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탄생 + 만추
관계가 깊어지면 그 사람에게 시간을 더 쏟게 된다. 역으로, 시간을 투자하게 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진다. 결과적으로 좋아하면 같이 있고, 같이 있다 보면 더 좋아하게 되는 선순환이 생긴다. 점차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며, 공유하는 기억을 쌓아가면서 더욱 깊은 관계가 형성된다.
김태용 감독은 모든 대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감독이다.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인물도 고독을 견디지 못해 부유하면서 그 안에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있는 인물이 되고, 돈에 몸과 마음을 내주는 인물도 쓸쓸함에 휩싸여 방황하는 여행객이 된다. 자연스럽게도, 그가 바라보는 관계와 관계 속 함께 있는 시간 또한 아름답게 묘사되어, 각자가 가졌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두 작품, <가족의 탄생>(2006)과 <만추>(2011)에서 함께한 시간이 남기는 마음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두 영화는 관계의 시작 이전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 시작 시점에 그 구성원들은 서로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영화가 마칠 때쯤이면 서로로부터 더 이상 멀어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가족의 탄생>에서의 관계는 당연하게도 가족 형태로 형성된다. 옴니버스 형태로 진행되는 서사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보여주는데, 대책 없는 동생이 데려온 나이 많은 시누이와 함께하게 된 미라,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자꾸 바람을 피우는 엄마로 인해 속앓이하는 선경, 그리고 여자친구 채현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 마음을 쓴다는 이유로 속상해하는 경석 세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만추>는 감옥에 있다가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3일간의 휴가를 얻은 애나와 그녀와 우연히 만나게 된 훈의 이야기이다. 버스에서 우연히 애나에게 말을 건 훈은 돈에 몸과 마음, 시간을 내어주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녀에게도 같은 서비스를 제시한다. 이를 수락하자 둘은 시애틀의 안개 낀 거리를 함께 걷고, 이질적인 공간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진실해진다. 그와 달리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애나와 업무 중 큰 사고를 친 훈에게 작별의 순간 또한 다가온다.
<만추>의 경우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가 3일로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다. 버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훈은 애나에게 빌려준 돈 대신 시계를 채워주며 곧 돈을 갚겠다고 한다. 그 순간은 가족과 옛사랑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한 애나가 조금이나마 숨을 틀 수 있는 시간의 시작이 된다. 낯설어진 시애틀의 시장에서도,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만 채워진 장례식장에서도, 옛사랑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새로운 인연을 자랑하던 순간에도, 훈은 애나 옆에 있으며 감옥에 7년간 갇혀 있으며 비어있던 애나의 시간을 채워준다. 애나가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훈은 그녀에게 다시 시계를 채워주며 함께 있었던 시간을 완성하고, 다시 함께 있을 시간을 약속하게 된다.
시계를 통해 직접 제시되는 것은 <가족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석은 채현이 너무 많은 남자에게 시간을 쏟는 것으로 속상해한다.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연인인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을 뺏긴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채현이 경석의 누나와 함께 먹기로 한 식사 약속을 다른 사람을 돕느라 어기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급기야 그녀에게 헤픈 여자라고 말해 상처를 주고, 그녀와 멀어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슬쩍 그녀의 옆으로 돌아와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임을 확인한다. 연인 관계의 결말이 모호해졌을 때 경석은 자신의 시계를 채현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멈춰있던 시계가 그녀를 만난 이후 움직였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보물이라고 고백하며, 그들의 시간을 다시 잇기로 한다.
반면 간접적으로 나타난 시간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가족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미라는 나이 든 시누이와 그녀의 전남편의 전처의 딸인 채현과 남게 된다. 어색함을 넘어 서로에 대한 경계하는 모습만 보이던 둘은 세 번째 이야기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채현의 두 어머니로서 관계가 변화하여 나타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아역 배우가 맡았던 배역을 세 번째 이야기에서 정유미 배우가 맡은 것과 두 어머니 사이에 건네는 자연스러운 농담들에서 세 사람의 그간 가까워진 관계가 나타나고, 딸과 함께 찾아온 경석까지 품으며 함께 가족을 이룬다.
관계의 완성으로 마무리되는 <가족의 탄생>과 달리, 이별이 예정되어 있던 <만추>는 지속되지 못한 시간을 다른 상징을 통해 나타낸다. 훈은 애나가 교도소로 돌아가는 버스 또한 함께한다. 그들이 거닐던 시애틀의 안개도 버스를 쫓아와서, 잠시 정차해 두 사람이 멈춰있을 수 있는 순간을 준다. 그러나 애나가 함께 마실 커피를 가져온 사이, 훈은 다른 혐의로 인해 또 다른 감옥으로 향하게 된다. 시간을 늘려주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커피를 가져오던 애나는 그를 데려가는 소리에 커피를 놓치고 만다. 오랜 시간이 흘러, 출소한 애나는 이별했던 장소에서 다시 커피를 마시며 재회를 그린다. 두 사람은 이전에 놀이공원에 갔을 때, 다른 커플의 다툼에 대사를 얹으며 대화의 방향을 자신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처럼 홀로 다음 순간의 대사를 그리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가상의 것일 뿐 현실이 되지 못한다.
두 영화 속 인물들 옆에 있으며 관계를 만드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따뜻한 시선 속에서 이야기가 그려지며, 나의 추억을 회상하거나 되새기는 느낌을 일으키기도 했다. 애나와 훈처럼, 경석과 채현처럼 함께 쌓아 올리는 시간 속에 관계가 연결되다가도, 떨어져 있는 시간 속에 그 관계를 마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전에 가졌던 시간과 언젠가 과거가 되었을 때의 다시 기다리는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