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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Dec 13. 2021

‘똥 누기 게임’으로 회귀하는 압력의 역학관계

         

“세계는 말이야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 같아.

압력으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구분한 거지.”

(박민규의 「깊」 中)          


1. 압력의 균형 – 無事한世上이病院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끗끗내있다(이상, 「紙卑」)     


 우리는 대기권이라는 공기로 가득 찬 바다에 살고 있지만 공기의 압력을 느끼지 못한다. 외부 대기압과 동일한 크기로 인간 신체 내부에서 밀어내는 압력의 균형 때문이다. 이 균형이 어긋나면 인간 신체는 문제가 생긴다. 그 어긋남이 소소하면 신체는 이를 조절하여 변화된 압력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지만 이 압력의 균형이 극단적으로 무너지면 물질로서의 신체는 ‘생명현상’을 멈추게 된다. 박민규의 소설 「깊」에서 룸의 지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간 빌, 그리고 지구의 중심으로 나아갔던 공(孔)과 희생된 디퍼들의 시체들은 마치 물 밖에 던져진 심해어처럼 장기(臟器)들이 터져 나왔다.

 물질로서의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물리적 압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 외에도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의식’과 ‘지향성’은 ‘정신세계에 거주하는 것’들로서 ‘나’의 내부에서 보자면 특별하고 고유하며 무한한 존재이지만 외부에서 보자면 뇌파기록 장치에 기록된, 파동의 변화가 있는 추상적인 ‘선(線)’정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양상을 형상화한 구체물이 될 수 있다. ‘정신세계에 거주하는 것’들 역시 물질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압력의 균형, 즉 ‘정상성’을 획득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러한 생존을 위한 균형 감각에 대한 인식은 타자를 비롯한 세계와 자신에 대한 거리감각을 형성하게 하고 이는 소설 미학적으로 아이러니와 연결된다. 그러나 최근 젊은 소설들에서 보이는 ‘거리감각’은 서사소통구조로서의 기법적인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곧 현실의 실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양상으로 판단된다. ‘거리감각’은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소설을 쓰기 위해 습득해야 할 미학적 기법이기보다는 그것이 곧 세계 자체이자 생존 방식이기 때문에 이미 태생부터 몸에 밴 습관이자, 일종의 ‘자연’과도 같은 디폴트 값이 되었다.

 거리감각은 차이 혹은 단독성만 존재하게 된 지금의 세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제 혁명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혁명이 가능했던 시절에도 단독성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차이를 참아내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스러움을 회피하기 위해 더욱더 거리를 두는 방식에 익숙해지게 된다. 서로를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차이에 대한 안전거리를 미리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 「임시교사」(손보미)에서는 현실의 구질구질한 일상과 인간군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한 폭의 잘 정리된 추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있다. 이 소설에는 변호사와 큐레이터라는,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직업을 지닌 부부와 소유재산은 없지만 역시나 배운 여자인 고등학교 지리 과목의 임시교사 출신인 보모 P부인이 주체로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감출 줄 아는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다. “남의 집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는 진짜가 아니다. 그 말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P부인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음식을 매 번 싸가서 따로 먹었으며 자기가 읽을 책 역시 들고 다녔다. 그 집의 물건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쓴다. 돌보는 아이의 한쪽 부모가 귀가해서 가족끼리의 식사가 준비된 식탁이 차려지면 그녀는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거리와 경계선은 명확했다.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느라 그 집의 소파에 앉아 있을 수는 있지만 절대 그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한 자리에 앉아 같이 먹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고용주와 고용인으로서의 명확한 경계를 서로 분명히 자각하고 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경계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서로 간에 경계가 분명했던 그 관계는 그 부부의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P부인이 ‘진짜 호의’로 보살피면서 무너진다. 직선의 형태였던 관계의 경계는 완곡한 곡선으로 경계가 모호해지고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 부부는 본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몰려와 그들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을 때,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한다. 경계의 모호해짐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힘든 상황이 모두 해결되었을 때, 갑자기 그들은 그 모호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누군가 자신의 일상의 공간과 관계에 침범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하는, 예민함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관계의 불공평에서 발생한다. 일상의 예민함을 회복한 부부는 P인을 해고하면 되지만 자신의 ‘진심’으로 헌신한 P부인의 ‘진정성’은 계약이라는 어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잉여를 지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상호 교환되지 못하는 지점이 발생한다. 하지만 P부인은 결코 자신의 ‘상처받음’을 드러내지 않고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고당하는 순간까지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서로의 차이를 건드리지 않고 관계의 거리감각을 유지한 채로 관계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한 이러한 거리감각의 발휘가 항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열악한 것 중에서 덜 열악한 것을 골라야 하는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노력이 아니라 운에 의해 결정된다.

