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공원 안에 위치한 한성백제 박물관의 특별 기획전, <바닷길에서 찾은 보물> 전시를 보고 왔다. 깊은 바다를 표현한 포스터 색감부터 마음을 빼앗긴 이 전시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오랜만에 좋은 전시를 보니 힐링받는 느낌과 뭔가 풍만해진 기분이 들었다. 유물도, 스토리도, 연출도, 사용한 색감도, 사소하게 신경 쓴 흔적도 다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무 생각 없이 탄 지하철이 급행이 아닌 일반열차였다. 내릴까 하다가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유혹에 그냥 눌러앉고 말았다. 도착 시간이 길어진 김에 전시도록을 읽기로 했다. 좀 전에 본 전시인데도 도록을 펼쳐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을 참기 어려웠다.
오늘 본 유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청자 철화 퇴화 점무늬 두꺼비모양 벼루'다. 처음 본 작품이었는데 귀여운 생김새와 상반되게 전시실 내 위풍당당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참고로 전시실 조명을 위에서 아래로 설치해 바닷속에 있는 것처럼 연출했고, 유물을 받치고 있는 판도(용어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ㅠ) 유물과 비슷한 색감으로 맞춰 둔 센스가 너무 좋다. 전시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심해로 가는 느낌을 주려고 점점 전시실 벽면 색감이 어두워지는데, 이 유물이 있는 공간은 가장 깊은 바다이기 때문에 가장 어둡다. 이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받고 있는 유물 다섯 점에 자연스럽게 집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힌 세련된 연출에 입을 떡 벌리고 감상한 전시였다.
'청자 철화 퇴화 점무늬 두꺼비모양 벼루'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아래 내용은 전시 도록에 실린 것을 옮겨왔음을 밝힌다.
태안선에서 발굴된 이 두꺼비모양 벼루는 무려 고려 12세기 작품이다. 2007년 태안 대섬에서 발견된 고려자기 운반선인 태안선에는 25,000여 점의 청자가 실려 있었다. 수중 유적이 고운 모래나 진흙 바닥에 파묻힐 경우, 무산소 상태로 유지되어 미생물이 살지 못해 오랫동안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지에서 발견된 유물보다 훨씬 깨끗한 상태로 보존된다. 이 벼루 역시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찌글거리는 입모양과 눈이 너무 귀여워 제발 굿즈를 팔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두꺼비의 울퉁불퉁한 피부를 표현하기 위해 흰색과 검은색 안료로 점을 찍었다. 이를 각각 철화와 퇴화 기법으로 부른다. '철화'는 산화철에 점토와 유약을 섞어 정제한 후 붓으로 그리는 것이며, 가마에서 구우면 짙은 갈색이나 검은색을 띤다. '퇴화'는 점성이 강한 백토나 자토를 이용하여 점을 찍거나 두꺼운 면 또는 선을 그리는 기법으로, 그린 부분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쌓인다는 의미의 '퇴堆'자를 쓴다.
전시를 보고 집에 돌아와 이사 후 염원하던(그러나 미뤄두기만 했던) 방 정리를 마무리짓기로 했다. 이번에 프레임 아래 수납공간이 많은 침대를 샀다. 배송해 주신 사장님이 매트리스까지 세팅해 주시고 간 후에 바로 이불과 패드를 깔았더니 그걸 다 치우고 수납장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아 3주 동안이나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안에 무얼 넣을지 정하지 못했다. 평소에 볼 일은 없지만 종종 꺼내보면 재밌고 애틋해 버리지 못한 일기장과 졸업앨범, 상장 같은 추억이 담긴 서적을 넣을까, 옷장 구석에 진공팩에 넣어 쌓아 두어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옷들을 담을까 결정하지 못했다.
옷장을 열어 몇 년 동안이나 묵혀둔 옷을 꺼냈다. 이번엔 버려야지 생각하다가도 추억이 많은 옷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만 하고 있다. 어릴때 좋아했던 드레스, 걸스카우트 단복, 교복, 애착 수준으로 자주 입었던 아꼈던 옷, 대장정때 입었던 단체복 등이다. 차곡차곡 쌓으니 꽤 깊고 넓은 서랍장 2개에 꽉 찼다.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공간을 내어주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쓰지 않지만,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물건을 다 버린다면 나는 훨씬 넓고 깨끗한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매 번 많이 비워낸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물건이 쌓이고,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테트리스 하듯 물건들을 꽉꽉 채워 넣은 뒤 다시 매트리스를 올리고, 이불을 올리고 청소로 고단해진 몸을 침대에 뉘이고 나니 그 추억과 시간 위에 누운 기분이 들었다. 아, 나도 퇴화(堆花)하고 있는 거구나. 지난 세월과 경험과 기억이 쌓여 고난도 만나고 따뜻한 볕도 만나면 나만의 색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몇 년은 나 홀로 점점 바닥으로 침전하는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혼자 남겨져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밀려가는 기분에 괴로웠다. 그런 우울감을 토로하는 내게 '그저 누군가 속도의 차이 아닐까요', 하고 말해주었다. 그런 말에 위로받기보다는 그런 말이 오히려 내 현재를 회피하고 적당히 만족하려는 말처럼 들려 싫었다.
그런데 오늘 어두운 전시실에서 빛을 발하던 두꺼비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퇴화(退化-진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 퇴행)가 아니라 퇴화(堆花-자기의 몸에 물감을 두껍게 올려서 무늬를 만드는 일. 또는 그 무늬)화하고 있는 거라고. 退化는 물러날 퇴에 될 화를 쓰고, 堆花는 쌓을 퇴에 꽃 화자를 쓴다. 나는 뒤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고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꽃을 만들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신이 창조된 목적과 쓰임을 달성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깊은 바닷속에서 잠자던 두꺼비처럼 나도 언젠가 물 밖으로 올라가 세상에 내 독특한 색을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를 위로해 보는 밤이다. 이 또한 그저 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또 어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