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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어가기 Jul 23. 2021

살아있다는 느낌

죽음의 의미

사람이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죽음의 가능성을 옆에 둔 때가 아닌가 싶다.


하나의 의미는 반대되는 것과 대비될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공포감과 위협은 반대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삶이 중요하다면 그만큼 죽음도 소중해야 한다. 죽음의 위험성을 품 안에 같이 안고 가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도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그림자의 의미도, 모험을 하는 이유도, 자해를 하는 이유도 여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평화가 오래되었을 때 무기력해지는 것, 오히려 전쟁 속에서 삶의 걸작이 태어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만약 죽음의 가능성을 배제시켜버린다면, 그래서 인생이 너무 안전하고 예측대로만 흘러간다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위험이 없어져버린다면 삶이 오히려 죽어버릴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의미가 서로의 색깔을 분명히 한 채 공존하는 것과,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혼재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고통과 절망과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 무기력함의 상태, 무풍의 상태이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갖춘 그 상태가 정신적으로는 제일 위험하다. 치트키를 쓰면 재미가 없어서 게임을 꺼버리는 것과도 같다. 신과 같은 상태란 삶에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과도 같다. 의식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으로 갈수록 삶의 의미가 옅어져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래서 도달하고자 하면 되돌아오고, 도달하고자 하면 다시 되돌아오고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스스로 무풍 상태를 피하고자 함이 아닌지. 그래서 결국 고통과 괴로움을 나 스스로 삶 안으로 가져오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통합이 되어도 다시 분열되는 것은 여기에 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 삶의 고통과 성취의 굴레 속에서 영문을 모른 채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이 자아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 자아가 추구하는 이상향의 판타지를 고려해보았을 때, 이는 자아에게 있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 절대 별에 닿을 수 없음에도 별을 향해 계속해서 몸부림치는 그 처절함은 아름답고도 슬프다. 그리고 그 안에 바로 그 살아있다는 느낌이, 인생의 신비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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