 「그 무언가의 끝」(임현)에는 신분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주인공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다. 누나는 캐나다 이민을 갔고 부친은 교육공무원으로 은퇴했다는 신뢰할 수 없는 과잉정보를 풀어놓는 그 남자의 말을 주인공의 형수는 믿지 않는다. 나와 형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 남자에게 불쾌함을 느끼고 그 남자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그 남자에 대해 비호감적인 감정과 판단을 착색시키고 각인시킨다. 1년이 지난 후 석 달분의 방세를 내지 못하자 형수는 남자를 내보낸다. 그 해 가장 추웠던 어느 날 밤, 그 남자는 비어있는 그 방에서 추위를 피하려고 몰래 이불 한 채와 버너를 들고 들어가 자다가 화재로 인해 죽게 된다.

 세상의 계산법으로 형수와 주인공은 방세가 밀렸으니 정당하게 남자를 내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지 않았을 경우에 생기는 불공정함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문제가 더 문제적일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정확한 거리감각을 발휘했는데도 그들은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사고에 휘말렸고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낯선 타자(남자)의 죽음과 더불어 이후 형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차곡차곡 쌓으며 경험하게 된다.

 불행하지만 덜 불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역시 노력보다는 재수가 좋고 나쁨이라는 기준을 가지게 된 주인공은 이 네 번의 죽음에 대한 인과의 공허를 자신이 꾸었던 ‘토끼 꿈’으로 대체하면서 ‘나 때문’이라는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형의 죽음 이후 그는 꿈을 꾸지 않으려 밤에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하고 어느 날 지나가던 여자가 만날 사람이 있다며 간절하게 마트의 위치를 물어도 ‘모른다.’라고 대답한다. 그 마트는 주인공이 오다가다 본 장소임에도 확실치 않으면 틀린 것을 알려주기보다는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며 타자에 대한 거리감각을 내보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의존하며 마트의 위치를 알고자 하는 그 여자의 간절함을 ‘지나치다’라고 생각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고 그 여자가 자신을 따라오거나 다시 부탁하지 않을까 하며 부담스러워한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열악한 것에서 덜 열악한 것을 고르기 위해 운에 의존하는 것은 문제 제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의 일상성과 효율성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내재화된, 은폐에 가까운 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일상은 무병(無病)을 가장한 병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아이러니가 폭압적 현실에 대한 우회의 발언으로 사용된 소설 미학적 기법이라면 현대의 아이러니는 아이러니가 ‘세계 자체’이자 현대성의 기표이자 기의가 된다.

 1960년대 작가인 김승옥을 선두로 해서 젊은 작가들, 그리고 소설 속 주체들이 젊음의 특권으로 방황과 세계에 대한 환멸을 서술했다면 요즘의 작가들, 그리고 소설 속 주체들은 환멸을 감추고 관리하는 법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행간을 감추고 침묵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관계가 끊어져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둔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는 언어가 진리를 표상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단지 적응의 도구라고 하는 로티의 관점(이유선, <<리처드 로티, 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 p.11)과도 상통하는데, 관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체들은 법정에 가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 어떠한 책임도 없어진 그날 밤까지도 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 수 있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여름의 궤적」, 정영수) 먼 타인으로 돌아선다. 모든 관계는 유기적이며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더 인간적인 말」, 정영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절제와 세련을 가장한 무기력함은 설사 그 관계가 지속된다 해도 지리멸렬한 상호작용이 반복되리라는, 학습된 권태이자 피로감이다. 스스로가, 세계가,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 무엇도 구원이나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알아버린 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눈멀어버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압력의 균형은 ‘눈멀어버림’으로 정착되고 있는 중이고 이것은 소설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차이만 남은 세상에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보는 것’이나 ‘눈머는 것’은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든, 없든 차이가 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 팽창과 수축 – 인류에겐 갈 곳이 필요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지구의 틈은 인류의 어떤 성분을 자극했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틈을 향해 스며들고 싶어 했다. 갈 수만 있다면 가야만 하는 속성을 가진 게 인류라고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박민규, 「깊」)


