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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승우 Aug 20. 2024

[미술 담론]현대 미술과 스타일

현대 미술 감상법 제안

프랑스에서  루브르, 오르세이를 비롯한 많은 미술관을 다니다 소위 말하는 '현대 미술' 전시장에 처음 갔을 때 처음으로 느껴보지 못한 당혹감을 느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어떻다는 둥, 제프 쿤스의 작품이 어떻다는 둥 책이나 신문에서만 보고, 말만 들었었지 실제로 현대 미술 작업 전시장에 처음 갔을 때는 이런 '어쩌고 저쩌고'를 넘어서는 당혹감, 분노감이 컸다. 그래서 그 후로 한 동안 '현대 미술'을 증오했다. '증오'를 더욱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 그래서 현대 미술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현대 미술 중 몇몇 거장을 공부해보았다. 거창하진 않았다. 현대 미술 도서관에 가서 몇몇 아티스트들에 관한 책을 찾아본 게 전부이다. 찾아보면 찾아볼 수록 신기한 게 눈에 띄었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티스트의 최근 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티스트의 첫 작업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미술'에서 '스타일'이란 말은 보통 작업을 하는 특유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스타일은 집단적인 스타일과 개인적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회화'에서는 스타일을 화풍이라 번역할 수 있으며 집단적 화풍이라면 '인상파'와 같은 학파의 화풍을 의미한다. 반면 개인적 화풍이라면 '마네'의 화풍, '모네'의 화풍 등을 의미할 수 있다. 집단적 스타일은 한 작가가 속한 문화적, 지리적, 사상적 특히 예술적 맥락을 보여준다. 작가도 일반 사람처럼 한 세계에 속한 이상 그 세계의 문화적 배경을 벗어나긴 힘들기 때문이다. 누가 말했듯이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건 예측 불가능한 디오니소스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세계이다. 단적으로 데이비드 호크니는 "모네가 지금 시대 살고 있다면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은 자신이 속한, 체득한 당시 화풍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창조한 사람이다.

그림을 배우는 사람이 '대가'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는 집단적 화풍이 요구하는 손기술을 완수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어로는 이를 'métier'라고 하는데, '직업', '수공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개인적 스타일을 가지기 위해선 집단적 화풍의 테크닉을 마스터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내가 인상파처럼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단 인상파의 기술을 마스터해야한다. '대가'를 넘어서기 위해선 '대가'의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고리따분한 이야기이다. 

훈련되지 않은 눈에는 집단적 화풍과 개인적 화풍을 구별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회화를 계속해서 접하고 눈이 훈련될 수록 그 사람은 회화에서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고도로 훈련된 사람은 동일한 화풍에 속한 두 화가의 비슷해 보이는 그림에서 차이를 찾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반 고흐처럼 혹은 최근에 한국에서 전시한 베르나르 뷔페처럼 누가봐도 스타일이 명확한 아티스트도 있다. (반 고흐는 당시에 인정받지 못했으며 베르나르 뷔페는 비교적 최근의 화가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하물며 뷔페도 당시 미술계에서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조르주 세라(Georges Seurat)와 폴 시낙(Paul Signac)의 그림처럼 초심자에게는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아티스트들도 있다.


근대 미술까지 계속돼왔던 고전적 미술관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 미술에 대해 가지는 반감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즉, 현대 미술은 스타일이 없다는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스타일은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 혹은 감각적인 것 그리고 아티스트가 오랜 시간의 훈련을 거쳐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현대 미술은 스타일이 없어도 되는 것, 그래서 아주 젊은 나이에 쉽게 스타가 될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미술'이라는 이름의 기만에 불과하다. 예전에 미학(예술 철학) 전공 교수와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현대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했다. 그는 "현대 미술을 따로 정의하거나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 여기 풀 하나만 뽑아서 전시해도 현대 미술인걸요."라고 답했다. 그의 냉소적인 대답에 사람들이 갖는 현대미술에 대한 반감이 요약되어 있다. 현대 미술에서는 '스타일'이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말주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

