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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 Aug 01. 2021

나와 닮은 아이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과 그 사건


  “좋은 일 하시네요. 왜 사회복지사가 되셨어요?”

  내 업을 밝히면 으레 듣는 이야기다. 좋은 일이라니, 그럼 안 좋은 일도 있나. 맘에 드는 수식어는 아니지만 짤막한 감사 인사는 잊지 않는 편이다. 뒤이은 질문에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사회복지를 하고 있다고 간단하게 답을 하곤 했었다. 면접장이었다면 난 여태 앞가림을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하던 동안에는 사회복지를 하겠노라 꿈꿨던 적이 없었다. 그저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내가 가장 손에 넣기 쉬웠던 것들을 골랐을 뿐이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점수를 받았고, 실습을 했던 복지관에서 이력서를 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인생의 첫 면접에서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힘을 배웠다고 이야기했다. 썩 괜찮은 사연 덕이었는지 한 번의 시험으로 졸업장을 받기 전에 직장인이 될 수 있었다.


  2년 차가 되고선 한 아이와 상담을 시작했다. 그때 중학생이던 남자아이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위로 남자 형제가 한 명 있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달랐던 건 어머니가 마음의 병이 깊어 집 밖으로 나오기 힘들어한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를 알게 된 지 몇 개월이 지나고 겨우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우리 아이가 참 착하다며, 자신이 엄마로서 챙겨주지 못하는 것들을 ‘선생님’이 해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했었다.


  2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어머니 대역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돈을 벌어먹기 위해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고등학교는 무사히 졸업하고 싶지만 등교가 힘들다던 아이는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에 잠에서 깨곤 했다. 나는 아이의 집 앞에 찾아가 손을 잡고 같이 교문까지 간 적도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라는 생각도 왕왕 들었다. 그래도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주는 의무감이 있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바빴다. 나는 그 아이 덕분에 우수 직원 표창을 두 번이나 받을 수 있었다.


  2년이 지나고 나의 부서가 바뀌었다. 아이에게 담당자가 바뀔 거란 이야기를 건넸다. “선생님, 정말 죄송하지만 마지막 기념으로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아이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계속 복지관에서 볼 텐데 무슨 마지막이냐며 한번 웃고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 아이는 내가 곧 사직서를 낼 것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듯하다.


  부서가 바뀌고선 새로운 일에 영 적응을 못했다. 포상을 받은 만큼 동료들보다 더 많은 일감이 주어진 것 같았다. 잘 해내리라는 믿음도 받았지만 기대만큼 잘 해내지 못했다. 역할이 주는 성취감으로 야금야금 커왔던 나는 그때 마음의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한 번은 나의 얼굴을 보며 이번 주에 몇 시간이나 잤냐고 상사가 물어왔다. 그 말에 시간을 세 보았는데 접은 손가락을 다시 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첫 직장을 관두게 되었다.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1년 동안은 오롯이 나를 돌보기 위해 애를 썼다. 감기가 다 나은 듯해 다시 앞길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공고를 찾고 이력서를 쓰려는데 마음 한편에 잔기침이 일었다. 더 쉬어야 할까 다른 일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져있는 나에게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나를 닮았던 그 아이가 편지를 보냈다. 스승의 날이라 ‘선생님’ 생각이 났다며 감사했다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라 말하고 싶었다고 적혀 있었다. 비록 선물 같은 건 못하지만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는 내용과 함께. 편지를 읽고선 울컥했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일들이 아이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했다.


  두 번째 직장의 면접에서는 나에게 왜 1년씩이나 쉬었는지, 그리고 다시 일을 하려는 동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 질문에 내 사연을 솔직하게 답했다. 바닥 친 나를 다시 세우는데 꼬박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첫 직장에서 나와 함께 자란, 나를 닮은 아이가 이제 나에게 다시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한다고. 앞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복지사로 살고 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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