 소설 「깊」(박민규)에서 서기 2378년의 지진이 발생하기 전까지 인류는 우주로의 팽창에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이미 은하계의 각 행성에 연구기지가 들어설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 외부의 압력이 거의 없는 우주로의 진출은 인간 인식의 무한한 팽창을 가능하게 했고 이러한 팽창은 인류에게 가야 할 곳을 명확히 알려주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우주 개척의 붐이 일면서 줄어든 안락사의 증가율이 이를 증명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인간의 모든 노역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인류가 얻은 최조의 부산물이 바로 ‘자살의 유행’이었다. 이것이 이미 이백 년 전의 일이다. 이러한 시류를 반영해 연맹은 결국 자살을 합법화시켜 안락사가 죽음의 툴로 정착되면서 고전적인 자살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자살마저도 하나의 ‘제도’가 되어버린 세계, 이제 자살도 관성이자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시점에서 소설 속 주체 공(孔)의 아버지 부안 리는 최초의 ‘우주 자살자’가 됨으로써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자신의 사설 우주선에 가족을 싣고 태양을 향해 날아갔고 코로나 속으로 사라진 그의 일가족은 공허감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자살 어드벤처 붐을 일으켰다.

 우주로의 자살 어드벤처라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했지만 이 용어가 탄생하게 된 본질적인 메커니즘은 이상의 「권태」에 나온 아이들의 ‘똥 누기 게임’과 다르지 않다. 분명 ‘초록 예찬’을 외친 이들도 있었건만 온 세상이 푸르러서 지긋지긋하다고 「권태」의 주체는 발화한다. 아이들은 그 지긋지긋한 녹색에 일조하는 풀을 뜯으며 놀다가 금세 지겨워하며 돌을 가지고 놀고 돌을 가지고 노는 것도 권태로워지자 다른 여러 가지 놀이들로 바꾸는 것을 반복하다 결국은 ‘똥 누기 게임’을 하게 된다.

 팽창이건 수축이건 결국 인류에겐 갈 곳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심해 19251미터 심연을 향해 돌진하는 인간(디퍼)의 노력은 애처롭다. ‘지구의 틈’ 아래의 유터러스란 외부의 압력이 거의 없는 우주로의 팽창이 아닌 엄청난 압력의 수축을 견뎌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체액과 장기, 혈액과 전해질까지 R-71이라는 물질로 대체해가며 새로운 종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사한다.

