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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지아 Aug 14. 2023

당당한 이혼녀가 가능할까

사라진 그늘


스무 살까지는 엄마의 통제 아래서 살다가

스물한 살부터전남편의 그늘 아래에서 살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공부하고 일하는 것뿐,  

세상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나는 그들을 통해 엄선된 세상 속에서만 살았던 것 같다.

단단한 그늘 아래서 세상의 어두운 면을 경험해 보지도, 겪어본 적도 없었다. 






이혼 초반,

나는 이혼녀가 된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고,

그 집에서 살아 나왔기에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전남편은 내가 높은 학벌과 수준이 있는 집안의 사람들과만 교류하길 원했기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동호회에 가입했다.

처음엔 당당하게, 내가 애가 있는 이혼녀라는 신분을 모든 사람에게 밝혔다.



모임에서 친해지게 된 언니가 생겼다.

그녀는 본인도 이혼을 했다고 하며 본인의 집에 초대해 딸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나의 이혼사유를 궁금해했고 내 전남편이 변호사라는 것과 내가 가진 외제차 등을 확인했다.

그 후, 강남의 본인의 사무실로 부르더니 땅을 사라고 했다. 정말 최고의 기회이며, 친한 나니까 정보를 알려준다고 했다.

당시 나는 간절하게 전남편보다 성공하고 싶었고,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얘기하는 부동산을 사서 돈을 많이 벌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 당시 내게는 돈이 없어서 아쉽게도 땅을 사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그건 고난도의 사기였다.

내가 변호사와 이혼했으니 위자료나 재산분할을 많이 받았을 거라 생각한 그녀가, 이혼녀의 성공하고 싶은 마음을 이용해 사기를 친 것이었다.

내 상식적으로는 아이들까지 보여주며 사기를 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러한 점이 나 같은 사람을 노리는 허점이었다.

전문직과 이혼한 많은 이혼녀들은 보통 이혼할 때 재산분할을 많이 받으니까.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혼녀들은 이혼 후 돈을 잘 벌고 성공하고 싶어 하니까.

그 뒤로도 한참 그 언니는 땅과 건물을 사라며 연락이 왔고, 나를 초대했던 강남의 사무실도 부동산 사기를 위한 단기렌트였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은 바보 같던 나를 결과적으로 더 어렵게 만들었다.

상장 주식이 뭔지도 몰랐었던 나는, 막연하게나마 비상장 주식이 더 좋다는 말과 함께 담당자를 소개받았다. 그 비상장주식이 뭔지도 모르고, 그가 본인이 강하게 추천한다는 말 한마디만 믿고 몇백의 돈을 그에게 다 보냈다가 다 날려먹었다.

담당자라는 사람 또한 사기꾼이었다.


돌이켜보면 전남편으로부터 재산분할을 아예 못 받았던 게 오히려 나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돈을 불려보려다 다 날려먹었을 테니까.



지인들을 만날 때도 당당히 이혼했음을 밝혔다.

그러자 갑자기 기존에 선배로 알고 지내던 유부남 오빠들, 회사 거래처의 나이 드신 남자분들의 연락이 밤 시간대에 따로 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대상으로 보이는지는 뻔했다.

변호사인 남편이 있었을 때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내가 남편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때 남편이 강경대응 해줬을 텐데. 씁쓸했다.

종종 지인과 지인의 남편까지 셋이 술자리를 하곤 했는데, 내가 이혼한 후부터 지인은 그런 술자리를 아예 없애버리고 나와 그녀의 남편이 인사하는 것도 경계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는 듯했지만, 나는 마치 잠재적 불륜녀로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그런 대상이 된 것이 불쾌하면서도 슬펐다. 

형부들을 탐낼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었는데.. 이혼녀는 외로울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였을까.



친하지 않던 동창들이 소식을 듣고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는 건 줄 알고 고마웠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부잣집에 시집간 내가 어떤 식으로 힘들게 살았고 어떻게 망가졌는지, 왜 아이를 빼앗겼는지, (빼앗겼다는 표현이 참 싫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그런 표현으로 자극적으로 정의한다)

궁금해하고 재밌어하며 가십거리로 여겼다.

내게 진짜 위로를 해주는 줄 알았었는데,

나는 너무 아프고 힘들었는데,

세상은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나를 봤다.

내가 이혼녀로서의 성격적 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를 대했다.

요즘 세상엔 이혼은 흠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본인들은 이혼한 상대와는 절대 안 만난다고 선을 그었다.

이혼한  앞에서.






나는 당당했었는데,

조금씩 주눅이 들어갔다.

나를 지켜줄 그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

이런 것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꾸만 낮아졌다.

점차 이혼녀인 것을 밝히지 않게 되었다.

나의 생각과 세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지켜주지 않는 세상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좋은 지인들과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혼 후 갑자기 달라진 사회적 시선과 대우는 친구들의 위로로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비수가 된 날카로움은 따스함보다 더 강렬했기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

그냥 바쁜 아이아빠와 살고 있는 유부녀인 척을 하거나 결혼도 하지 않은 싱글인 척을 했다.

이런 이혼녀의 모습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당당하게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혼녀이고 싶었는데,

움츠러들고 싶지 않았는데,

나를 지키려면 숨겨야 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명품들을 두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죽지 말라고 명품들을 사주었다.

갑옷이 하나 둘 늘어갔다.



나는 조금씩 말수가 사라지게 되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난 후 공황증상은 거의 사라졌는데, 대신 우울감이 찾아왔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두려워졌다.

왜 그동안 전남편이 나를 보호하고 학벌이든 집안이든 엄선된 사람만을 만나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너무 싫어했는데, 그가 없는 세상이 이렇게도 무서운 곳이었다는 것이 체감이 되었다.



잔인한 그를 피해 도망 나왔더니

세상은 더 잔인한 곳이었다.

애아빠는 가진 것을 안 주려고 했는데,

세상은 더 나아가 내가 가진 것을 빼앗는 곳이었다.

더 이상 순진하게 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전남편을 비난만 하고 싶었는데,

전남편을 이해하게 되는 현실의 씁쓸함이 나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동안 나는 세상을 흐리게 바라보고 해맑고 예쁘게만 살 수가 있었는데, 혼자된 후부터는 그런 순진함은 바보로 취급받고 이용당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

점점 움츠러들게 되었다. 되려 더욱 우울해졌다.

내 계획과 예상과는 다른 이혼녀의 모습으로.




돌이켜봐도 꽤나 힘든 시기였다.

안 그래도 이혼으로 몸과 마음이 바닥을 찍은 상황인데, 세상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드니까.


지금도 생각한다.

당당한 이혼녀라는 게 존재할까.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 속에서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런 차가운 세상을 다들  버티고 있을까.

익숙해지면 조금은 나아질까.



그렇기에 나는 이혼을 고려하는 지인들에게 항상 말한다.

웬만하면 이혼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특히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이혼은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죽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럴 때는 하라고 말한다.

그 정도로 힘든 게 아니면

이혼 후의 세상이 생각보다 많이 냉정하고 쉽지 않기에 그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할 테니까.


물론, 나는 내 인생의 선택에서 가장 잘한 것이 이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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