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에 굴려 드릴까요?”
세상에, 설탕을 뿌리는 것도 아니라 굴려주겠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점원이 핫도그를 설탕 함지에 넣어 도르르 굴려 내놓는다. 허니머스타드, 치즈머스타드, 체다치즈소스, 파마산 치즈가루.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는 소스를 무시하고 토마토케첩만 한 줄 뿌려 입안에 넣는다. 입안을 꽉 채울 만큼 핫도그를 베어 물고 천천히 씹으면 따끈하고, 바삭하고 포근하고 달달한 맛이 침샘을 자극한다. 케첩이 혀에 스며든 순간의 새콤달콤함과 와사삭 아사삭 씹히는 맛있는 장단까지. 이 모든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지면 핫도그를 하나만 먹고는 견딜 수가 없다. 설탕에 굴린 핫도그와 그 위에 뿌린 빨간 케첩 한 줄은 하얀 눈밭에 장미 꽃잎처럼 강렬한 색채 대비, 추억의 소환을 보장한다.
‘설탕’이란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설탕과잉의 시대가 생각난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 펼쳐졌다고 한 소설의 멋진 장면처럼 기억의 긴 터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설탕 과잉의 시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잠을 자다가도 무의식중에 눈이 내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걸 일기예보 없이도 알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차갑고 상쾌한 기운이 코끝을 가볍게 스치면 따뜻한 이불을 벗어나 창문을 열었다. 하얀 세상, 거리가 눈으로 가득했다. 맨발로 살금살금 걸어 밖으로 나가면 보슬보슬하고 차가운 눈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눈 속에 파묻힌 우유를 손에 쥐고 집안으로 들어오면 손가락 발가락이 간질간질하고 얼굴이 후끈거려 웃음이 나왔다.
하얀 눈이 내린 날이면 우유를 기다렸다. 병에 담겨 배달된 서울우유의 종이 뚜껑을 잡아당기면 살얼음이 된 하얀 우유 덩어리가 눈처럼 솔솔 컵에 담겼다. 엄마는 그 위에 설탕을 아낌없이 뿌려주었고, 우리는 달콤한 눈을 한 컵 가득 마셨다고 재잘대며 시끄럽게 웃어댔다.
온대지 위를 조용히 덮는 흰 눈처럼 한때 엄마의 모든 요리에는 설탕이 솔솔 뿌려졌다. 지역에 따라 적설량이 다른 것처럼 요리에 따라 설탕 양도 달랐다. 딸기잼에는 컵으로 듬뿍듬뿍, 갓 튀긴 누룽지 위에는 진눈깨비처럼 솔솔, 토마토나 감자 위에는 함박눈처럼 펑펑. 가끔 집에서 만들어 먹는 달고나는 이름처럼 달콤해서 모든 걱정을 한방에 사르르 녹여주는 만병통치약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사 남매를 위해 엄마는 누룽지를 노릇노릇 바삭하게 튀겨서 설탕을 뿌려주었다. 입안에서 침과 섞여 고소해지는 누룽지의 풍미는 겨울 밤 허기를 달래주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씹을 때마다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아다닥, 아다닥 소리는 우리를 소소한 즐거움에도 반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알감자를 입안에 통째로 넣었다가 너무 뜨거워서 뱉어내면 달달한 설탕이 입안에 여운처럼 남았다. 밥그릇 안에 뜨거운 감자를 넣고 숟가락으로 꾹 눌러 감자를 부드럽게 으깨고 나면 엄마는 그 위에 설탕을 뿌렸다. 설탕을 뿌린 간식은 엄마의 손길 위에서 더욱 달콤해졌고, 가족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섞여 행복의 주술처럼 내 기억 속에 녹아내렸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할 수 없을 때, 나의 존재가 미세먼지보다도 작게 느껴져 숨어버리고 싶을 때, 나는 설탕 과잉의 시대로 돌아간다. 가족들과의 따뜻했던 추억들을 모아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천천히 음미하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고달픈 하루가 나를 흔들 때, 토마토를 얇게 자른 후 그 위에 설탕을 뿌려 먹는다. 설탕이 녹아내린 토마토 국물을 한 수저 맛보고 나면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미각 세포를 하나하나 자극해 나를 행복한 시간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설탕이 비싸서 못 먹던 시절, 그 시간을 견뎌온 부모 세대가 설탕 과잉의 추억을 자식들에게 남겨주었다. 몸에 좋지는 않지만 추억을 소환해 오는 달달함. 우울이 가득해져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시간이 다가오면 설탕 봉투를 찾는다.
가끔은 설탕 과잉의 시대로 돌아가 걱정 과잉의 시대를 훌훌 털어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