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와 단토의 다른 해석
사상사를 공부하다가 가장 흥미로운 때는 문화, 사상사적 배경이 다름에도 엇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상가들을 만났을 때, 혹은 찾았을 때이다. 물론 그 생각이라는 게 똑같을 수는 없다. 동일한 사람이 오늘 말한 것과 10년 전 아니 당장 어제 말한 것도 다를 수가 있는 데, 어찌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때로는 사고방식이 비슷할 때도 있고, 사고의 내용이 비슷할 때도 있는 법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유를 관통하는 건 사고의 내용, 방식이 아니라 그 근원에 있는 직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스피노자가 지금 살고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철학을 전개했을 터지만 그래도 16세기를 살았던 스피노자와 현재를 사는 상상의 스피노자를 관통하는 직관이라는 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철학 공부를 하다보면 엇비슷한 생각을 하는 철학자들을 발견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철학을 똑같은 방식으로 전개하는 철학자들도 없지만, 그렇다고 차이만 전개하는 철학자들도 없다. 차이는 기존의 틀에서만 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상가들 사이의 유사함은 언제나 놀라움의 대상이다. 관심의 대상이 다를 때, 분야가 다를 때는 더욱 더 그렇다. 최근에 프로이드와 단토를 읽으면서 발견한 유사함이 그 중 하나이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자 이전에 의사였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은 치료 행위, 즉 실습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이는게 적당한 이유이다. 그렇다고 프로이드 이론이 단순히 치료 행위를 위한 도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실용주의적 관점, 즉 치료 행위에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이론의 진위를 결정한다는 이야기이며, 그래도 이론은 정합성을 가져야 한다. 프로이드는 치료과정에서 '거리두기'를 강조한다. 어려운 이야기같지만 단순하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신경증의 원인이 과거에 있음을 알고, 그 과거를 '인식', '의식'하면 신경증은 치료된다'는 이야기이다. 무언가를 '의식'한다는 것은, 현상학의 표현대로 하면 무언가를 '주제화'한다는 의미이다. 곧,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상황을 다시 한 번 의식하는 행위이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의식'의 의미는 '지금 내가 이러이러한 신경증을 앓고 있는 이유는 어렸을 적 어떠어떠했던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식'한다고 할 때의 의미이다. 이걸 '거리두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나의 '기억', '무의식'과 거리를 두고 이를 주제화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뒷받침하는 프로이드의 이론은 바로 모든 경험이 무의식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이 이론이 참/거짓을 밝힌다는 건, 이 이론이 실질적으로 치료에서 유효했느냐를 가지고 이론의 진위를 밝힌다는 걸 의미한다.
프로이드의 사춘기 이론(이건 내가 붙힌 이름이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이는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 부모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부모가 말한 건 당연히 지켜야 할 법이며 도덕이다. 하지만 2차 성징과 더불어 아이는 부모의 세계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즉, '과연 국가가 위임한 권위자인 부모, 특히 아버지가 말하는 것들이 옳은 것인가?'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아이에게 세계는 그냥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면, 이제 아이는 세계와 거리두기를 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던 세계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로써 세계는 '주제화'되며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만일 어떤 모종의 이유, 특히 부모의 과보호로 인해 아이가 세계와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다면 ? 그래서 사춘기가 단순히 신체적인 변화에 그친다면 ? 정신적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신경증이 발생한다는 게 프로이드의 이론이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흔히들 여자는 아빠 닮은 사람을 만난다고들 한다. 그런데 매번 만나는 남자가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라면 ? 그래서 바람피거나 때리거나 하는 그런 남자라면 ? 왜 이 여자는 매번 후회하면서 그런 남자만 골라서 만나는 걸까? 