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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강원 Nov 27. 2023

[리뷰]언제까지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변화할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베를리오즈 '로미오와 줄리엣'

지난 11월 17일에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2023 시즌 마지막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오페라나 발레 공연을 함께 이어가는 악단의 특성상 콘서트 장르의 시즌을 빨리 마무리 짓는 편이다. 이 때문인지 다른 악단과는 다르게 시즌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해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번 시즌의 마지막 공연은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클래식 음악 장르로 구분한다면, 흔히 구노의 오페라나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을 먼저 떠올려보게 된다. 1988년 국내 초연 이후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작품인 만큼 한국 관객에겐 다소 낯선 음악이다.


베를리오즈 탄생 22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번 공연에서 다비트 라일란트의 지휘 아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어떻게 풀어내었을까?


베를리오즈 로미오와 줄리엣 =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곡의 첫 머리에 비올라로 시작되어 현악 5부로 발전되는 서주는 캐퓰렛과 몬태규 가문의 한바탕 소동을 표현해냈다. 이때 현악기로 표현된 갈등은 날카운 칼날보다는 빗자루나 무딘 연장에 더 가까우리만큼 투박한 음색이 이뤄졌다. 소동의 시작이 하인들의 싸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지만, 이후 양가 자제들의 칼싸움으로 발전해나간다는 관점에서 볼 땐 아쉬운 대목이었다. 금관악기로 표현된 영주가 등장해 이 한바탕의 소동을 진압하였으나,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현악기의 흐름 새는 이 두 가문에게 내재된 감정의 깊은 골이 얼마나 깊이 파여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프롤로그가 시작될 무렵,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만 있던 무대에 소수의 합창단원과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테너 문세훈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무대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은 이미 서주에서 오케스트라를 통해 한차례 표현하였던 두 가문의 대립을 합창단원을 통해 다시금 되짚는 형태를 취했다. 이때 남녀 성부의 앙상블이 미묘하게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음악의 완성도 관점에서 본다면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휘자의 의도가 가미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미묘한 앙상블이 의도된 것이라고 한다면, 두 가문의 대립관계와 연결지어 현시대의 젠더 갈등 문제를 꼬집는 해석이었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어서 메조소프라노 김정미가 메인이 되어 합창단원과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정미의 가사전달력은 훌륭했다. 작품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극의 해설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다만 10대의 풋풋하고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에는 꽤 농익은 음색과 표현력이 뒤따라 작품과는 결이 조금 맞지 않는 모양새다.


한편 테너 문세훈은 로미오의 친구 머큐시오가 되어 ‘꿈의 요정 마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노랫말에는 병사를 희생자로 삼아 꿈속에서 대포 소리와 칼싸움 등의 환영을 보게 한다. 일종의 악몽인 셈이다. 이를 노래한 테너 문세훈의 표현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요정의 이야기를 담아내었기 때문에 좀 더 익살스러운 표현력이 함께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듣는 청자의 관점에 따라 또 수시로 바뀔 수 있는 매력이 있지 않은가. 공연을 곱씹어 볼수록 악몽으로 인해 수면 마비(가위눌림)가 함께 이어진 것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던 노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이는 향후 오케스트라로 전개될 4악장 ‘꿈의 요정 마브, 스케르초’와 결이 같았다. 목관악기를 중심으로 그려지는 요정의 이야기는 익살스러움이 특별히 강조되지는 않았다. 꿈속에서 활동하는 요정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해 내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고, 절제된 연주가 이어졌다. 연주의 흐름을 특별히 발산해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테너 문세훈이 표현하였던 경직된 ‘머큐시오’와 같은 결을 유지하게 된 셈이다.


한편 그렇게 1부가 모두 끝나자 성악가와 합창단원이 퇴장하였다. 이어서 우울한 현악기의 배경 속에 오보에를 필두로 한 로미오가 등장하였다. 로잘린으로부터 실연의 슬픔에 젖어 있을 로미오의 모습이 애절하게 그려져야 하는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그 감정에 크게 동요되고 있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오보에로 표현된 로미오는 오히려 체념이 섞인 듯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어서 로잘린을 만나기 위해 무도회에 간 로미오의 모습을 그려냈다. 다비트 라일란트는 이 무도회의 풍광을 화려하게 채색해냈다. 대체로 리듬감이 두드러진 파티의 분위기를 그려내었는데, 그 어떤 누구라도 사랑의 불꽃이 팍팍 튀었을 현장 상황이 그려졌다. 이때 오보에의 연주는 그 표현력에 있어서 경직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로미오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됐다. 한차례 사랑이 실패하여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사랑이 싹트는 모습으로 말이다.


