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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May 08. 2024

72.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할 때

[독서와 생각]

72.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할 때    

 

  나 자신으로 남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는 곳이 되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각가지 언어들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을 판단하거나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타인의 생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화를 할 때 버려야 할 점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다. 마음을 열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면, 서로의 다른 점을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사리드 지음>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으로 공감한다면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서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 왜? 자신의 생각을 타인이 잘 안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은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즉 서로의 다른 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에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햔편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도 생겨나게 된다. 다양성을 이해할 때에 가치를 알게 되고 존중한다.



  ‘서로 다르다’에 대한 이해를 인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인류문명의 형성과 발전에는 무엇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을까? 근본 뿌리는 무엇일까? 

  혼자 있을 때에는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의존하여 생각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둘 이상 있을 때에는 상호의 생각을 탐색하거나 교류를 하여 합일점을 찾으려 하다가, 결국에는 세력(힘)에 의해 주도적인 생각과 행동을 따르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노아홍수 직후에 하늘이 인정하는 용사 니므롯의 일인 통치하에 모든 족속의 인간들은 시날평야에 모이게 되었고, 거대한 대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니므롯은 인간의 힘을 보았다. 그래서 하늘에 도전하려고 하늘을 찌르는 높은 탑을 세우도록 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었던 것이다. 그때에 니므롯의 통치로부터 벗어난 한 사람이 있었다. 노아의 아들들 중에 셈의 자손에서 에벨(Eber)이란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강은 건넌 자’라는 것이었다. 에벨이 태어날 당시에는 한창 바벨탑이 건설되던 때였다. 그는 바벨탑 건설에 협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그 지역을 떠나 유브라데스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벨의 자손들은 바벨탑의 언어혼잡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의 언어는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즉 그는 최초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된다. 이때부터, 바벨탑의 언어혼란으로 인해 다양한 언어가 생겨났으며, 같은 언어에 따라 족속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 세계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게 된 이유인 셈이다. 즉 언어는 하늘이 준 언어라는 것이다. 다만 언어에 따라 생긴 문자(글)는 인간들이 의사소통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들은 둘 이상 모이면 처음에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상호협력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한 세력에 의해 생각과 행동을 따르게 되고 만다. 그것이 에덴에서 떠난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협력하거나 교류하고자 하는 데에서 멀어지고 인간의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니므롯과 같은 강한 자에 지배를 받게 되고 만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공동사회를 형성하면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자유의지를 포기하게 되고 공동의식, 즉 집단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사상과 이념들로 선택된 힘(세력)에 복종하게 되고, 따르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하기보다는 공통점을 찾으려고 힘쓰게 되고, 동질성을 찾아내어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것이 일상화 또는 보편성으로 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무사는 전혀 비사회적 환경에서 살아오다가 문명세계에 들어오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무사는 자신의 삶에서와 다른 점에 대해 이해하는 길을 깨달은 것이다. 즉 현대인에 되어가는 길에 들어서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세계, 다른 문화, 다른 문명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인의 세계에 대해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다른 점들에 대해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차츰 그도 다양한 문화와 문명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인 것이다. 곁으로는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일뿐, 사실은 자신의 개성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신세대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는 모습들에서는 결코 자신의 주장이나 자신의 생각을 쉽게 내보이지 못하고, 상대의 생각이나 의견을 거부하거나 거역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겠다. 이러한 모습에서 무사는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할 때에 서로 소통할 수가 있고, 공감대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점점 문명이 발달할수록 개인의 가치나 존재감은 줄어들고, 그 시대가 주는 가치나 존재성에 맞추려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명인이라고 하면 그 시대에 맞는 가치와 조건에 잘 숙달된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멀어져 가는 결과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근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었다. 즉 개인의 가치와 존재를 지켜가는 것을 말한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처럼 하나의 일치성, 규격화된 존재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본질에서 빗나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죄악으로 보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성경의 이야기로는 시날평야에 대도시를 형성하고 일인 통치 속에서 하늘에 도전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과정에서 모든 족속의 인간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노예처럼 개인의 가치와 존재를 상실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혼란을 일으켜 흩어지게 하여 각자의 가치와 존재의 자유를 회복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자고 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타인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것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이겠는가? 힘들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산다면 결코 힘들어도 하기보다는 더욱 보람을 느끼게 되고 가치를 알게 되어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게 될 것이다. 인간의 가장 불행한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인 것이다. 현대 문명 속에 아이들은 그렇게 단속과 간섭을 받고 있기에 먼저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할 때란 자신과 타인의 가치와 존재가 선명하게 표현되고 나타낼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란 그 사회와 공동체 속에 주어진 이념과 사상에 의해 인식된 관념 속에서나 체제 속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복을 입은 인간, 즉 그 시대에 조건과 자격을 갖춘 문명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무사는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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