프로이드에 따르면 이 여자는 아마 사춘기 시절, 부모의 세계로 이루어진 자신의 세계와 거리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세계를 주제화하며 의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경우 최고의 치유방법은 아버지라는 인물의 특성을 의식으로 끌어와 그 세계와 거리를 두게 하는 것, 그리고 매번 반복되는 실수의 근원에는 '아버지'라는 자와 충분히 거리를 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 즉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오게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난 언젠가부터 징그러운 동물이나 잔인한 영화의 장면을 보면 스스로 '이건 꿈에 안 나올거야'라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그러면 끔찍한 꿈을 꾸지 않곤 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첫사랑, 짝사랑이 사팔뜨기였다고 했고 그 후부터는 사팔뜨기 여자만 보면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팔뜨기'여자만 보면 왜 설렘의 감정을 느끼게 됐는지 이유를 과거(첫사랑)에서 찾게 되고, '의식'하는 순간 더 이상 사팔뜨기 여자를 사랑하지 않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런 프로이드의 사춘기 이론을 발전시킨다면 인간은 여러번의 사춘기를 겪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첫 사춘기가 문자 그대로의 사춘기라면, 그 후의 사춘기는 계속해서 자신의 삶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기로 비유적인 의미의 사춘기이다. 그래서 매번, 사춘기의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에 계속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을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인문학'과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춘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
요컨대 아이는 있는 그대로 순진무구하게 살다가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장을 하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게 된다. 물론 이 세계관은 계속해서 다시 그 정당성이 의심되는 세계관이며, 질문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리고 세계관이 발전됨에 따라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인간 자신도 끊임없이 발전해나간다.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라는 건 이렇게도 가능할 수 있다. 미술사와 프로이드의 개인 발달사의 과정이 유사할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프로이드가 묘사한 사춘기 이전 아이의 행동은 모방이다. 어른이 하는 행위의 모방을 통해 어른의 세계관이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어릴 적 하던 소꿉놀이를 생각해보면 명확하다. 요즘은 그러지 않겠지만, 예전의 가부장적 세계관은 소꿉놀이를 통해, 즉 아이들의 어른 행동 묘사를 통해 아이들에게 옮겨졌다. 그렇게 모방을 통해 부모의 세계에 살게된다.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부모의 세계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모방은 이제 중단된다.
미술사가 한스 벨팅, 그리고 벨팅을 참조한 철학자 아서 단토는 미술사의 첫 단계를 '모방'으로 규정한다. 특히 단토는 미술사를 세 단계로 규정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모방'의 역사이다. 단토에 의하면 르네상스를 넘어 인상파즈음까지의 '모방'의 단계가 첫 단계이며, 이 단계는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흔들리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 미국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서 정점을 찍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예술'의 단계이다. '사진'의 발명과 함께 더 이상 회화, 조각에 의한 '모방'의 기술이 의미가 없어지는 시기에 미술은 자기 스스로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게 되며,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미디움'(매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며, 이 고민이 바로 근대미술사를 관통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미술이 '모방', 즉, 주어진 정체성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반복하면서 발전시켜온 과거의 미술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근대 미술이 시작했다. 그린버그를 참조한 단토에 따르면, 예술이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고 사고하면서, 각 분야는 자신만의 미디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회화는 평면을 탐구하고 발전시키면서 회화만의 역사를 전개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소위 말하는 1962년 팝아트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는 예술의 죽음 이후의 단계이다. 단토에 따르면 팝아트의 등장과 함께 미술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메시지 혹은 이론을 전달할 뿐이다. 헤겔에게서 따온 '예술의 죽음'은 더 이상 '예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미술' 혹은 '예술'은 그 동안 자신을 이끌어 오던 지향점, '모방' 혹은 '정체성'과 같은 역사적으로 완성시켜야 할 목표를 스스로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예술은 메시지(이론)가 구현되어 나타나는 걸로 정의할 수 있다. 일종의 다원주의적 시각이다.
