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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ul 22. 2021

나의 가족

삼 남매 중 첫째로 살아간다는 건

나는 삼 남매 중 첫째이다. 올해로 벌써 30살이 되었고 동생들과는 터울이 꽤나 나는 편이라 둘째 여동생과는 5살 차이 그리고 막둥이 남동생과는 무려 11살 차이가 난다. 우리 가족에게는 지난해 큰 변화가 생겼는데 바로 나의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점이다. 나에게 있어 가족은 누구보다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이다.



삼 남매 중 첫째로 살아가기


어릴 적에는 내가 우리 집에서 첫째라는 점이 무척이나 싫고 못 견딜 때가 많았다. 오죽하면 엄마에게 '숨겨진 언니나 오빠가 있어도 좋으니 데리고 와줘' 라며 때를 쓸 정도였다. 아무래도 어릴 적에 부모님이 안겨준 첫째에게 흔히 주는 부담감 때문이 아녔을까 싶기도 하다. '네가 잘되야 동생들이 보고 배우지', '네가 언니니까 참아야지', '동생에게 양보해야지'와 같은 부담감과 억울함이 동시에 첫째의 무게감이 무겁게만 느껴졌던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집에서 첫째인 게 '나'라는 게 지금은 무척 위안이 되고는 한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삼 남매를 키운 부모님


우리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영업의 길만 걸어오신 분이다. 고려대학교 근처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호프집을 운영하셨는데 그곳에서 우리 엄마를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엄마는 대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는데 아르바이트로 아빠 가게에서 일하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다고 한다.


두 분의 나이 차이가 꽤나 나서 외할머니, 할아버지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한다. 아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를 같은 여자로만 바라보았을 때에는 엄마의 선택에 괜히 내가 속이 상할 때가 많다. 물론 두 사람의 결혼으로 우리 삼 남매가 존재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 부모님은 많은 고난과 역경, 시련을 다 겪고 3년 전에 엄마의 주최로 반찬가게를 시작하셨다. 엄마가 동네 한 골목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외할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물려받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삼 남매를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만들어준 엄마의 손맛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입맛이 생기는 건 참 근사한 거 같다.


이렇게 엄마의 가게가 자리잡기 전까지 사실 우리 가족은 매우 위태로운 순간들을 많이 보냈다. 자영업 하는 부모님 밑에서 큰 딸로 자라기엔 주말과 나의 시간을 오롯이 부모님 가게에서 보내야 할 시간들이 많았고 남들처럼 다 같이 외식을 하러 나가기 조차 어려울 때가 많았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제대로 된 외식을 했던 날이 막내가 태어나고서 17년이 지난 후 아빠의 가게 공사로 잠시 시간이 났을 때가 전부였다. 그때도 가게에서 자리 비우지 않겠다는 아빠를 간신히 설득하고서야 정말 17년 만에 가족들과 밖에서 외식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반찬가게를 하고 나서야 가족들에게 여유가 찾아왔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 전까지 우리 가족은 참 힘들었고 위태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이겨내려 노력했다. 그 모든 날들에는 각자의 희생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도 첫째로


어릴 적에는 마냥 싫었던 첫째의 자리지만 나에게 신이 선택권을 주겠다고 해도 첫째로 태어나고 싶다. 엄마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부모님께 큰 의지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게 나이가 들어서야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가고 있다. 때론 동생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경험치가 쌓여있고 언니, 누나를 찾는 동생들을 볼 때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도 공감했지만 나의 성격과 성향이 우리 집에 첫째로 있기 때문에 가족들끼리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가질 수 있었던 건 20살 4년 정도 홀로 외국에서 시간을 보냈던 경험 때문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20살은 정말 어린 나이이다. 학교 수업이 마치고 홀로 집으로 들어서 불을 켜고 들어오는 순간은 너무나도 쓸쓸했고 가족들의 생일, 크리스마스, 명절 등 특별한 시간들을 같이 보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를 일찍이 깨달았다.


결정적으로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더욱 커진 사건이 있었다. 외국에 있는 동안 엄마가 갑상선 암에 걸렸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는데 이미 내가 알았을 때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온 가족들이 힘들었던 순간에 내가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는 점과 쉬쉬하며 나에게 비밀로 했었다는 게 아직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가족이 아플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다는 거 정말 큰 아픔이다.


나에게 있어 가족은 큰 선물이자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다. 부모님이 원래는 외동으로 키우려고 했는데 먼 미래에 내가 쓸쓸할까 봐 급하게 다시 가족계획을 세워 둘째가 태어났다고 한다. 둘째는 부모님이 나에게 준 또 다른 선물이다. 막내는 흔히 말하는 2002 월드컵 베이비로 가족계획에는 없었지만 얼떨결에 찾아온 우리 가족의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느낌이다. 지금 우리 집에서 가장 사랑받고 제일 잘 자란 게 막내라 2002 월드컵 열기에 감사할 뿐이다. (사춘기 조차 없이 큰 기특한 자식이다.)


나에게 큰 선물을 준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며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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