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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Jul 03. 2022

내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네가 있다

1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광경

"안아줘” 요즘 내가 나의 고양이 양호씨에게 자주 하는 말. 이런 질척거리는 집사를 부디 해고하지 않길 바라며 나는 요즘 매일 같이 나의 양호씨를 품에 안고 잔다. 아니, 양호씨가 나를 안아준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부은 다리를 주무르고 침대에 누우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 내 품 속으로 파고드는 양호씨. 그 조그마한 얼굴에 어떻게 그렇게 긴 수염을 가질 수 있는지. 내 목덜미가, 겨드랑이가 간지러워 온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지금 양호씨의 하얗고 보드란 뱃살뭉치를 만져야 한다. 고양이의 방심, 애정표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반나절을 혼자 있었던 양호씨가 나를 이렇게 반겨주는 순간을 찰나다. 나는 하얀 솜뭉치를 움켜쥐고 그 찰나를 만끽한다. 처음엔 그르렁 그르렁 골골송까지 불러주는데, 어느 순간 뚝 끊긴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세상에는 단지 언어적 표현이 있고 비언어적 표현이 있다. 인간이 통상 언어라고 부르는 건 실은 지극히 협소한 범주다. 때로는 비언어적 표현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준다는 걸, 누구도 모를 수 없겠지. 양호씨는 “그만해라;;”고 내게 전한다. 특별히 고되었던 날에는 양호씨의 일침을 거역한다. 양호가 나를 더 품어줬으면 좋겠고, 그도 내게 칭얼거리고 어린냥을 피워줬으면 좋겠다. 양호씨 나를 더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내 기분을 양호가 같이 짊어져 준다는 느낌이라도 들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감정의 한 종류라고나 할까. 빠르게 관두어야 하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어림도 없다. 고양이는 좀처럼 나약하지 않고, 집사도 강하게 키운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양호씨는 내 얼굴에 강력한 펀치를 날리고, 나는 5초 동안 멀뚱히 상황을 파악한다. 그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 잠깐만 누워있다가 츄르주려고 했는데 안 줄거야. 방금까지 내 옆구리에 꼭 붙어서 골골송을 불러주던 그는 품에서 떠나고 없고, 무려 뺨씩이나 맞았다. 초등학교 때 자주 말썽을 피워 (돌이켜 생각해보니 잘못했던 나보다 더 못났던) 선생님에게 맞아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투정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피가 났는지 안 났는지 살펴야 한다. 알러지 약도 먹어야 한다. (나는 심한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데, 역시 이 세상에 사랑으로 극복 못할 건 없다. 다 핑계다.) 휴. 다행히 피는 안 났고, 알러지 반응으로 왕모기에 얼굴을 물린 꼴이 된 정도에 그쳤다. 네가 내 마음을 뭘 알겠어. 하지만 소용없다. 고양이는 이런 거대한 흉물 (나, 그러니까 인간)을 동정할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고 그 정도로 미련한 마음을 가지지도 않을, 완벽한 존재니까.


잠드려는 나를 이런 눈으로  쳐다보면 좀처럼 혼자 잠들기가 힘들다

                                                                                     **

양호씨가 길에서 지낸 시간은 2년 반. 그중 구내염으로 죽을 만큼 아팠던 시간은 6개월. 양호씨가 내게 와준 건 채 이제고작 1년을 조금 넘겼다. 그날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밤이면 쌀쌀했던 계절. 내 마음은 어떤 계절도 아니었다. 이름붙일 날씨도, 시간이라는 개념도 무색한 사막이었다. 너무 건조해서 언제든 작은 불씨가 산을 집어삼킬 불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고, 상승기류와 하강기류의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언제 장대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괴랄한 날씨. (적고 보니 요즘 한국의 날씨 같기도 하다) 그 이름 없는 날들 속에서 나는 너를 만났고, 너는 많이 춥고 아파했다. 무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하루의 끝에서 마주친 너의 눈동자는 하루가 다르게 가늘어져만 같다. 그와 중에도 야무지게 굽고 있던 너의 식빵도 나날이 작아졌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사료를 먹으려다 이내 뱉어 버리는 널 보았고, 끙끙대는 것도 지쳤다는 너의 힘없는 울음을 들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한없이 약해져 있던 나보다 어느새 네가 더 약해져있었다는 걸. 지금은 네가 나의 보호를 받을 때라는 걸. 내게 아직 그 정도의 힘은 남아있다는 걸. 매일 무언가를 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실은 내가 하고 있지 않다는 기분 속에서 나를 움직인 건 너였다. 네가 이대로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너는 힘없는 내가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그 무언가였다. 그렇게 너는 나를 움직였다.