사실, 양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60년대부터 나타나는 미술의 흐름은 순수하게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쪽보다는, 기존의 '미술'이라는 틀에 계속해서 반기를 던지는 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잭슨 폴락에게서 모더니즘의 절정을 봤겠지만, 폴락 역시 평면성에 운동을 담으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그린버그가 중요시하는 미디움에 충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60년대 등장한 많은 예술적 시도들은 예술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이브 클랭은 미술이 가지는 물질성 자체를 파괴하려 했고, 알란 카프로는 '예술'이 전시 공간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파괴하려 한 동시에 일상의 행위 자체를 '예술'로 규정하려 했으며, 백남준은 '티비'를 전시 공간 안으로 들여오며, '바보 상자' 티비를 비판하는 동시에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를 만들어 기존의 '미술'개념을 넓혔다. 이런 과거의 기준을 파괴함으로써 '미술'의 범위를 확장하려 했던 시도는 굉장히 다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파괴하는 행위'(의도)이다. 이는 기존의 예술관에 대한 반항이며, 예술관을 '문제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가 묘사한 이상적인 개인이 계속해서 자신과 세계에 문제를 삼으면서 스스로 발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이라면, 미술사는 정확히 프로이드가 말하는 스스로 이상적 인간관을 만들기 위한 여정과 일치한다. 물론 '미술'이라는 건 한 '개인'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첫 번째 사춘기는 근대 미술의 시작과 일치하며, 그 이후의 비유적인 의미의 사춘기는 6-70년대를 넘어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고전, 근대적 미술관의 파괴 과정과도 일치한다.
사실 단토가 '아트 월드'라는 말로 정의하려 했던 '미술' 혹은 '예술'은 60년대의 미술보다는 지금의 현대 미술(동시대 미술이라고도 불리는)과 더 가깝다. 감각적인 재료와 그에 상응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 예술로 정의한다면 말이다. 동시대 미술 작업중에는 더 이상은 예전의 미술을 규정했던 틀을 부수는 것이 목표가 아닌 작업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비엔날레에서 자주 소개되는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작업들이다. 물론 미술 자체에서 감각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실, 예술을 '메시지'만 가지고 정의한다면 예술은 여타 학문과 달라지는 게 없다. '감각'은 예술을 예술로서, 미술을 미술로서 남게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이다. 그렇기에 단토는 마지막 저서 '미의 남용'(Abuse of beauty)에서 미적인 것, 그러니까 감각적인 것으로서의 아름다움도 때로는 어떤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개념 미술의 원조라 불리는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가 그 유명한 'One and three chairs'(하나의 그리고 세개의 의자)라는 작품을 선보였을 때, 과연 코수스는 시각적인 것 (의자의 형태, 의자 뒤에 쓰인 문구의 글씨체, 의자 사진-실제 의자-문구가 적인 종이의 배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 감각적인 건 어디에나 있으며 심지어는 아름다움, 재현을 거절한 개념미술에도 있었다.
여러번의 비유적인 사춘기를 넘어선, 그래서 계속해서 고전적인 미술 규범을 부수어왔던 미술은 이제 자신만의 길을 간다. 사춘기가 기존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을 내포했듯, 현대 미술이 무언갈 부수면서 반항의 길을 갔다면, 지금 현대 미술은 부정, 긍정을 넘어서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단토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름다움'을 거절했던 현대 미술이 이제는 '아름다움'조차도 표현방식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필요에 따라 감각적 '아름다움'을 이용한다. 프로이드의 이상적 인간관이 오롯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는 것처럼 지금 미술 세계에 속하는 아티스트들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전개한다. 한 곳만을 보고 진전했던 미술사는 이제 끝났지만 이제는 각 아티스트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전개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이 모든 담론은 불교 사상과 닮았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비우려는 의지'조차 비우려는 의지이다. 산이 아니었던 산이, 물이 아니었던 물이 다시 산이되고 물이되기 위해서는 부정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인간됨,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에 반대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걸 원해서 하는 상태... 이게 바로 프로이드의 인간관이자 단토의 현대 미술관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본질을 찾게 되는 과정 아닐까 ? 그래서 본질이란 언제나 길을 잃은 다음, 누군가와 싸운 다음 스스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낭만주의 시대의 이상적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작품안에 표현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술가의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가 작품을 통해 드러나면 그게 바로 진정한 예술가였다. 하지만... 이젠 현대 미술에서도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 부정하고 부정하고 부정한 다음에 도달한 긍정의 상태,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이 뜻하는 행위를 작업으로 표현하는 상태야 말로 자유로운 행위이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