다.  그와 같이, 막연하게 ‘나는 답답한 인간, 어리버리, 쏘셜 스킬 부족, 또라이, 찐따, 원래 그렇다, 역시 내가 문제’ 라는 식으로 단정 짓고 자책의 회로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게 부족하여, 지금까지 나와 주변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되었던 그것을 용감하게 직시하고, 그 윤곽을 그려가며 성장시키거나 보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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