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가 없는 내가 ‘금쪽같은 내 새끼’를 즐겨보았다. 애청 포인트는 방송 초반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금쪽이의 행동이 오은영 박사의 해설을 통해 후반부로 갈수록 명쾌히 이해된다는 것,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금쪽이 태를 벗을 법도 하건만 여전히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고집부리며 비이성적으로 굴 때가 있다. 오은영 박사처럼 조곤조곤 상황을 해설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이해되면 이해된 채로 오해받으면 오해받은 채로, 대화로 풀기도, 친절했던 것으로 덮기도 하며 그럭저럭 산다. 그런데 최근 글쓰기가 오은영 박사의 해설을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근래 가장 황당한 나의 행동은 가타부타 설명 없는 퇴사 의지 표명이었다. 남편은 고집스럽고 갑작스러운 나의 퇴사 의지 표명에 당황했겠으나 사실 진짜 퇴사하고자 함이 아니라 퇴로를 확인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함이었음을 내 글을 보고 이해했다. 그런데 황당한 건 나조차 글을 쓰고 나서야 내 마음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글쓰기의 가장 큰 소득은 거친 흙을 털어내 고대 유물을 발굴하듯, 거친 행동에 가려진 숨은 마음을 발굴하는 데 있다. 말과 행동은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거치며 애초 의도한 것과 다르게 변형되어 표출되곤 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 대면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마음은 왜곡됨 없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렇게 발굴해 낸 마음은 가치관이 되어 삶을 설계하기 위한 지표가 되고 길을 잃었을 때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돕는 이정표가 된다. 원대한 삶의 포부 형성까지 가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무엇보다 나에게 나를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혼잡한 세상을 버티는 생존 무기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