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안면도에서 휴식을 하고 하루라는 시간을 더 즐기자라는 마음으로 근거리에 있던 군산으로 여행을 했었다. 짧은 시간 속에 보았던 군산은 늘 아쉬움으로 남아 연차를 냈다는 딸내미와 여행을 계획했다. 그때 처음 와 본 군산은 나에게 정말 의외의 감동을 준 곳이었다. 일제침탈의 역사를 책으로 접한 곳이었는데 너무나도 밝고 따뜻한 모습에서 반전의 감동을 맛보았다. 따사로운 정감의 깊이가 남다른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2박 3일의 여정 동안 충분히 군산이라는 도시를 거닐며 음미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딸 진은 워낙 많이 여행을 해서인지 지금도 여행을 자주 하고 매우 즐기는 편이다. 친구와도, 가족과도 여행은 늘 환영하는 젊은이다. 숙소를 잡고 숙소 주변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마침 은파호수공원이 가까이 있었다. 군산여행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추천해 주는 곳으로 지난 여행에서는 보지 못했다. 때마침 벚꽃 축제와 겹쳐 호수 주변은 야시장의 흥성거림으로 꽉 채워졌고, 벚꽃 꽃망울은 가지마다 빼곡히 채워져 두 팔 벌리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수 산책로마다 늘어진 벚꽃꽃망울이 환영의 손짓을 하고 호수는 불빛으로 반짝였다. ""와.''하는 탄성과 함께 발걸음도 가볍게 호수 주위를 산책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진과 나는 카메라를 눌렀다. 시간과 장소를 저장한다는 마음으로. 눈에 들어온 많은 것들은 감동이었다. 나무도, 꽃도, 하늘도, 하늘에 뜬 때 이른 반달도, 흙길로 된 오솔길도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은파호수공원을 군산이라는 도시가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과거에는 농업용 저수지였는데 국민관광지로 인기 있는 곳이 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하룻밤을 자고 군산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는 해망로로 이동 중에 지인께 추천받은 음식점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주거용 주택에 정원까지 있는 곳에 음식점을 열어 식당 느낌이 아주 특별하고 내집 같은 편안함과 정겨움을 주었다. 대표 음식인 갈치조림도 그 속에 들어있는 양념맛이 일품인 무까지 먹으니 여행의 기쁨이배가 되었다. 점심 식사 후 그 거리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1층은 인사동에서 볼 수 있는 옷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으로 된 철제 계단은 가팔라서 위험하게 보였으나 막상 올라가니 신세계가 펼쳐진 것처럼 햇살 밝아 통유리로 보이는 군산 거리가 정겹게 다가왔다. 통나무 탁자에 앉아 투명한 유리를 마주하고 커피의 진한 맛을 음미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의미 없는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군산은 주변 일대가 모두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근대화의 자취가 묻어 있는 도시이다. 그 모습을 간직한 채로 백 년을 군산답게 유지시키고 발전해 온 곳이기에 특별한 느낌을 품고 있다. 정겨움과 기품을 함께 품어내며 일제저항의 정신을 기억하게 한다. 일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세금수탈과 착취의 현장이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일본인이 살았던 그대로의 신흥동의 일본식 가옥, 일본인이 지은 동국사라는 절, 세관, 은행 등은 역사의 살아있는 증거물로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군산의 거리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음미해 보았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역사의식이 피어나는 공간, 군산이다.
월명산은 군산에서 벚꽃으로 유명한 산이라고 들었는데 동국사에 가기 전 높은 언덕 위에 벚꽃이 흰구름처럼 피어 있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서 보니 벚꽃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그 앞에는 선홍색의 동백꽃들이 열병식을 하듯 줄 서서 수북하게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붉은 정열 앞에서 그 속에 빠져나오기 싫을 만큼 아름다움이 서 있었다.
일본인이 지은 최초의 절인 동국사는 이제 한국인의 절이 되었고, 소녀상까지 조각되어 일본인이 저지른 만행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까? 돌아서 나오려는데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홍매화를 만나니 동백꽃보다 더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을 약속해 본다. 어느 해 이맘때쯤 꼭 한 번 더 오리라.
군산에서의 여행은 밝고, 따뜻함만을 기억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건물들의 역사에서 느껴지는 많은 아픔들은 무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간직되었다는 것이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느꼈다. 이번 여행은 딸내미와 함께 해서 더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군산의 역사가 품고 있는 시간보다는 모래 같은 작은 크기만큼의 시간이 진에게도, 나에게도 쌓이게 된 역사가 느껴졌다. 가족의 여행에서 아주 작은 모습의 아기 때 모습이 내 머릿속에 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나와 동반하는 여행을 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감동적인 현실이다. 진이는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여기저기를 진지하게 살펴보면서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여행을 채워가는 멋짐이 엿보여 딸내미의 성숙함에 어느새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군산에서 딸과 같이 한 여행은 여러모로 시간 여행이었다. 간직해 주고 있는 군산도 의미가 크고 바람직한 어른의 모습으로 커준 딸내미도 뿌듯한 아주 풍성한 여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