2악장이 끝나자 합창석에 합창단원이 입장했다. 캐퓰렛과 몬태규 가문의 대립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 단원들의 의상 색을 구분하였는데, 왼쪽에 위치한 여성 합창단원은 검은색으로, 오른쪽에 위치한 여성 합창단원의 의상은 흰색으로 표현해냈다. 한편 남성 합창단원은 어느 진영 할 것 없이 검은색의 턱시도 복장이었다. 단순히 두 가문의 대립을 표현하고자 하였다면 남녀 합창단원 모두 같은 콘셉트의 컬러코드를 사용했어야 하는 게 맞지만, 남성 합창단원은 검은색의 턱시도 복장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였던 당대 가부장적인 제도를 꼬집는 연출이었다.


음악은 무도회가 끝난 뒤의 풍광이 그려졌다. 합창단원을 통해 파티의 즐거움과 아쉬움을 담아내었는데, 이들의 노래는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모습이 아닌 멀쩡한 정신으로 귀가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듯 은은한 색채감을 가지며 명료하게 노래해냈다. 


합창단원의 노래가 끝나자 비올라와 첼로가 사랑을 담은 연주를 이어나갔다. 이는 로미오를 표현한 것으로 앞서 오보에로 표현한 소극적이고 체념 섞인 모습과는 달리 서정적인 사랑의 세레나데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플루트와 클라리넷 등 목관악기로 줄리엣이 등장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목관 단원들은 줄리엣을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이 아닌, 로미오에게 관심이 있나 싶을 정도로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곡이 진행되면서 첼로의 따스한 음성을 만나고 나서야 감정적으로 함께 동요되고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2023 국림심포니오케스트라 마지막 정기 연주회 = 이강원


4악장을 지나 5악장으로 향하자 줄리엣의 장례 행렬에 도달했다. 다비트 라일란트는 이 모습을 슬픔에 잠식된 상태의 분위기로 곡을 끌고 가지 않았다. 대체로 감정의 과잉이 없었고, 줄리엣의 ‘가짜 죽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그저 차가운 연주만이 지속될 뿐이었다.


6악장의 경우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있던 로미오의 감정 표현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여타 다른 악장의 경우 각 장면의 묘사를 소극적으로 그려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로미오의 슬픔과 극단적인 선택을 그려내는 과정에서는 오페라를 떠올려볼 만큼 감정의 표현을 꽤 세심하게 이끌어내고 있었다. 아리아가 곁들여지지도 않았는데, 꽤 훌륭한 오블리가토처럼 연주가 이뤄졌다.


7악장에선 캐플륫 가문과 몬태규 가문의 증오와 분노에 찬 합창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로렌스 신부(베이스 바리톤 에드윈 C. 머서)의 중재가 어우러져 화합의 노래로 마무리하였다. 증오에서 화합으로 가는 이 과정에는 지휘자의 곁에서 노래하는 로렌스 신부의 역할이 컸다. 머서가 풀어낸 노래는 깔끔하고 농익은 전달력을 갖춘 메조소프라노 김정미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주변으로 공명음을 울려내고 있었는데, 이는 서로를 부정하고 공격하던 두 가문에 마음 깊은 곳까지 도달할 만큼 깊은 울림을 갖춘 노래였다.


다비트 라일란트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풀어낸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10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렬하고, 화려하게 피워내는 형태는 아니었다. 대체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표현은 소극적이고, 꿈속을 헤매는 운명의 표현에는 오히려 경직된 순간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가사 전달력이 뛰어난 해설자, 메조 소프라노 김정미를 필두로 합창 단원이 두 집단의 대립을 분명하게 표현하였고, 죽음을 목격한 두 집단에게 공명음을 기반으로 한 베이스 바리톤 에드윈 머서의 노래로 진한 울림을 선사하여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던져내고 있었다.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변화가 이뤄지는 형태는 현시대에도 변함이 없음을 떠올려보면, 결국 시대를 관통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이 공연에 모두 함축되어 있던 셈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2023 시즌 마지막 공연은 그렇게 막이 내렸다.



※ 해당 포스팅은 얼룩소 선공개(https://alook.so/posts/RGtqerJ) 및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9regson/223276059196)와 함께 발행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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