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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Apr 22. 2024

73. 참으로 성숙한 인생이란?

[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73. 참으로 성숙한 인생이란?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다. 사람은 동물과 다르며 특별한 존재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뜻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존재자가 바로 사람인 것이다. 인생은 단순한 성장과정이 아니다. 비록 죄를 업으로 이어받았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다. 

  어찌 보면,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풀무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인간의 타락에서 고통을 수반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확고히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순환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선택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인생을 막연히 살아서는 아니 된다. 물론 미성숙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겠는가? 사람의 성숙은 생물학적 성장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도록 택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인생은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그분을 인정할 때에 진정한 성숙한 인생을 살게 된다. 예수는 그 삶을 보여 주셨다.

<2006년 4월의 좋은 글/ 진리등대>

     


   그날에 아내에게,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보내었던 엽서 한 장을, 이 아침에 눈이 뜨자 손에 들고 읽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내게 붙인 별명은,‘개똥철학’이었다. 어찌 이런 별명이 내게 붙여지게 되었을까? 

  되돌아보면, 한창 사춘기시절이었던 중3 시절에는 암흑 같은 시절이었다. 부모는 서울로 가시고, 누이와 둘이서만 살았던 그 시절에는 하루의 한 끼조차도 허락되지 못한 가난함....... 매일 학교에 가나 등록금이 없어서 아침 조례만 하고는 가방을 들고 학교를 떠나서야 만 했었다. 집으로 간들 아무도 없고 어둠만이 가득한 곳, 그래서 거리를 헤매는 것이 햇빛 아래여서인지 마음이 편안하였었다. 거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차들만이 달린다. 걷고 걸어서 용두산(운암공원)에 올랐다. 탁 트인 부산 앞바다는 답답한 심정을 터주었었다. 

  어쩌다 서울서 편지가 오면, ‘부친의 양복을 전당포에 맡겨서 생활비로 써라!’ 그렇게 전당포를 자주 들락거리던 내 손에는 돈이 있었다. 그럴 때면, 왠지 힘이 쏟는다. 삼백 환으로 붕어빵 세 개를 사서 하나를 먹으며, 나머지는 점심과 저녁용이었다. 어슬렁어슬렁 보수동 헌책방 길을 걸어갔다. 눈에 들어오는 책 제목들.......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죽음에 이르는 병’, ‘자살클럽’ 등이었다. 전당포에 가는 날이면, 헌책 한 권씩을 샀다. 그러면 다음에 전당포에 가는 날까지는 읽고 또 읽으며 공허한 시간들을 메워갈 수가 있었다. 

  졸업장도 못 받고 서울로 올라와 고교 삼차 모집에 OS high school에 겨우 입학을 했다. 학교생활보다는 학교도서관에 살다시피 하였었다. 헌책방에서 한 권씩 사다 읽던 때보다 언제든지 책을 가져다 읽을 수가 있었다. 마치 보물섬에 온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이 도서관 책장들을 둘러볼 때마다 심장이 뛰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평범한 일상적인 대화보다는 책 속에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서, 그래서 ‘개똥철학’이 별명이 되었다.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던 중에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동화 속에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한 중에 한 편의 동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길에서 한 신사로부터 쪽지복음인 요한복음 소책자를 공짜로 받았다. 그리고 읽고 또 읽으며 예수를 알아가게 되었었다. 어릴 적에 예배당을 놀러 다닌 경험이 있었다. 나중에는 성경을 통해 이 땅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면서 참 인생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끝없는 고통의 소식들, 비참한 사건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이웃의 어른들의 싸움........ 

  책 한 권을 들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던 시절에는 모든 인생 이야기가 흥미로웠었다. 나무들과 풀 그리고 날아다니는 나비랑 벌레들, 산새와 다람쥐 등........... 있는 그대로가 좋았었다. 다시 도시로 돌아오면 사람들의 괴로워하는 모습들이 동화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중에는 잘 될 거라는 희망의 실타래를 풀어가듯이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희망은 보일 듯이 멀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걸 알게 되었다. 타락한 인생들이니 죄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인생이라고 철인(哲人)들의 책에서도 ‘인생은 고통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정말 인생은 고통일까? 그리고 도인들은 ‘허’, ‘무’, ‘공’이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토록 인간의 삶이 무의미한 걸까? 

  요한복음 소책자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었다. 그리고 틈틈이 읽고 또 읽고 그랬었다. 첫 글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말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서야 성경책을 얻은 후에 첫 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에서 이 세상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성철스님도 훗날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바라보았던 자연 그대로가 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산과 들을 좋아했었다.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들, 그들은 어떤 고통도 주고받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리고 그들은 늘 한결같다는 것에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헌데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무상만상(無常萬狀)의 사람들을 보니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하였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듯이 보였다가 전혀 목적 없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 이유 없이 서로 고통을 나누며, 연고 없이 해악(害惡)을 행동하는 모습에서 정말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말에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마태 11:28) 예수의 말이 힘들 때마다 귀가에 울려나고 하였었다. 정말 예수께 가면 쉼을 얻을까? 그때부터 예수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었다. 아니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자주 생각하였었다.

  정말 세상의 지식들, 지인들의 글들에서 헛되고 헛됨을 알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런데 헛된 소리임을 깨닫게 되었었다. 하나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는 “너희는 왜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느냐?”라고 말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나?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신다니 말이다. 독심술? 텔레파시(Telepathy)? 그런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그런 공상을 하여 만화나 영화처럼 이야기를 꾸민다. 그러면 인간들은 즐거워한다.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기하게도 믿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믿고 있다는 것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 걸 계속 보면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지 않는지....... 정신적 분열이 느껴져서 곧 피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동물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뭔가 인간은 특별한 존재, 영원한 존재처럼 느껴지게 된다. 예수의 가르침엔 놀라움이 많다.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요한 3:36)

  하나님의 아들?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니?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 그럼 어떻게 영생을 얻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길? 하나님도 아들이 있었나?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친 아들이 아니라, 혈육의 아들이 아니라,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첫 글에서 말했듯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있었던 말씀(λόγος)이 육체를 가진 분, 그는 예수란 것이었다. 그 예수를 믿을 때에 영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 17:3)

  영생은 예수를 알아가는 삶이란 것이었다. 그를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미성숙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끝없이 수많은 이미지를 가르치려고 한다. 그리고는 성숙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무엇이 성숙한 사람일까? 세상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문명과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할머니들이 모여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남자들은 철들려면 멀었어! 아마 늙어도 어렵지. 고삐 풀리고 무덤에 갈 때나 철들까?’ 이게 무슨 말이지? 성숙한 사람과 철든 사람은 뭐가 다르지? 나중에야 알았다. ‘철들다’라는 것은 사전적으로는 계절에 따라 과일이 열리고 계절에 따라 과일을 먹어야 한다는 말에서 철[계절(季節), 사리분별(事理分別)]로써, 인간이 나이가 들면서 제구실을 할 줄 아는 것을 철들었다고 하는 말이나 성숙한 인간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같은 말인 듯하다. 천지만물에는 때와 시기가 있듯이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도 때와 시기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인생에는 때와 시기를 따라 성숙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생은 세 번 산다고 하지 않는가? 태중의 인생과 세상의 인생과 사후의 인생을 말이다. 그런데 세상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삶인지, 천사들도 부러워한다지 않는가? 왜일까? 천사와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그 인생이 영생의 길로 가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성숙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엽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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