 ‘자살 어드벤처’와 ‘똥 누기 게임’만은 막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팽창과 수축을 지향하던 인류의 모습은 그래도 ‘보는 것’과 ‘눈멀어버림’의 차이가 있다고 믿었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생존전략으로 ‘눈멀어버림’을 스스로 선택한 최근 소설 속 주체들은 어떤 양상을 보일까. 압력의 균형으로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자살 어드벤처’와 ‘똥 누기 게임’을 막아내고 있을까. 결과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인과의 공허를 꿈에 의존하는 「무언가의 끝」(임현)의 주인공은 꿈에서 토끼를 보면 사나흘 간은 되도록 외출하지도 않고 집에만 있으면서 시간을 견딘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무료하고 지루한 대부분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사건 사고를 본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거나 충돌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소설 「대관람차」(손보미)에서는 사건 사고에 대한 소문과 잡담들이 지루하고 불안한 삶을 지연시키며 유지하게끔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 시간, 1972년에 세워진 호텔 초이선은 불에 탄 후 6개월 이상 그 상태 그대로 서울 한복판에 남아 40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무너진 호텔 초이선에 들러 뒤늦게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안달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것이든 그곳에서 발굴해”냈을 것이다. 소문과 잡담 속에서 일시적으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이지만 공허하고 하찮은 삶을 넘어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소문과 잡담은, 그리고 공허하고 하찮은 삶은 무의미의 의미이자 본질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의 공허감을 견디고자 시도하는 ‘똥 누기 게임’의 다양한 양상은 정영수의 <<애호가들>>에 모여진 단편 소설들에 잘 드러난다. 그들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타자가 도서관 책장 뒤에 숨겨놓은 시체를 처리하느라 애를 먹고(「레바논의 밤」),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적 병증에 시달려 매일 많은 양의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거나 별 기대 없이 희곡 낭독 모임에 나가며(「오하나의 미래」), 과천 동물원에서 탈출한 로스토프라는 수컷 호랑이를 찾아 헤맨다.(「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의 주체는 자동차 창문 스위치를 검수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정도의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이다. 이 시기에 그는 정적은 물론 가족과 친지와 부모까지 누구 할 것 없이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그리스 비극을 머릿속으로 암송하며 매일매일 끊어질 듯한 숨을 연장한다. 지루함을 참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림으로써 그는 지루함을 견지지 못해 자살할지도 모르는 자신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중이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공장에서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파토스가 가득한 코러스 파트에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리스 비극 외에는 없었다. 신부에게 행하는 종교적 고해성사나 연애, 그리고 문학의 다른 장르들은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지젝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필수 조건이라 말한 바 있다. 그 욕망은 온전히 도달된 완성 형태의 욕망이 아니라, 욕망 상태로 지속 가능해야 한다.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자신의 삶을 추동하게 하는 쾌락이자 지향해야 할 팽창과 수축이 되기 때문이다. 욕망은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목표로써 환상을 필요로 하며 공허라는 실재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압력의 균형이라는 생존전략으로 ‘눈감아버림’을 선택한 현재의 그들은 무엇인가. 시인 이상의 표현대로라면 치료가 필요한 무병(無病) 상태에 처해 있는 소설 속 주체들은 치료할 방법도 모르고 치료할 의지조차 상실한 채, 죽은 것과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설정 자체를 포기한, 공허라는 실재가 삶에 침투하게 내버려 두는, 소설 속 주체들은, 지젝의 관점대로라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3.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세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소설 「깊」에서 인류에게 ‘압력의 팽창’이라는 놀잇감을 던져준 신은 인류가 다시 권태에 빠질 때쯤 ‘압력의 수축’이라는 새로운 놀잇감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생의 의지를 지속하게 한다. 수축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침묵의 우주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도달점이라고 생각했던 심해 19251미터는 끝이 아니었고 심해 19251미터 지점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끝없는 구멍으로서의 새로운 지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 도달한 디퍼들은 살아서 그들의 창조자인 어머니 얀에게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그녀와 연결된 탯줄을 끊고 심연의 구멍으로 돌진해 죽음을 선택한다. 심해 19251미터의 수축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켜 신의 자리를 넘봤던 얀은 결국 인간의 어머니로 남게 된다.

 죽음이 난무하는 그리스 비극을 암기하면서 삶을 연명했던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의 주체는 자신이 외우는 그리스 비극들이 ‘우정희’라는 사람이 번역한 텍스트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간다. 평생을 방 안에 틀어박혀 로마 신화와 그리스 비극을 번역한 그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병들고 지쳐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불행한 모습을 하고 있는 노인 ‘우정희’가 그 두려움의 공포를 잠깐이나마 잊고 지난한 삶을 견디는 방법은 그저 자신의 일인 ‘번역’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정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차장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다가 불연 듯 얼마 전에 있었던 자신의 할아버지의 죽음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자살’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 자각 이후에 그는 사방이 꽉 막힌 자동차 창문 스위치를 검수하는 작업공간으로 돌아와 침묵을 지킨 채 하루 종일 검수 스위치만 딸깍거린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외우는 능력을 상실하고 그 지루함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심해 19251미터의 수축의 우주에 도전하는 행위,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암송하며 지루함을 버티는 행위, 또한 일류대를 나온 ‘우정희’가 평생에 걸쳐 몰두했던 번역이라는 작업도, 결국은 삶이라는 지난한 시간을 버티기 위한 일시적인 ‘똥 누기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 주체들은 반복적인 ‘똥 누기 게임’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계에서 남는 것은 결국 곤궁과 권태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연’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최근의 젊은 소설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상의 수필 「권태」와 변별되는 지점을 생성한다.  


 이상은 다르지 않을 내일에 오들오들 떨었지만 나는 내일이 달라질까 오들오들 떨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어둠 속에서 (박사랑, 「#권태_이상」)     

 

 차이만 남은 세계에서 압력의 균형으로 ‘눈감아버림’을 선택했으니, 어둠과 함께 하는 것 말고 달리 도리가 있을 리 없다. 세계는 온통 ‘거리 감각’이라는 아이러니로 가득 채워지게 되고 그것은 세계, 그리고 타자를 무차별적인 사물로 인식하게 한다. 타자로의 ‘향해 있음’과 ‘기울어짐’ 자체가 없어진 세계에서 ‘외존’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고 결국은 모두가 공평한 개별자로 남게 됨으로써 세계는 정지 상태와 다름없이 된다. 이것이 차이 혹은 단독성만 남게 된 지루한 세계가 지닌 역설이다.

