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여권 만들기
'진짜 티켓을 끊어버렸네. 이제 뭐 하지?'
어젯밤 어둠 속에서 빛이와 뭔가에 홀린 듯 캐나다행 항공권을 예약하고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티켓을 끊을 때의 몰입과 떨림으로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일까. 이제 시작인데 다 끝난 느낌이다. 멍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모든 손을 떼고 마음의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빛이 방학하면 저하고 둘이 캐나다랑 미국 다녀오기로 했어요. 원래 계획했던 건 아닌데요.."
양가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양쪽 모두 기대 이상으로 신나셨다. 정작 나는 멍한 상태인데 우리 어머니와 장모님은 이미 캐나다 상공을 날고 계셨다. 감사한 일이다. 막상 통화를 하니 정신이 좀 난다.
학교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빛이를 붙들고 말했다.
"빛이야, 내일 일찍 끝나는 날이잖아? 아빠랑 여권 만들러 가자."
"여권?"
"어. 외국에 나가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소개할 수 있는 신분증이 필요하거든? 우리가 진짜 한국사람이 맞는지, 캐나다에 몰래 들어온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또.."
"알아. 저번에 하늘이가 만들어 왔잖아."
마침 얼마 전 둘째 하늘이가 유치원 활동으로 여권 만들기를 했다. 실제 여권과 동일한 사이즈에 얼핏 보면 속을 정도로 진짜와 똑같이 생겼다. 사진도 붙이고, 여기저기 도장도 수두룩하게 찍어 왔다. 요즘은 진짜 별 걸 다한다. 덕분에 아이들이 여권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생겼다.
"어, 맞아. 그거. 하늘이가 만들어 온 것처럼 너도 아빠랑 구청에 가서 여권 만들 거야."
"그냥 하늘이꺼 빌리면 안 돼? 어차피 하늘이한테 있잖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하아. 갑자기 캐나다로 가는 길이 굉장히 멀어진 기분이다. 가끔 어른처럼 말해서 착각하게 될 때가 많지만, 이 아인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다. 다시 정신줄을 잡는다.
"빛이야, 하늘이 여권엔 하늘이 사진이 있잖아? 근데 넌 너를 증명할 네 얼굴이 나온 여권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리고 하늘이껀 유치원에서 만든 장난감 여권인데, 넌 진짜 해외로 나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제 진짜 여권이 필요한 거야."
"응, 알겠어."
하늘이 여권을 빌린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입에 모터를 달고 열을 냈다. 말하는 동안 빛이가 중간중간 '그치', '그치'하며 추임새를 넣을 때 살짝 약이 올랐는데, 마지막 영혼 없는 '알겠어' 한마디에 뭔가 또 진 느낌이다.
"그럼 오늘 저녁엔 여권사진부터 찍자."
미성년자의 여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서류는 간단했다. '아이의 여권사진 한 장', '보호자의 신분증 한 장'이 전부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건 사진 가격이었다. 근처 사진관들을 검색해 보니 여권사진 기본 6장에 최소 3만원이다.
'이렇게 많이 올랐나?'
이런 얘기하면 옛날사람 같지만, 라떼는 여권사진 1만 3천원도 비싸다며 지하철역 '5분 완성'이라 적힌 무인사진기로 달려가 5천원에 해결했는데. 시대가 많이 바뀐 것 같다.
'아이의 생애 첫 여권인데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곳에서 예쁘게 잘 찍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얼른 증명사진 어플을 깔고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빛이야, 사진 찍게 여기 하얀 벽에 잘 서봐."
"이렇게?"
"아니. 삐딱하잖아. 앞에 보고. 똑바로. 웃지 말고."
"왜? 사진 찍을 땐 맨날 웃으라며."
"아.. 이게 그런 규정이 있어."
"규정이 뭔데."
"지켜야 될 규칙 같은 거야. 나라에서 정해준 대로 찍어야 돼. 귀도 잘 보이게 머리는 이렇게 넘기고. 자, 이제 그대로 가만있어 봐?!"
웃음을 참느라 씰룩대는 빛이의 입꼬리 붙잡으랴, 말대답에 응대하랴, 사진관 비용 3만원 버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집에 사진용지가 있어 바로 인쇄했다. 꽤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빛이는 입을 다문 무표정의 자신이 낯선가 보다.
"이상해. 나 아닌 것 같애."
다음 날, 빛이가 교문을 나선다.
"가자! 여권 만들러~"
내 목소리도, 빛이의 표정도 뭔가 들떴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덕에 열선이 깔린 따끈따끈한 벤치가 참 반갑다. 엉덩이가 데워지니 버스가 와도 일어나기 싫은 게 함정.
버스도 신이 났는지 단숨에 우리를 구청 앞까지 데려다줬다.
"보자.. 민원여권과.. 여깄다! 빛이야, 우린 여기로 갈 거야."
"1층이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며 민원여권과를 찾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발밑에 친절하게 안내 표시가 되어 있다. 내비게이션에서 '분홍색 차로로 주행하세요.' 말해주는 것처럼, '여권' 라인을 따라가 번호표를 뽑았다. 대기가 7명밖에 없다.
"빛이야, 이거 신청서니까 여기다 너 이름 써 봐."
'여권발급 신청서'와 '법정대리인 동의서'를 작성했다. 마지막 사인을 마치는 동시에 우리 차례가 와서 여권사진 한 장과 서류를 제출했다. 담당자분이 한 2초간 사진을 골똘히 보다가 내게 묻는다.
"혹시 사진 어디서 찍으셨어요?"
안 그래도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보다는 뭔가 선명하지 않은 느낌이 있어 약간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저런 질문을 받으니 가슴이 철렁하다.
"아.. 이거요? 어플로 찍었어요."
담당자분은 사진과 빛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사진에 있는 얼굴이 실제 피부색보다 조금 주황빛이 나서 통과가 될지 확실하진 않아요. 문제가 있으면 전화가 갈 건데 그럼 사진은 다시 찍어 오셔야 하고요. 오늘 중으로 연락 없으면 문제없는 겁니다."
약간의 찜찜함이 남긴 했지만 일은 순식간에 처리됐다.
"빛이야, 여기 다다음 주에 여권 찾으러 다시 올까?"
"좋아!"
* 미성년자 여권은 5년짜리만 신청이 가능하고, 수수료는 3만원이다. 우편으로 받으면 4~5일, 방문하면 8일이 걸리지만, 시간적 여유만 된다면 여권은 직접 가서 찾는 게 제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