확실히 현대 미술에서 말하는 '스타일'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미적인 것'(감각)이 드러내는 스타일만 찾기 시작하면 현대 미술은 언제나 실망으로만 다가온다. 1960년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가 누보 레알리슴(Nouveau Réalisme : 새로운 현실주의)이라는 용어, 학파를 만들면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실생활의 물건들을 작업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텔레비젼, 유리창, 네온 싸인 등, 아티스트들이 전시장 안으로 들여오지 못할 물건들은 점차 없어졌다. 여러가지 예술적 의도가 있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예술 작품'과 '일상 사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상 사물을 전시장으로 들어오려는 '의도'를 이해해야지만 그들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구분을 둘러싼 철학적 토론이 활발해진 건 우연이 아니다. 많은 미국 분석 철학자들은 미적인 것, 즉 소위 말하는 아름다운 것과 예술적인 것은 다른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예술은 아름다운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적 경험(아름다움의 경험)은 이제 예술적 경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스타일이 감각, 특히 시각으로 확인되었다면 이제 스타일은 더 이상 감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두 다 사용하는 기존의 제품으로 작업을 하면서 고전적 의미의 스타일을 내기는 쉽지 않다. 아니 감각적인 의미에서 스타일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젠 감각 뒤에 있는 무엇, 특히 아티스트의 의도가 작업의 감각적인 면과 합쳐져 스타일을 만든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더 이상 감각적 아름다움이 예술성을 담보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면, 개념, 의도, 작업 방식이 예술성을 담보한다면 스타일도 그에 맞춰 감각을 초월한 무언가를 포섭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개념, 의도는 작업 하나만 본다고 관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훈련된 사람이야 한 눈에 모든 걸 파악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 아티스트의 작업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이 했던 작업을 모두 봐야 하고 때로는 그가 하는 말도 들어봐야 한다. 

예전에 어떤 갤러리스트에게 어떤 기준으로 아티스트를 뽑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모든 작업을 봐요.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보죠. 때로는 그 사람이 한 말때문에 그 사람이 한 작업이 더 안 좋아보이기도 하구요. 때로는 그 때문에 더 좋아보이기도 하죠."라고 그는 대답했다. 현대 미술 작업을 판단할 때 중요한 건 작업도 아니고, 작업을 한 작가가 한 말도 아니고 (아티스트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다 믿어선 안된다), 작업이나 작가를 둘러싼 평론도 아니라, 이 모든 걸 다 버무렸을 때 그려지는 아티스트만의 스타일이다. 그 스타일이라는 것은 때로는 아티스트의 사고방식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일관된 메시지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만의 사회적 앙가쥐망일수도 있으며, 때로는 여전히 그만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특질일 수도 있다. 결국 스타일이라는 것은 한 아티스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일관성인 셈이며, 일관성이란 건 결국 작업 전체를 일별해야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대 미술에서 스타일이란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아티스트의 작업 전체를 둘러봐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즉,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엇을 축으로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그래서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는 지 파악을 해야지만 그 작가의 스타일이 보인다.


스타일을 찾아낸 후에야만 가치 판단이 가능하며, 더 나아가 취향(taste)에 따른 미적 판단(aesthetic judgement)이 가능하다. 여기서 '취향', '미적 판단'이라는 말은 비유적인 의미이다. 미술이 감각을 초월한 이상, '취향', '미적 판단'이라는 표현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타일'이라는 말처럼 '취향', '미적 판단'도 의미를 확장시켜야 한다. 혹, '미적 판단'이라는 표현을 '예술적 판단'이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하더라도, '취향'이라는 말은 여전히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영어에서 '미각'을 기원으로 하는 표현인 '취향'이라는 단어를 '개념', '철학'에도 적용시키고 있지 않은가 ? 더불어 미술 작업을 앞에 두고 하는 판단은 단순히 감각적인 부분만 염두에 두고, 즉 미(Beauty)만 염두에 두고 하는 판단과 구별되어야 한다. 설령, 작업이 감각에 호소하는 작업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관객이 미적 판단을 한다 하더라도, 미적 판단이 이론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수정되거나 바뀔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만일 현대 미술에서도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관객의 미적 경험은 순수하게 감각적이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스타일, 취향같이 변화하는 개념처럼, 관객의 기대치도 계속 변화하며 따라서 관객도 작업 너머에 있는 어떤 걸 끊임없이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결국, '스타일'이라는 개념의 변화는 작업을 대하는 '관객'의 자세의 변화와 함께 진행된다. 그리고 '관객'의 판단은 점점 더 매개적이 되어가며(판단을 위한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하기에) 여기에 맞춰 아티스트의 작업 또한 복잡화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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