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부인함으로써 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나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의 열등함을 지적하는 방식은 얼마나 간편한가. 그간 인류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종류의 것들 –직립보행, 언어 또는 로고스(이성, logs) 등이 있을 것이다– 을 정립해온 방식이 정확히 그와 같았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 모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 존재론’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그간 인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꽤나 깊이 있는 고찰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울여진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것은 충격적일 만큼이나 허술하고 자가당착적이다. 그것은 배타적이고, 혐오적이며, 무엇보다도 맹목적인 종교 또는 망상에 가깝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정의 내려지기보다 ‘인간 아닌 것’이라는 ‘외부’를 상정하고 그것들의 존재론적 가치를 부인함으로써 발명되었으며, ‘인간 아닌 존재’들에 대한 부인과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통해 그 지위를 공고히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전하는 모든 철학이 그것의 뿌리로 삼고 있는 고대 그리스적 사고에 그 기원을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정치학』에서 ‘단순한 삶’과 ‘가치 있는 삶’을 엄격히 나눈다. ‘조에 zoe’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켰다. 반면 ‘비오스 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 즉 정치적인 삶을 가리켰다. 조에 zoe의 영역은 정치체로서 폴리스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생명 그 자체, 재생산과 일상생활 등의 영역을 ‘가정’ 또는 ‘단순한 삶’이라 규정하고 폴리스로부터 배제했다. 그리고 인간이 언어, 법, 제도 등을 통해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활동들만을 ‘정치적인 삶’으로서 폴리스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음성언어'를 통해 폴리스에 참여하는 백인-비장애인-성인 남성만이 ‘정치’의 영역인 폴리스에 속할 수 있었다. 비인간 동물은 물론이고, 여성, 어린이, 장애인, 노인, 노예 등은 재생산만을 수행하는 ‘가정’의 영역에, 단순하고 비정치적이며, 따라서 무가치한 삶의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인간은 생겨나기는 삶을 위해서 이지만 존재하기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라고 말함으로써 ‘단순한 삶’만을 영위한다고 생각되는 존재들, 즉 폴리스 바깥의 존재들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 지성이 ‘단순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조에, zoe : 생명, 살아있음’이라는 영역은 사실 전혀 단순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미 정치적이다. ‘정상-인간’ 그리고 그들의 뛰어난 ‘이성’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적인’ 행위는 확고한 개념이라기보다 하나의 범주고, 무엇보다도 협소하고 편협한 범주다. 그 범주 바깥 존재들의 존재 방식을 살펴보는 일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해온 오래된 분할 자체를 질문에 붙이고, 횡단하며, 해체시키는 방법론이 될 수 있다. 폴리스의 대문자 정치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폴리스 내부의 백인, 비장애인, 성인, 남성 시민계급에 속하지 않는 무수한 존재들이 그간 어떠한 방식으로 ‘생生(zoe)’을 유지해왔는가를 이야기할 때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