  양호가 왜 그토록 아팠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길에서 상한 음식을 자주 먹고, 영양이 늘 부실한 길냥이들이 자주 걸리는 병이라해도 양호는 이제 고작 2년을 살았었다. 구조하던 과정에서 양호의 밥을 챙겨주던 캣맘을 만난 적이 있다. 밤이면 주민들 몰래 밥을 주곤 하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한 남자가 밥그릇에 용변을 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내뱉으며 “할 일 없는 여편네,”하고 갔다고 한다. 또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 후로 자주 고양이 밥이 못쓰게 되어 있었다고.   

  길냥이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사람들. 길냥이의 밥에 용변을 보고 락스를 뿌리는 사람들. 나는 죄 없이 아프고 추운 길냥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내어줄 뿐 동정하지 않는다. 동정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들이다. 당신들의 삶은 당신이 이유 없이 괴롭히고 혐오하는 저 존재들보다 더 메마르고 지저분할 것이다. 당신들은 아프고 외롭게 죽을 것이다.


양호씨의 낮잠

                                                                                    **

  아직 양호씨의 묘생에서는 아프고 춥고 배고팠던 날들이 훨씬 더 많다. 양호씨는 똑똑하니까 그런 것들을 아직 다 잊지 못했겠지. 그래서 양호는 내가 아직 이불이나 담요를 집어들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양호를 구조하고 치료하려 수없이 병원에 드나들었을 때에 내가 늘 담요로 양호를 덮쳐서 케이지에 우겨넣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울고 있었다. 양호는 울 수도 없었으니까 더 무서웠겠지.

  너무 아팠던 날들을 다 잊는 데에는 딱 그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아니 그것의 두 배, 어쩌면 곱절의 시간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는 싸워야 한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내 일부다. 양호씨는 똑똑한 만큼이나 현명하니까 그런 것쯤이야 나보다 잘 해낼 것이다. 내가 양호씨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더 맛있는 밥을 준비하고, 더 좋은 스크래쳐를 사주고, 질리거나 해롭지 않을 만큼의 츄르를 주고, 좋은 캣타워를 장만해주고, 아무리 피곤해도 사냥놀이는 해주고 잠에 드는 것. 너와 내가 힘들었던 날보다 행복했던 날들이 더 많아지는 날까지 지금처럼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세계는 이토록 복잡해진다. 네가 잠을 설치진 않았을지, 너무 오래 배가 고프진 않았을지, 무언가가, 또는 어떤 기억이 오늘의 너를 괴롭히지는 않았을지. 뭐 그런 걸 헤아리느라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는 뒤섞인다. 그래서 어떤 것이 너이고 어떤 게 나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내 맡에서 곤히 잠든 네가 편안해 보이면 나도 다시 편안히 잠들고, 다시 잠에 들었을 때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준 밥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걸 보면 잠시나마 내 배고픔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양호가 다시 아프게 된다면 나는 아주 많이 울고, 그러다 마음이 미어지고, 결국엔 나도 아픈 사람이 될 것이다. 나의 감각과 너의 감각은 이렇게 뒤섞여 있다.

  너는 한 존재의 삶 전체를 두루 지켜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너에게도 아침이란 게 있을까, 잠들어야만 하는 시간이 있을까. 아니, 너에겐 시간이라는 게 있을까. 뭐가 아침이고 뭐가 밤인지, 하루가 얼마나 흘렀고 얼마나 남았는지 따위가 중요한 한갓 인간인 나의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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