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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Apr 05. 2024

10. 물체의 운동량의 보존적 의미

[창조와 과학 스토리]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창 1장 1절)


10. 물체의 운동량의 보존적 의미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14,15)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s in the expanse of the sky to separate the day from the night, and let them serve as signs to mark seasons and days and years, and let them be lights in the expanse of the sky to give light on the earth." And it was so.]

{다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어둠으로부터 낮을 나누기 위해서 거기에 넓고 넓은 하늘에 빛나는 것들이 있게 하라, 그리고 저들로 계절과 날들과 해들을 나타내는(알리는) 일에 종사하게 하라, 그리고 저들로 땅(지구)에 빛을 비추기 위해 넓고 넓은 하늘에서 빛이 되어라.”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직역으로) 

~~~~~~~~~~~~~~~~~~~  Bible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때에, 수면을 운행하시며 물을 나누어 그 사이에 하늘을 내시고, 하늘 위에 수층을 만들고, 하늘 아래에 땅을 내시어 수많은 식물과 동물을 만드시고, 넓고 넓은 하늘에는 빛을 내는 해와 달과 별들을 내시면서 그들로 시(時)와 때(時期))를 나타내는 일에 종사하도록 명령을 하셨던 것이다. 

  그들로 절기와 낮과 밤을 한 해를 나타나게 하심은 그들이 하늘에 그대로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무 의미 없이 운행함도 아닌 것이다. 그들의 운행에는 정(正)함이 있으며, 계시(啓示)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즉 그들의 운행에는 법칙이 주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적인 과학의 법칙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단순히 운행만으로 위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 나타내어 징후(Signs)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년(年)과 일(日)과 계절(季節) 그리고 시간(時間)을 인지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하늘에 움직임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식물이 자라고, 동물(새와 짐승과 물고기 등)의 움직이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절기(節氣)와 낮밤과 연수(年數)를 나타내심에서도 세월(歲月)과 변화(變化)를 통해 존재의 가치와 섭리의 뜻을 게시(揭示) 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지의 변화에는 운동과 운동량을 인간은 추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사고(思考)의 세계(世界)에 창조주 하나님도 관여하시고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그저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결코 인간의 독보적인 영역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광활한 하늘에 별들이나 해와 달이 창조자의 뜻에 봉사하듯이 인간도 역시 자연 속에서 동식물과 함께 다스리고 관리하며 봉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지혜를 다루는 능력을 주신 것이었다.

  만일에 천지에 움직이는 것이 없다고 하면, 화가의 풍경그림처럼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풍경그림을 바라보는 인간은 그 그림 속에 풍경을 정지된 대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무를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느낌을 받고, 흐르는 물의 느낌을 받고, 새나 동물이 움직이는 느낌을 연상하며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천지의 만물이 정지된 모습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었음을 경험과 인식에 의해 유출해 내기 때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나 동물에 의해 운동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인식을 인간의 지각으로 일부, 부분적으로 기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지각활동에 창조주도 역시 감탄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인간은 이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운동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운동의 모습을 분석하며, 일정하게 운동하는 것을 등속운동이라 말하고, 등속운동이 아닌 것을 가속운동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일정하게 운동이 변화하는 것을 등가속도운동이라 구별하였다. 사실 천지에는 등속운동 하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들 뿐이다. 대부분의 운동은 가속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가속운동을 할 때에 인간은 안정감을 가지게 된다. 일정한 가속운동을 한다는 것은 일정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체의 운동이 변하여도 일정한 변화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갖지 않고 평안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천체의 움직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에서도 달리는 짐승의 모습에서도 평안하게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치를 아는가? 등가속도 운동에서는 안정감을 갖게 되는 이유는 운동의 변화에 대해 예측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겠다. 자연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물체나 동물(인간)의 운동이나 행동일 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존재의 불확실성, 인간의 속마음도 포함해서 본질에 대해 불확실할 때에 인간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가장 많이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의 속마음을 알지 못할 때이다. 그 인간의 속마음을 어떻게 관측, 관찰할까? 그것은 대화인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대화의 내용을 보지 않고, 대화하는 상대만 바라보기 때문에 대화의 진실성 보지 못한다. 그래서 위협을 받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선거기간에 지도자를 뽑을 때에, 인간들은 무엇을 보고 투표하는 걸까? 그들의 선거공약을 보지 않고, 그 인간, 유대(紐帶)적인 관계로 투표하기 때문에,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결국은 피해를 보고 배신을 당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정책이나 공약은 실물과 같아서 언제든지 확신할 수가 있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감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화의 내용보다는 인물을 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가에 중점을 둔다면,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고, 지식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사고하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어리석은 인간은 사고의 자유보다는 사고의 틀인 이념이나 사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말할 때나 생각할 때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고 주입된 기억들을 유출해 낼 뿐이다.”     

  다시 물체의 운동에 대해 말해보자. 물리에서 말하는 등속운동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물체의 운동의 가장 단순한 운동이 등속운동인 것이다. 이는 초등지식으로써 ‘1+1=2’라는 기초적인 운동에 대한 이해방법인 것이다. 즉 등속운동은 질량과 상관없이 물체가 어느 거리를 얼마 만에 이동할까에 대해서 일정하게 운동했을 때로 계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m를 10초 만에 달려왔다고 했을 때에, 등속운동이라 생각하면 거리 나누기 시간으로써 10m/s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100m 사이에 운동하는 자가 정말 일정하게 운동을 했을까? 그러면 복잡하게 되어 계산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등속운동에서는 출발점과 과정과 도착점을 분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속운동을 한다면 그것들을 예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는 천지의 물체의 운동에 있어서는 등속운동을 나타내지 않고 가속운동을 나타내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하는 물체나 정지해 있는 물체에 대해 다양한 관측과 예측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운동에 있어서, 가속도운동에 대해 많은 법칙과 현상을 기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즉 낙하하는 운동, 포물선 운동, 원운동 등이 모두 가속도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기술하는 지혜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물체의 운동이나 생물의 운동에 있어서 운동량이 보존된다는 기술인 것이다. 즉 운동의 상태에 있어서도 보존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운동하는 모든 것들에서 태초부터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운동하는 환경 속에서도 안심하고 생물들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물체의 운동량의 보존은 물체의 운동 상태나 변화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운동량의 총체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운동량의 보존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외부에서 공급되어야 하거나 소멸되어 가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천지의 총량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즉 외부에서 보탬이 되거나 덜어간다는 것이 되고, 그 외부는 어디인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천지에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불안해질 것이다. 천지의 보존성은 안전성을 유지케 한다.  


  이제 물체의 운동뿐만 아니라 생물들의 운동에 있어서도 단순히 물리적 법칙에 극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와 원리를 이해하는 것까지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데에 자유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남의 이념이나 사상을 기억해 내려고 하니 무식하다는 말이나 유식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지혜를 가질 때에 이념이나 사상에 대해서 무엇이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옳고 그릇된 것인지 능력을 가지게 된다. 종속된 인간은 제한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극히 일부의 제한된 자유를 누릴 뿐 속박된 삶을 사게 되는 것이다. 

  즉 사악한 인간들,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자들은 참된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길들여진 인간을 원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제도와 윤리와 전통을 내세워 인간은 틀에 가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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