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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Feb 05. 2023

'dis-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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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 비인간을 구분 짓는 고대 그리스적 분할은 여전히 ‘인간’을 사유함에 있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무릇 '인간'이라면 '생生'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사고는 만연한데, "짐승 같은 x!"와 같은 인간에 대한 비방의 표현들은 늘 비인간 동물을 통해 표상되어 왔다. 또한 "장애인 같다" "병신" "벙어리" 등과 같은 장애에 대한 혐오표현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비정상 범주로 괴물화하고 타자화하는 논리 속에서 만연해왔다. '인간'이라는 기획은 이렇듯 늘 '정상'이라는 발명된 범주 바깥 존재들에 대한 혐오를 양분 삼아왔던 것이다.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에서 “200년 전에는 장애인이 없었다”고 말한다. ‘적자생존’하지 못해서 살 수 없었다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근대 이전이 ‘차이’로 ‘차별’하는 일이 없던 유토피아였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듣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등을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가두어 버리는 사고의 역사는 고작 해야 200년이 채 안 된다는 것이다. 시각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고 소통하는 농인의 세계와 청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음성언어로 소통하는 맹인의 세계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 둘이 같은 ‘장애인’으로 사유된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무엇을 ‘장애’라고 부르는가를 생각해 보면 인간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두 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 그 기이한 사고의 원천을 알 수 있다. ‘장애’는 영어로 disability다. 즉 ability,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무엇인가. 주체, 자립, 비의존,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이념으로부터 기원하는 ‘생산성’을 말하는 것이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 ‘노동’을 통해 국가 생산력과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없는 상태를 ‘장애’ ‘질병’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서구 지성이 ‘개인’ ‘이성’ ‘주체적’ ‘발전’ ‘민주주의’ 등을 운운했던 것은 ‘불구’의 신체를 지닌 존재들을 ‘장애인’으로 묶어버리고 ‘국민/시민(=인간)’, ‘정치’의 영역에서 추방함으로써 가능했다. 어떤 존재도 ‘홀로’는 살아갈 수 없음에도, 무언가에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체는 그 자체로 ‘장애’가 되었다.     

  이렇듯 ‘장애인’는 만들어졌다. 그들 신체는 본래 차이와 다양성으로 인식될 수 있었으나 ‘장애’라고 불림으로써 그들은 ‘장애인’이 되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것을 해내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능력이 없다’는 ‘disabled’라는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도 그들은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없다’. ‘노력’으로 ‘비장애인’ 못지않게 살 수 있다는 ‘극복 신화’와는 이제 그만 결별해야 한다. 여전히 서울의 대부분의 건물들, 상점, 음식점은 배리어프리하지 않다. 이는 수도권 밖으로 나아가면 더욱 심각하다. 물론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사용하는 것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은 매년 지하철리프트 사고로 죽는다. 그런데 바로 그 ‘할 수 없음’이라는 상태의 원인을 그들 신체로 귀착시키는 것이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수행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다. 철저히 비장애인중심으로 구축된 사회는 특정 신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이 ‘할 수 없는’이유는 그들 신체 때문이 아니다. 농인-청인의 구분 속에서 이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농인을 ‘말’할 수 없는 존재, 따라서 청인과 의사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떠올려보자. 어떤 외국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와 나는 의사소통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서로의 ‘장애’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가볍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농인들도 그들의 ‘언어’, 그들의 모어로 말한다. 농인과 소통하려면 청인들이 수어를 배우면 된다. 청인과 농인이 소통 불가한 것은, 농인이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그들 신체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장애’라는 만들어진 개념 속에서 ‘비장애인’들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살아가면서 ‘장애’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불리기를 거부당하는 어떤 어려움과 곤경들을 ‘비장애인‘들도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가. 그럴 때마다 우리는 누군가의, 무언가의 도움을 받는다. 모든 존재는 실은 어떤 순간도 ‘자립(自立)’하지 않고 ‘연립(聯立)’한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개인(individual)' 대신에 '분인(dividual)'이라는 상상력을 제안한 것과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호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며, 홀로 온전한 진공상태의 ‘나’라는 개념은 허구적인 ‘근대’적 산물이다. 따라서 ‘장애인’이 무언가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에 ‘결함’이 있는 신체로 생각된다는 사실을 의문에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만 ‘의존하지 말라’는 것은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이 철저히 결여된 발상이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낙인이 될 수 없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로 재사유 되어야 한다.


  우리는 중심축을 다른 데 가져다 놓아야하고, 따라서 당연했던 모든 것들을 상대화해야 한다. 타자를 ‘이해한다’라는 오만한 말 대신 관점을 자유자재로 이동시키고 어쩌면 그 ‘중심’이라는 것을 아예 해체시켜버릴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자와의 소통과 환대는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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