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치메르만의 리사이틀은 조금 깐깐한 구석이 있다. 연주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휴대전화로 촬영을 하거나 녹음을 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설령 촬영을 하지 않았더라도 객석에서 휴대전화 불빛이 보이면 공연 중단을 언급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 완벽한 음악을 위해 관객마저 통제하려는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객석에서는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도리어 긴장감 때문에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연주가 좋으니까. 몇 가지 수고로움에 완벽한 연주로 답례를 해줄 수 있는 연주자니까‘ 그를 계속 찾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데 2023/2024 시즌 한국 투어에서는 ‘완벽함’에 균열이 가해졌다.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과 같은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쇼팽의 4개의 녹턴이 연주될 때 그러했다.
'녹턴 2번, 5번, 16번, 18번'을 연주하면서 각 곡을 악장처럼 취급하였고, 별도의 박수를 받지 않았다. 이때 치메르만은 감기 기운이 있는지 공연장에 들어설 때나 녹턴 2번이 끝나고 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음을 관객들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녹턴과 녹턴 사이 악보를 넘기는 그 짧은 시간에 객석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자, 치메르만은 ‘괜찮아요. 이해해요. 기침이 나오면 해야죠. 얼른 하세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순간 완벽함을 바라보며 마냥 얼어 있어야 할 것 같았던 객석 분위기가 깨어지면서 완벽함에 균열이 생겨났다.
마냥 깐깐하기만 했던 연주자가 저렇게 유해질 수 있나 싶기도 했지만, 음악을 바라보는 관에 있어서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줬다는 게 나는 너무 좋았다.
사실 연주력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도 완벽함은 깨어진 형태였다. 저조한 컨디션과 전성기가 지나버린 세월의 흔적이 함께 더해지자 미스터치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호 간에 넘어야 할 선만 넘지 않는다면 완벽한 음악이 만들어지는데 ‘집중’하기보다 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데’ 초점을 맞추도록 관이 바뀌었다는 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한편 음악을 감상하는 관점에서 보면, 1-2부 모두 연주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장송 행진곡을 기반으로 각기 다른 감상으로 접근하게 했다.
1부의 경우엔 앞서 언급하였듯이 쇼팽의 녹턴을 연주했고, 이어서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연주했다.
이때 마주하게 된 쇼팽은 관조적이고, 담담하게 곡을 풀어나간다는 인상이 컸다.
내가 비록 ‘Chopinesque’로 일컬어지는 그 무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의 연주는 결코 과장되지 않은 피아니즘이었다는 걸 명확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선율인 녹턴의 연주를 과장된 낭만의 숨결 속에 잠식 시키지 않았으며, 대체로 곡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연주를 해냈다. 이는 뒤이어 연주하는 피아노 소나타를 보았을 때 쇼팽 전체를 위한 일종의 빌드업과 같았다.
피아노 소나타 2번의 3악장은 장송 행진곡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의 풍광을 죽음의 풍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녹턴을 마냥 감미롭게 풀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나타를 연주하는 동안 미스터치가 두드러졌고, 프레이즈에 따라 곡에 생기를 오히려 죽여버리는 구간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3악장에서 연주되는 장송 행진곡과 아타카처럼 이어져 순식간에 사라지는 4악장까지 흡인력이 상당히 좋았다. 천근만근 무게감이나 칠흑 같은 어둠의 표현력이 아닌,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는 장송 행렬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3악장에는 장송과는 대조적인 애수 어린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때 치메르만은 죽음의 풍광을 잠깐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 냈다. 떠나간 이와 남겨진 이들을 위해 마음의 안식과 위안으로 표현한 형태로 말이다. 악장의 끝자락에는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안식과 위안,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장송 행렬로 표현되었다. 곡에서 풍겨내는 여러 풍광이 공기 중에 흩어져 나가듯이...
길이가 짧은 4악장의 경우 흙으로 돌아가버린 순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특이점은 볼드모트의 호크룩스처럼 영혼의 일부분은 삶을 향한 집착처럼 표현이 되기도 했다.
20분이라는 기나긴 인터미션 이후 2부가 시작됐고 드뷔시의 '판화'가 연주됐다.
이 곡은 동아시아의 오음음계와 스페인의 하바네라 리듬. 작곡가 자신의 상상력만으로 각기 다른 국가를 그려낸 곡이다.
치메르만의 터치는 굉장히 섬세했다. 1곡 ‘탑’의 경우 파고다 그 자체를 떠올려보진 못했지만 시냇물이 흐르는 사원이 그려졌고, 2곡 ‘그라나다의 황혼’은 주황색으로 물든 석양 아래 펼쳐지는 집시를 떠올려보게 됐다. 3곡 '비 내리는 정원'의 경우 폭우를 떠올려보기엔 응축된 에너지가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치메르만 특유의 섬세한 터치가 매우 돋보인 시간이었다. 곡 전반적으로 작곡가의 상상력을 선명하게 시각화한 연주가 이뤄졌다.
이어서 연주한 곡은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속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조명하고 싶은 곡이었을 텐데, 왜 ‘판화’ 뒤에 연주를 하게 되었을까?
치메르만은 우리에게 뭔가를 권유하고 있는듯했다.
마치 드뷔시가 그러했듯 상상력을 발휘해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조국을 그려보라고 말이다.
그의 권유에 나는 타트라 산맥 속에 얽혀진 구전을 보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이렇게 말이다.
슬픈 추억 한 송이.
산속에서 보게 되는 명과 암.
명(明)
물의 유희를 떠올려볼 만큼 반짝거리는 연주.
생명의 상징이 되는 물을 저렇게 부각시키다니.
암(暗)
왼손의 마법. 숲속에 짙게 드리우는 어둠.
초반부 어딘가부터 그렇게 죽음을 암시하더니, 결국 마주하게 된 장송 행렬.
영산처럼 여겨지는 타트라 산맥.
이 속에 담겨 있는 폴란드. 그의 조국.
시마노프스키를 연주하는 동안 드뷔시가 느껴질 만큼 인상주의적인 측면도 좋았고, 바흐가 생각날 정도로 쫓고 쫓기는 멜로디를 느껴보는 음악적 재미가 있어서 좋았다.
이번 공연에선 치메르만을 통해 시마노프스키의 또 다른 곡을 소개받았다는 점과 그만의 전달력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특히 드뷔시의 판화처럼 시마노프스키의 판화를 그려내는 기획은 결코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늘 완벽함만을 추구하여 숨이 턱턱 막혔던 부분에 관대해져서 숨 쉴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는 점에서, 또 두 번의 장송 행진곡이 연주되는 동안 음악의 접근 방법을 새로이 했다는 것도 정말 좋았다. 그래서 마지막 공연이었던 지난 10일에는 기립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공연장을 들어선 순간부터 나오는 순까까지. 전자기기에서 해방되어 온전히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충실히 해준 치메르만. 이제는 한국 방문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아티스트가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