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 끊다
"어.. 미안한데.. 호주는 쪼꼼.. 힘들겠는데?"
내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기어들어간다. 빛이가 호주에 가고 싶단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난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호주의 좋은 점들을 장황하게 늘어놨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이에게 김 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다.
"아빠가 비행기 티켓을 찾아봤거든? 근데 이번 방학 때 호주에 가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티켓이 잘 없네?"
사실 티켓은 많은데 맘에 드는 가격의 티켓이 없는 거다. 1~2월이면 방학이라 안 그래도 성수기인데, 호주같이 여름을 맞이한 남반구 국가라면 얼마나 극성수기겠나.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 곳은 남들이 보에게도 역시 좋았다.
비수기에 왕복 50만원대면 끊을 수 있는 티켓가격은 두 배로 뛰어 있었고, 그마저도 경유로 30시간 만에 가는 비행 편이 그랬다. 만 7세 아이와 30시간 경유가 웬 말인가. 그래서 직항을 검색했더니 150이 넘는다. 비행기에 돈 다 쏟고 호주에서는 길바닥에서 자야 할 판이다.
'다시 일본으로 가자고 할까?'
항공권 사이트에서 '시드니'를 지우고, '도쿄'를 검색했다.
'도쿄 왕복 40만원?'
아무리 성수기라지만 겨우 2시간 반이면 가는 도쿄 티켓을 40만원 주고 끊는 것도 너무 억울하다. 방향을 돌려야 했다. 가는 날짜와 목적지를 다 열어두고 '어디든지 검색'을 눌렀다.
낮은 가격순으로 여행지가 나열된다. 대한민국이 가장 저렴한 거야 당연하고, 중국, 동남아 등 비교적 가까운 나라들부터 눈에 띈다. 아이와 가는 만큼 치안이 1순위라 몇몇 국가들은 제하고 남은 곳들을 지켜본다.
'몽골? 캐나다? 여긴 왜 이렇게 싼 거지?'
평소 내가 알고 있는 항공권 가격에 비해 현저히 저렴하다. 캐나다 왕복이 50만원대라니. 가격의 비밀이 머릿속에 떠오르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겨울에 영하 30~40도씩 내려가는 국가다. 그 시기에 여행자들이 굳이 그곳을 방문할 리 없다. 따뜻한 남반구의 호주 티켓이 비싼 이유와 딱 반대다.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시절, 겨울에 혼자 몽골여행 갔다가 얼어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
'캐나다는 또 얼마나 추울까?'
캐나다에서 제일 낮은 가격으로 티켓이 뜬 도시는, 태평양을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밴쿠버'였다. 그나마 가장 가까우면서 대도시라 그런가 보다. 뭔가 유명한 도시란 건 알지만,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NBA 농구팀의 연고지였던 곳이라는 정도가 밴쿠버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막연한 궁금증으로 GPT에게 물었다.
'1~2월 캐나다 밴쿠버 평균기온은 어느 정도야?'
'엥? 뭐지? 영하로도 안 떨어지네?'
GPT가 추워서 얼었나. 이게 맞는 정보인지 의아했다. 분명 위도상으로 우리나라보다 한참 위에 있는데 이상하다. 다시 물었다.
'위도상 한참 위에 있는데 겨울에 상대적으로 안 추운 이유가 뭐야?'
북태평양 난류와 해양성 기후, 로키산맥과 코스트산맥이 찬 대륙성 공기를 막아주는 등의 이유란다.
'뭐야. 그럼 안 갈 이유가 없잖아?'
갑자기 다시 신난다. 그새 또 만화책 세계여행에 푹 빠져 있는 빛이를 급히 불렀다.
"빛이야, 빛이야, 너 혹시 캐나다는 어때?"
"별론데? 나 그냥 일본에 토끼인형 사러 갈래."
희망에 가득 부푼 아빠의 풍선이 빛이의 '별론데' 바늘에 찔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빛이가 여행 중인 만화책 시리즈에 캐나다가 없다. 터진 마음을 부여잡고 혹시나 해서 빛이에게 다시 물었다.
"빛이야, 우리가 가는 캐나다 동네 바로 밑에 미국이 붙어 있거든? 캐나다로 들어가서 차 타고 미국에 다녀오는 건 어때?"
"그럼 좋아! 카카오프렌즈 책에 미국은 있잖아."
이렇게 쉽게 마음이 바뀌다니. 읽어보지 않은 곳에 관심이 없는 것과 반대로, 읽어본 곳은 밟고 싶은 땅이 된다. 참 단순하다.
처음 생각했던 일본이 호주가 되고, 호주가 캐나다와 미국으로 바뀌는 과정을 쭈욱 지켜본 아내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세상 쿨한 명언을 남긴다.
"일주일 가지고 되겠어? 이왕 멀리 가는 거 최대한 길게 잡아 봐."
모두가 진작 잠들어 있을 시간, 2층 침대 위에서 계속 뒤척이는 소리가 난다.
"빛이야, 안 자?"
아까 아이들을 눕힌 후 조용히 빠져나와 설거지를 하고, 내일 아침을 위한 예약취사까지 마쳤다. 다시 방에 들어와 누우려는데 어둠 속에서 빛이가 꿈틀대며 대답한다.
"잠이 안 와."
"그럼 잠깐 나올래? 아빠도 잠이 잘 안 오네?"
늦은 밤, 한 방에서 함께 자는 다섯 명의 식구 중 마음에 여행의 불이 떨어진 부녀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켰다.
"빛이야, 이게 비행기 티켓 끊는 사이트인데, 여기 보면 호주 가는 비행기는 빛이가 먹는 쭈쭈바 2000개 살 돈을 내야 간다는 뜻이야. 근데 캐나다 가는 건 숫자가 좀 작지?"
"그러네?"
'쭈쭈바 2000개'에 빛이가 입을 틀어막는다.
"우리가 가는 곳은 여기 밴쿠버라는 곳인데, 이 날 가면 쭈쭈바 700개, 이 날 가면 1000개를 주고 가야 해. 700개를 주고 갈 수 있는 날이 여기 두 개 있잖아? 이건 너가 선택해."
"난 이거. 그래야 더 오래 놀 수 있잖아."
빛이는 고민 없이 '오는 날'의 더 멀리 있는 날짜를 선택한다.
"자리는 창문을 보는 쪽이 좋겠지? 우린 가방 하나씩만 메고 갈 거니까 추가 짐은 따로 신청 안 해도 되고, 밥이 두 번 나오는데 우린 채식 안 하니까 전부 일반식으로.."
"아이고,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렇게 우린 한 단계, 한 단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됐다! 우리 이제 진짜 가는 거야!"
마지막 클릭을 마치는데 손이 떨린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와 난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딸과 둘만의 여행이라니.
"아빠, 캐나다에는 뭐가 있을까?"
"글쎄, 이제 슬슬 찾아봐야지."
방에 들어와 자리에 누운 빛이와 난 끊임없이 주절댔다. 항공권을 끊으면 맘 편히 잠들 줄 알았는데, 막상 끊고 나니 더 못 자겠다. 멈추지 않는 진동벨을 삼킨 느낌이다. 잠은 다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