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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쉬어가기 Jul 23. 2021

의식의 취약함

정신세계의 발달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점의 중심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 사고 체계에 들어올  있고, 그러므로 의식이 나의 정신세계의 전부라고 믿는다. 의식은 자라나면서 더욱더 분화되고 성장해나간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세분화된 생각들을 해낼  있고, 공동체로서 지식을 주고받으며 인간의 기술은 끝없이 발전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의 정신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의식의 탄생과 신경증


1600년대 철학자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이성에 대한 조명은, 중세시대 무의식에 잠겨있던 의식의 자율성의 영역을 깨어나게 하고 그 영역을 더욱 확장하는데 신호탄이 되었다. 그전에 인간 의식과 감정은 종교적 영역, 즉 무의식에 잠겨있었다. 내가 나 자신을 ‘나’로서 인식하고자 한다면, 의식의 발전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데카르트의 선언 이래 근대에 접어들면서 인간 의식은 발전해나갔다. 의식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은 정말로 짜릿했으리라. 신적인 세계가 아닌 인간 중심의 의식의 발달하면서 인간의 생각, 감정에 대한 탐구가 활발히 일어났고, 이는 르네상스의 다채로운 문화적 표현으로 꽃 피웠다. 의식의 자율성 획득은 인간에게 있어 축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던 문제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세계가 저물고 인간 중심의 사회가 발달하면서 의식은  크기를 더욱더 키워나갔다. 합리적 이성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근대 철학과 과학적 탐구론으로 이어져 나갔고, 기술과 학문의 발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의지로 주변 환경을 변화시킬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인간에게 있어 신을 대체한 전지전능한 의식은 정신세계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정신만능론이 대두되고  뒤에, 점차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등장했다. 세상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이 탄생하고 자율성을 가지고 팽창해나갔고 의식은 전부였는데, 삶은  생각대로 흘러가지가 않는다. 신경증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우울과 불안은 있지 않았느냐. 감정은 변연계의 산물이고 변연계는 인간으로의 진화 이전의 발달이므로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가 아닌 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적인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였고, 의식의 자율성은 없었으므로 ‘인간으로서의 문제가 아닌 어쩔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자유를 획득하면서 책임도 주어졌고 우울과 불안은 인간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신경증적인 부분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면 의식 내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현대 정신과학에서도, 근본적인 우울과 불안은 뇌신경적인 접근, 항우울제와 안정제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



무의식의 발견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던진 무의식의 개념은, 의식의 데카르트적 나르시시즘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인간 의식이 정신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니! 의식이 자율성을 획득한 지 근 300년 동안 이제는 인간 의식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진 근대 철학적 관점에서 이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래서 큰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무의식에 대한 이 관점이 신경증의 해결책이 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치료는 의식적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았던 히스테리를 치료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은 의식의 찌꺼기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많은 가설들을 던지고 싶다. 의식이 인간 정신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는가? 무의식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의식 100 것이고, 프로이트식 접근 방식으로는 의식 70, 무의식 30 것이다. 나는 의식이 차지하는 비율은 0.0001%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주 속에서 지구가 차지하는 비율처럼. 무의식을 탐구해나가면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지표면 일부만  세계의 전부였다가, 이후에는 지구였다가, 태양계였다가, 우리 은하였다가, 이제는 은하단을 넘어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우주는 객관적으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곳은 더욱더 작아져만 갔다. 그것과 같은 현상이다.



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의식의 발전은 전전두엽 발달과 관련이 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있는 고위 인지 기능은 진화학적으로 보았을  매우 최근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전전두엽의 발달은 출생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나이를 먹는 것에 따라 점점  발달한다.  말은, 전전두엽의 고위 기능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수십만  동안 확고히 확립되어 안정된 진화적 산물이 아니다. 자신의 자각(metacognition) 최근에,  조그마한 영역에서 탄생했다면 이에 대한 겸손함도 갖추어야  일이다. 정신세계를 뇌세포 사이의 전기신호의 결과물로 받아들일  있다면, 뇌의 발달은 진화적 관점에서 매우 오래되었고, 전전두엽은  오랜 진화의 시간 속에서 매우 최근의 일이다. 그러면 정신세계에서 의식이 가지는 비율은 작을 수밖에 없다.  안에 존재하는 층층이 쌓여 올려진 진화의 산물인 감정, 기분, 기억, 학습, 습관, 욕구, 판단 등은 생각에 비해 더욱더 오래되었고 안정되며  커다란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것들을 단지 의식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찌꺼기로 분류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비유하면 망원경의 위치가 의식 속에 있으므로 의식만이 주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생각이 전부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보다 생각은 더욱 취약하다. 감정과 기억과 습관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할  있고 생각으로  위의 기능들을  통제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이 이겨먹으려고 하지만 언제나 생각은 지게 되어있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갭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하고자 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이  정신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있는가? 받아들일  없는 데에서 모든 정신과적 영역의 (신경증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의식적 세계 속에서 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단계에서  발자국  나아가 보이지 않더라도, 생각하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존재할  있음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영역의 범위가 원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지금은 해결할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해결될  있을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분리되어 나와서 다시 무의식으로 돌아가는 ,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퇴행은 아니다. 무의식의 가능성을 의식으로 들여오는 , 의식이 보잘것없고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의식이 더욱더 확장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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