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說知考]
- I realize and think for the Lord's words. -
- 빛과 소금 -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15. 등잔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 그 빛을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3~16)』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1~4)』
~~~~~~~~~~~~~~~~~ 성경 말씀 ~~~~~~~~~~~~~~~~~~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거기에 인간(아담)을 손수 지으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주시므로 생기(生氣)를 주셨다. 그리하시고는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천지를 다스리는 일을 맡기자 하셨다. 특히 인간을 창조주의 모습을 닮게 하셨으며, 특별히 인간에게는 스스로 행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러하신 후에 한 번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간섭하거나 물리적으로 강압적으로 간섭하시지도 아니하셨다.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인간을 세우셨던 것이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천지에 모든 자연에 생물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지만, 특히 인간에게는 그 영역을 넓게 하사, 다양한 능력을 나타내도록 허락하셨다. 또한 인간에게는 판단과 분별과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에덴동산을 꾸미시고, 거기에 아담과 여자, 두 사람을 두어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도록 허락하셨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왜 에덴동산의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나무를 두셨을까? 만일 그 과일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었던가? 왜? 먹지 말라 하는 과일나무를 거기에 두셔야만 했는가?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들처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천지를 다스리게 하는 일에 협력자, 또는 동반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아담과 여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이미 아셨지만, 그들을 막지 않으셨던 것이다. 왜일까? 선악의 열매를 먹지 않게 하시지....... 왜 보고만 계셨을까? 이는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심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약속을,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 결과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셨을까?
이처럼 하나님이 한번 정하신 것을 번복(飜覆)하거나 바꾸지도 아니하심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즉 그들에게 부여주신 자유의지를 간섭하지 아니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신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돌이키지도 아니하신 분이시란 것이다. 세상에는 ‘거룩하다’함에 대하여는 어떤 권위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즉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심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피조세계를 통해 인정받거나 인지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말하는 거룩함은 동등한 자들에게서 동등하지 않음을, 우월감을 나타내려는 인간의 탐욕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의 우두머리, 김일성은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끝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각인시키며, 강요했던 것이다. 즉 김일성은 절대적 존재로, 존엄한 존재로, 그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신성화했던 것이다. 이럴 때에 그들은 거룩함의 의미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씨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왕의 존재를 그렇게 인식케 했었다.
오래전, 강원도 산골에 노방전도차 갔을 때에, 논밭에 잡풀을 뽑는 한 노인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설명하였을 때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우리 같은 벌레처럼 사는 것이 어찌 거룩한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지. 높으신 양반들이나 가는 곳이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조선이 망하고,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아직도 조선의식을 버리지 못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생각에 놀라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며 자리를 떠난 적이 있었다. 그런 의식을 가진 분에게 어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겠는가? 이씨조선시대에는 왕과 양반들만이 인간들인 것이었다. 평민이나 농민들은 풀벌레처럼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씨조선을 우리의 전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조상은 이씨조선이 아니다. 단군의 조선이 우리의 조상이며, 정신인 것이다. 특히 단군사상에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매우 높은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라.’는 뜻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실 때에 하신 말씀과 동일한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기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다.」(창세기 1장 26절)
이러한 깊은 뜻을 단군의 사상으로 전해져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깊은 뜻을 가진 단군에 대해 일제강정시대에 조선의 정신을, 역사적 위대함을 말살하려고 단군신화로 바꿔버렸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민족성은 희석되어 버렸고, 그나마 남은 자료로는 비틀린 이씨조선의 역사만이 있어서, 그런 졸렬한 역사를 바탕으로 사극의 드라마로써 왜곡(歪曲)하고, 흥행으로 오늘날의 한국정신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홍익인간’의 뜻이나 예수가 산상에서 가르치신 빛과 소금의 삶을 가르치심은 같은 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니므롯의 인본사상과 다윈의 진화론 이념이 바탕이 된 암울한 세상으로 흘러온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는가? 아무 데도 쓸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마태 5:13)
위에 예수가 가르치신 말씀의 뜻을 알겠는가? 오늘날에 인간세상이 이처럼, 단군의 사상처럼만 되었더라면, 인류는 빛과 소금으로서 인간의 존귀함을, 그런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문명과 문화가 매우 높고 크게 발전한 인간세상을 보아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이런 인간의 업적을 기뻐하시지만, 반면에 인간세상의 그늘에 대해 심히 애통해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인간의 문명에 대해서도 흡족해 하심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하는 데에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는, 그 뒤꼍에는 잔혹한 사악함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아신 하나님은 유대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 진리를 엄청난 자유의 가치로 주셨던 것이다. 여기서 자유의 가치란 북한 김일성처럼 강압과 무력으로 하지 않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게 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지 아는가? 그것은 ‘진실성’인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이 있다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말씀을 찾아보면;
「그 열매를 보면, 너희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겠느냐? 이처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진다.」(마태 16~19)
이렇게 예수의 가르치신 말씀을 보고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택함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할지라도 애통함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하라함같이 하라고 하신 뜻을 깨닫는다면,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갈등이나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은 예수의 제자와 그리스도인이지만, 이를 거두는 것은 오직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교회를 보면, 전도에 큰 힘쓰면서도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에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만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교회에 교인이 한 명뿐일지라도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에 있어서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 상은 결코 가볍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가 아홉아흔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그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마태 18:12)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리는 모든 인류에게 전해져야 하는 이유가 있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는 깨닫게 되는 자, 택함을 받는 자만이 진리를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뜻밖에 하신 말씀인, “너희는 진리를 알라!”하신 것은 예수를 따라다니는 자(진리를 듣기는 듣는 자) 중에 머물지 말고, 내가 가르치는 진리를 알라고 하신 것이다. 그 진리가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너희는 빛과 소금이 돼라’고 하신 말씀은 구원받은 자처럼 살라는 것이다. 깨달은 진리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진리를 깊이, 예수가 가르친 말씀을, 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며, 함께 삶으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단군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 ‘홍익인간’의 정신을 설파했듯이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에서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은,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좀 더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씀을 따라 빛과 소금의 삶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이다. 단군의 시대에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처럼 밀이다. 결국은 단군이 다스리는 세상은 사라지고 중국 땅(?),
동아시아 대륙에 평정되었던 단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말았듯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도 외압에 의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러할지라도 빛과 소금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세상이 어두울지라도 성령이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동역자로서 함께 추수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시대에는 예수와 함께, 성령의 시대에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은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