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 …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2:8)
~~~~~~~~~~ 찬양과 말씀 ~~~~~~~~~~~~
‘세상을 바라보는 눈들은 같으나, 생각하는 영혼들은 다르다.’
‘모든 만물이 그러하다.’ 고 하나, 무엇이 그러한지를 알지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평범한 인간들이 참으로 많다.
노아홍수 직전에 있던 숨 쉬는 것들, 그렇게 말하면 사람과 동물 정도로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모든 생명체는 다 숨을 쉰다. 하물며 숲 속에 나무들도 숨을 쉰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깐 인간들이 삼림욕 하기 위해 좋은 숲 속을 찾아 숲길을 걷지 않는가?
수많은 생명들, 그중에 특별한 존재라고 하는 인간들, 자연법칙을 넘어 사는 인간들, 그들이 무엇을 하였겠는가? 쉽게 말하면 인간들은 문명을 낳고, 문화를 쌓으며 놀라운 세계관(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잖은가?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 인간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결국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바라보는 눈조차도 보이는 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주어진 관점(觀點)이 다르고, 견지(見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같은 관점을 가진 인간들끼리 모이고, 생각하는 견지에 따라 힘을 쓴다. 그러한 세상, 인간들의 세상에는 보기엔 자유로운 듯하나 그러하지 못하고, 개성(個性)이 고유한듯하나 그러하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왜일까?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 특히 현대인들을 바라보아라! 저들이 자유로이 사는듯하나 그렇지 못하고, 저들이 고유한듯하나 그렇지 못함을 아는가?
마치 정원사가 화단을 가꿀 때에 삐져나온 가지나 잎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이처럼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시대적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조건일 뿐이다.
이러한 인간들에게서 보여주는 행복이나 은혜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동물원에 동물들을 보아라! 그 동물들이 얼마나 행복하는지? 얼마나 은혜를 누리는지? 또는 현대인의 특징 중에 하나는 개나 고양이를 품고 걸어가는 인간들, 또는 개나 고양이를 품고 함께 자는 인간들, 그들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개나 고양이에 만족하면서 거리를 행보하며 자족하고 있음을 바라볼 때에, 누가 주인이며 하인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현대인들은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은혜인지를 알고 있을까?
불행(不幸) 중 다행(多幸)인 것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 축복인 것이다. 그 축복마저도 거부하는 여성들, 의술에 의존하여 아기를 낳는 편리성과 자연분만에 의해 아기를 낳는 섭리를 알까? 그렇게들 말하겠지? 인간의 기술문명이 주는 편리(便利)만을 생각하는 매우 단편적인 의식에 종이 되어가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자연분만의 섭리가 주는 놀라운 축복을 알지 못함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조금씩, 차츰차츰 변질되어 가는 사실을 말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뜻을 깨닫는다면,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은혜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축복(祝福)은 행복과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치 질그릇을 만드는 도공이 특별한 질그릇을 만들었을 때에는 그 질그릇의 쓰임과 가치를 축복해 주어 그것을 누리는 것이 바로 질그릇에게 행복과 은혜가 부여됨이란 것이다. 이처럼 인간도 역시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자의 뜻이 담겨있어서, 그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갈 때에 행복과 은혜를 누리게 되고, 그것이 바로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진화론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적자생존하며, 약육강식 하며, 끝없이 진화하지 않으면 퇴보(退步)되고, 지배당하고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한 순간도, 한 세상도 편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인간들은 마약과 흡연과 술과 폭력과 자살로 원초적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얼마나 갈급하며 숨 가쁘게 살지 않는가?
이러한 세상을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 1:5)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다.」(요한 3:19)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한 12:46)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이 세상을 어둠의 세상인 것을 말하지 않는가? 여기서 어둠의 세상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즉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이 두려움에서 자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가? 이러한 인생들은 어둠에 사는 인간들의 삶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행복과 은혜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행복과 은혜를 쟁취하기 위해서 얼마나 악한 짓들을 행하며 사는가? 또한 이런 인간들은 참 행복과 은혜를 알지 못한다. 또한 이런 인간들은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언 29:1)과 같이 오리혀 진실에 대해 저항하며 대적한다.
그러나 참 질그릇이라면 도기장이가 만든 뜻을 알고 그대로 살려고 한다. 즉 지음 받은 대로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눈은 진실의 눈인 것이다. 이러한 진실된 사람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리의 뜻을 마음에 두고,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고 힘쓰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복되다 하는 것이니, 이는 참 행복을 알고 참 은혜를 바라보며, 이 어둠의 세상에서 자유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되며 그 삶에서 참 행복과 진정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깊은 뜻을 담은 찬양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노래가 그러하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