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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이유와 가지 못하는 이유

여행과 현실

by 윤슬기

'아니.'


반사적으로 대답이 떠올랐지만 잠시 말을 삼켰다. 큰딸과 단둘이 해외여행을 다녀오라는 아내의 쿨한 제안에도 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난 80개국 이상을 돌아다닌 세계여행자다. '여행 버튼'만 누르면 지금 당장이라도 반팔차림으로 남극까지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내가 이 좋은 제안을 망설이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 기억을 할까?

초등학교 1학년, 만 7세의 아이가 해외를 다녀온다고 나중에 기억이나 할까? 난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해외를 나갔는데도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 아이가 좋아할까?

막상 갔는데 정작 아이가 별로 관심을 안 보이면 어쩌지? 시시하거나 재미없다고 한다면? 그럼 난 또 그 마음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큰 비용을 들이는 만큼 아이가 충분히 만족감을 누릴까? 어쩌면 아이는 근처 놀이동산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3. 체력이 될까?

아이를 데리고 멀리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해외 육아'를 했다고 한다. 많은 걸 보여주려고 열심히 끌고 다녔는데 정작 아이는 지쳐서 내내 짜증만 냈다는 이야기가 머리를 스친다. 양쪽 모두의 체력이 필요하다.


4. 남겨둔 가족

내가 혼자서 아이를 볼 때, 가장 힘든 조합은 둘째와 셋째만 있는 경우다. 이미 대장자리를 차지한 2살 막내를 모셔야 하고, 5살 둘째는 자기 일을 야무지게 잘 하지만 요구사항이 많아 여전히 손이 많이 간다. 8살 첫째와는 거의 공동육아 수준이라 오히려 없으면 아쉬운 존재다. 그런데 둘째와 셋째만 남기고 첫째와 해외여행을 간다고?


'좀 더 모아서 나중에 가족여행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안 가려는 이유를 찾으면 끝도 없다. 무엇보다 내 머릿속엔 '셋째가 지금의 첫째만큼은 커야 여행을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이미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둔 그 틀이 반사적으로 이 여행을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몇 달 전, 아내가 분리수거장에서 작은 메모와 함께 끈으로 묶인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왔다.


"이게 뭔데?"

"누가 그냥 버리기 아까우니까 볼 사람 가져가라고 뒀나 봐."


어릴 적 읽었던 '먼나라 이웃나라'처럼 세계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이었다. 다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카카오프렌즈 친구들의 이야기로 각 나라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내가 먼저 책을 훑었다. 귀여운 캐릭터에 비해 솔직히 내용은 그리 흥미롭지 않아 도로 갖다 둘까 하다가 우선 아이의 반응을 보려고 그냥 뒀다. 그날 이후 빛이는 시도 때도 없이 이 책만 본다. 이 시리즈에 푹 빠져 벌써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큰일 날 뻔했다.


이 아인, 벌써 책으로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




궁금하다. 빛이가 여행에 관심은 있을지.


"빛이야, 너 요즘에 카카오프렌즈 책으로 세계여행 많이 했잖아? 혹시 가고 싶은 나라 있어?"


빛이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일본! 일본 갈래! 그 토끼인형 사러 갈 거야."


역시 아이는 아이다. 막내가 찢어버린 일본산 토끼인형을 사러 가겠다고 한다.


"빛이야, 사실 그건 우리나라에서도 살 수 있어. 아빠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거든. 자, 다시 물어볼게. 토끼인형을 집에서 구할 수 있다면 넌 어디를 가고 싶어?"


인터넷으로 토끼인형을 살 수 있다는 말에 빛이의 큰 눈이 더 커진다. 기쁨에 가득 찬 아이가 외친다.


"그럼 난 호주!"


'호주'라는 두 글자가 순간 나를 자극했다. AI처럼 2초 만에 대답이 완성된다.


"호주? 와아. 좋다! 빛이 1월에 방학하면 엄청 추운 겨울이잖아? 호주는 한여름이라 뜨거워서 반팔 입고 다녀야 돼. 거기는 크리스마스도 여름이라 산타할아버지도 반팔에 반바지 입고 오실걸? 같은 시기에 계절이 정반대인 곳에 가는 것도 진짜 좋은 경험이야."


대답하면서 느꼈다. 아이의 첫 해외경험이 일본은 아니었으면 했다는 걸. 좀 더 확연히 다른 환경과 분위기, 다른 인종과 문화로부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했다.


걱정이 사라진다. 끌려가는 여행이 아닌, 저렇게 책을 통해 스스로 관심을 보이는 여행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 게다가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항상 놀이터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아이에게 남는 건 체력뿐이다.


'가려는 이유'가 '안 가려던 수많은 이유'를 다 덮는다.




"거긴 왜 더운데?"


빛이가 묻는다. 난 조금 전 '호주'라는 단어를 입력한 순간부터 어떤 질문도 다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북반구에 있고, 호주는 남반구에 있어. 너 요즘 한자에 관심 많잖아. '구'라는 건 공이라는 뜻인데 지구가 공처럼 둥글지? 그리고 '반'은 절반이란 뜻이야. 그래서 '반구'는 공의 반쪽이나 지구의 반쪽이란 뜻이거든? 근데 우리는 북쪽에 있으니까 뭐겠어? 맞아. 북반구. 그럼 호주는?"


갑자기 불붙은 마음에 손짓발짓 해가며 나도 모르게 터보엔진을 달았으나, 빛이의 한마디가 날 다시 현실로 데려다준다.


"그러니까 호주는 남쪽에서 뀌는 방구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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