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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y 05. 2024

71. 죄송하지만 해당 난이 없어서

[독서와 생각]

71. 죄송하지만 해당 난이 없어서     


    프랑스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나는 의학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캠퍼스의 학생들을 보니,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에 방 한 칸 얻는 것쯤은 쉬운 일로 여겨졌다. 

  내게 모든 희망을 심어 준 단과대학 내의 사회복지사를 찾아갔다. 복지사가 내게 방문목적을 묻기에 내 삶과 내가 해 온 투쟁, 야영지의 낙타, 염소, <어린 왕자>, 학교, 바마코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대해 말했다. 내 얘기를 듣고 나서 복지사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당신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난이 없어요.”

  유목민은 결국 행정서류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 돈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할지도 몰랐던 나는 ‘사랑의 레스토랑(노숙자와 병자를 위한 장소)에 가서 동냥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 수가 있지?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모든 문들이 당장 내게 열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내겐 믿음이 있었기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깊이 다졌다.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경험해야 할 뭔가가 내게 있음을 알았다. 프랑스가 나를 받아들이도록, 내가 사랑한다는 걸 프랑스에 보여 줘야 했다. 사랑을 입증하는 데는 종종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시리드 지음>


  국제사회는 문명국가들의 울타리 사회인 것이다. 문명으로부터 뒤떨어진 민족이나 부족은 울타리 밖에 있을 뿐이다. 무사는 ‘어린 왕자’의 책을 통해서 문명세계를 보았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프랑스를 알게 되었다. 무사는 자신이 울타리 밖에 존재임을 깨닫고, 프랑스를 사랑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힘쓰게 된다.


  국제사회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다. 먼저 ‘국제사회’에 대해 알아보자. 국제사회(INTERNATION SOCIETY)는 국가나 국가기구와 국제 비정부기구와 같은 다양한 행정체제가 다양한 방향에서 상호영향을 주고 있는 사회를 말한다. 즉 국제연합(UN), 유엔아동기금(UNICEF),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보건기구(WHO) 등등이 국제적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기구나 의식이 발달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제1차 전쟁과 제2차 전쟁을 거치면서 자국중심의 안정성이 희박함을 깨닫고 국가 간에 연합이나 동맹 등으로 발전하면서 보다 보편적인 국제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지며, 2차 세계전쟁 중에 미국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고안해 낸 유엔(UN) 기구로써, 처음엔 26개국으로 시작을 하게 되었었다. 

  한편 1918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부터, 제1차 세계전쟁 후반에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국제사회의 민족주의에 눈이 뜨게 되었으며, 이로써 일제 식민지 지배에 있던 조선(대한제국)인은 국제사회에 눈이 뜨게 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었다. 

  이를 기반으로 제2차 세계전쟁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국제사회의 유엔 기구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제사회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국제적 인식이 활발하기 시작한 때는 르네상스 시대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물론 르네상스 이전에도 소극적으로 국제무역이 진행되어 있었으나 구체적 국제의식은 형성되지 않았었다고 생각이 된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전에는 중세시대로서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시기(AD 476년) 후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함께 로마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등 ‘공포의 시대’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개인의 자유가 없고, 인간의 존엄조차 없었으며, 오직 교황의 권력과 종교의 힘이 지배하였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는 어떤 자유 활동도 허락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어떤 창작활동도, 개인의 행복추구도 허용될 수가 없던 시대였던 것이다. 암흑의 시대는 거의 천년의 기간이 흘러가야만 했었다. 그 시대에는 약소국가나 소수부족들은 침략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때부터 원시적 식민지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도 르네상스(renaissance: 부활, 부흥) 시대에도 문예부흥을 타고 경제발전과 국력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예무역과 식민지제도가 활발하였었다. 그때에 무역이 활발하였던 시대에 14세기 유럽중심에는 최악의 흑사병의 전염병이 확산되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피해였다. 그 당시엔 세계 인구가 약 4억이 넘었었다. 하지만 대역병으로 2억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중국으로부터 옮겨진 동양쥐벼룩에 의한 페스트균이 14세기에서 17세기 동안에 동서양에 치명적인 혹독한 시련을 당했어야만 했었다. 유럽 인구의 약 50%에 사람이 죽었다. 이때에 조선에도 염병이 펴졌으나 악귀(惡鬼)의 병(病)이라 하여 거의 방치되었다고 하며, 그 시대에는 흑사병을 역질, 악질, 괴질이라고 조선 사서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세계 인류문명은 르네상스의 시대를 바탕으로 인본주의 이념(理念)과 사상(思想) 안에서 눈부신 문화(文化)와 문명(文明)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사는 그런 문명사회의 밖에 사람이었던 것이다. 근대시대와 현재에 있어서 유럽중심의 문명국가 중에 하나인 프랑스에서의 무사는 기름에 물처럼, 또는 물에 기름처럼 전혀 융화되지 못한 존재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었다. 즉 문명 밖에서 생활해 온 그는 어떠한 조건에도 해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무사의 태도였다. 문명세계에서 수많은 해택을 누리는 문명인에 비해 그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그는 기죽지 아니하고 그의 살아온 생활방식에서, 또는 의식에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비문명사회에서의 의식은 관계성을 찾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프랑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면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 믿음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문명사회에서는 많은 해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문명인에게는 수많은 조건과 자격을 갖추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사에게는 자연인처럼 단순하게 일대일의 관계성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인 것이었다. 이처럼 문명사회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관계들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 즉 의사결정권이 많이 포기된 채로 사회의 제도 속에서 자격과 조건에 순응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프랑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된다면 그도 역시 프랑스인처럼 해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리한다면, 현대인, 문명인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문명사회의 제도 속에서 강요하는 조건과 자격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교육된 의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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