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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Aug 26. 2023

유통기한 지난 마음

타락천사 + 중경삼림

별 이야기가 없더라도 분위기에 빠지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한 번에 앉아 두세 시간을 봐야 하다 보니, 시각적, 청각적 부분만이 아닌 서사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미적인 면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었거나 서사 구조를 아예 새롭게 바꾸거나 단순화시키는 데에 집중한 영화들은 수용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큰 사건이 없더라도 그 분위기에 관객이 기꺼이 뛰어들게 된다. 특히 표현하려는 소재가 느낌이 전부인 사랑과 기억일 때 빠져들기 쉽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영상미 위에 이야기를 살짝 올려놓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보다 장면의 아름다움에 치중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화양연화>(2000) 또한 인물의 직접적인 행동이나 대사보다 침묵 속의 시선을 담는 데에 집중했다. 이러한 방식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불륜이나 애증을 다룰 때는 벽이 될 수도 있지만, 그리움과 설렘을 다룰 때는 더 많은 관객이 각기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더해 영화를 즐기게 된다.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는 원래 한 편으로 기획된 이야기로, 홍콩이라는 같은 도시를 전혀 다른 색채로 그려낸다. 두 영화는 감독 특유의 영상미 속에 그리움과 설렘을 흥미롭게 담아내었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중경삼림> - 오늘의 통조림과 함께

이야기는 단절과 이별로부터 시작된다. 두 편의 영화는 각각 다시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는데, 두 주인공의 상황은 비슷하게 묶이는 면이 있다. <중경삼림>의 두 주인공은 경찰 233 허지무와 경찰 663이다. 둘은 예기치 못하게 이별을 당해서,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33은 매일 유통기한이 자기 생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구매하며 생일 전까지 옛 애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동시에 자신이랑 옷깃이라도 스쳤던 모든 여자에게 전화하며 그리움과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663은 그와 달리 집 밖에서는 점잖게 업무를 수행하며 괜찮은 체하지만, 홀로 집에 남았을 때는 수건이라던가 인형에 말을 걸며 버려진 비참한 처지를 물건에 이입시킨다. 그들에게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고, 이질적인 존재에 빠르게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타락천사> - 세기말 고독한 킬러

<타락천사>는 그보다 더 극단적으로 단절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킬러와 그의 동업자 에이전트, 허지무 셋 모두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인물이다. 남긴 모든 흔적이 지워지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거나, 모두가 불을 끄고 사라진 밤에 몰래 장사를 하는 등 사회로부터 감춰져 있다. 허지무의 경우 유통기한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은 뒤 말을 아예 못 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랑이 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이미 단절된 시작으로 더 빠르게 어려움이 부딪힌다. 킬러와 에이전트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허지무는 다른 남자에게 빠져있는 찰리를 사랑하게 된다.


<중경삼림> - 오래도록 멀리 날아갈 줄로만 알았던 비행기가 마음을 바꿔 항로를 이탈한 것이었다

영화는 이별의 슬픔이나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의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습거나 찌질하게 그리며, 그 가운데에 음악으로 분위기를 바꾼다. <중경삼림>은  California Dreamin'과 몽중인 두 노래가 인물의 처지와 달리 밝은 분위기를 투입다. <타락천사>의 경우 말수가 적은 인물들의 청각적 공백을 다양한 음악, 혹은 총성이나 허지무에게 당하고 있는 사람의 투덜거림으로 채운다. 결과적으로 두 영화 모두 일종의 뮤직비디오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고통의 순간에 오래 머물러있기보다 유통기한 지난 마음을 넘어 빨리 달려가려 한다.


<중경삼림> - 어디로 가고 싶어요?

그러나 그 달려가는 방향은 인물마다 다른 마음 표현 방식에 따라 다르다. <타락천사>는 그 시작부터 단절이고, 전반적으로 말이 막힌 상황이다. 업무의 특징상 타겟 할당 외에 다른 말이 없는 킬러들이나 신체적 어려움이 생긴 허지무나 발화가 제한되어 있어 마음이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다. 서로의 가장 진실한 마음의 전달도 약속에 나타나지 않거나 주크박스의 음악 번호를 알려주는 식으로 이뤄진다. <중경삼림>에서는 사소한 대화라도 시작된다. 233은 그리움 속에 온갖 언어로 낯선 여인에게 말을 건 일종의 외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하고, 여인은 비록 성적인 의미는 아니더라도 그가 쉬고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경찰 633에게는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와 사소한 도움을 요청하는 페이가 있다. 그녀는 단순히 말을 걸어오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 다가와, 그가 집에 없을 때 그 공간에 몰래 들어온다.


<중경삼림> - 몽중인 夢中人

사람이 없을 때 몰래 들어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페이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방과 마음 모두 이전 애인의 존재는 없고 흔적만 남아있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흔적을 하나둘씩 남기고 옛 그리움을 지워낸다. 공간의 공유는 결국 마음의 공유이고, 633은 서서히 그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 같은 공간을 공유하더라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자리에 남게 된다. <타락천사>의 킬러와 에이전트는 기본적으로 흔적을 남기면 안 되고, 특히 에이전트는 이를 지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 때문에 에이전트 자신도 킬러의 공간에 들어서더라도 흔적과 마음을 남기지 않고 자위행위로 전달되지 않는 마음만 남긴다. 결국 둘은 완전한 만남을 평생 정리하게 된다. 사실 둘의 업무 외적인 소통은 말할 수 없는 가게 직원인 허지무와 에이전트의 소통보다도 적었을지도 모른다. <중삼림>의 다른 이야기는 공간을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그 과정과 결과 모두 다르다. 둘은 하룻밤 동안 침대에 함께 머물지만 어떠한 신체 접촉도 이뤄지지 않는다. 여인의 발이 피곤할까 걱정되어 구두를 벗겨 닦아줄 뿐이다. 이는 233이 여인에게 주는 작은 휴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도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모습에는 미련만이 남았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중경삼림> -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그들은 변화된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받아들인다. <타락천사>의 킬러와 에이전트, 허지무와 찰리는 서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신 더 큰 마음을 품고 있던 사람들끼리 서로 연결된다. 서로의 얼굴을 인식한 것은 처음이지만, 허지무와 에이전트는 함께 터널을 지나가며 새로운 순간을 받아들인다. <중경삼림>의 경찰 633은 달라지는 주변 물건들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그리움이 실제로 사라져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새로움으로 들어온 페이와의 만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두 이야기는 모두 유통기한이 지난 마음의 끝은 영원한 포기가 아닌,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움을 지나 새로운 감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기한이 지난 마음과 기한이 다가오는 자신의 마음을 얹어, 새로운 설렘으로 향하는 길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는 사람이 허지무의 순수함과 페이의 열정, 633의 따뜻함을 가졌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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