 공평한 개별자들에게는 미래란 오지 않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현재만이 반복된다. 그러나 현재만이 반복되는 정지된 상태로서의 권태를 느끼게 하는 시간은 엄밀히 말해 “순간”이 없다. 순간의 의미를 포착하려면 매시간 깨어있는 활력과 지향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순간의 분절이 없는 권태의 시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로 한 덩어리로 흘러간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오후가 되어 있고 또 자고 나면 저녁이 되는”식이고 “물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물이 느리게”(「하나의 미래」, 정영수) 움직인다. “하루며 이틀이며 사흘이며 나흘”(「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정영수)의 단위로 통째로 흘러간다.

 이러한 미래의 단조로운 지속에 대한 느낌은 한편으로 “죽음의 망각” 때문에 비롯된다.(구연상, 「권태의 현상학」, <<철학과 현상학 연구>>(20), 2003. 5, p.209쪽.) “죽음의 망각”은 공간과 재화라는 유형의 영역을 상품화한 데서 시작된 자본의 영향력이 인간의 체험, 그리고 문화라는 무형의 영역까지 장악한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의료적인 죽음이 일반화되면서 문화로서의 장례의식은 병원 장례식에서 상조 회사에 의해 대행된다. 고유하게 잘 죽고 싶어도 죽음에 대한 무지와 망각을 강요받는 시스템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기 쉽지 않다.

 죽음에 대한 망각은 삶과 함께하는 죽음을 거세하고 “삶의 유한성”을 회피하게끔 만든다. 오늘 같은 현재가 계속 반복되리라는 권태감은 역설적으로 죽음에는 내일이 없다는 유한성을 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현대 사회의 죽음에 대한 망각의 강요는 다리가 무너진 사고 이후 사망자들을 위한 ‘위령비’는 재건된 다리에서 가능한 한 먼 곳에 세우고, 붕괴된 백화점의 추모 공간 역시 사고가 발생한 백화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되는 것(「좋은 사람」, 임현)으로 소설 속에서 구체화된다.

 정녕, 우리는 공허가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한 현상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현실과 허구의 차이가 없어진 현대는 욕망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허구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는 것’과 ‘눈멀어버림’의 차이가 없다면 거기에서 ‘눈멀어버림’ 말고 다른 선택은 무엇일까. 그렇다고 다시 거대한 팽창이나 수축으로, 달리 말하면 ‘보는 것’ 혹은 ‘볼 줄 아는 것’에 대한 지향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그 이후의 주체들이고 ‘차이’ 혹은 ‘단독성’만 남은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단어와 ‘이제, 어디로?’라는 질문을 포기했을 때, ‘눈멀어버림’ 외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4. ‘이제, 어디로?’라는 질문 대신 할 수 있는 것       

 

 이 글의 서두에서, 우리는 그리고 소설 속 주체들은 생존을 위한 압력의 균형으로 ‘거리감각’과 “無事한世上이라는病院”을 선택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無事한世上이라는 ‘정상성’은 실은 온갖 환자로 넘쳐나는 병원일 수 있다. 이러한 시인 이상의 “치료(治療)를 기다리는 무병(無病)”이라는 아이러니적 진술은 시적 주체가 혼자 스스로에게 갇혀 무감각해지고 평온 가운데 잠잠한 상태를 지향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언술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병(無病)인 상태는 치료가 필요한, 실제로는 병(病)적인 상태라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소설 「인간적인 말」(정영수)에는 이혼을 앞둔 부부가 등장한다. 그들은 윤리적 가치관과 정치적 견해 차이로 대립했고, 신앙이 없었음에도 종교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다툰다.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양가 부모님, 친구들, 심리상담가라는 타자들을 끌어들였지만 최종적으로 드물게도 그들이 합의한 결론은 이혼 전문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이 부부는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겠어, 일절 대화를 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날 일도 없잖아.”라고 말하며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말(언어)이란 모든 문제의 원인임과 동시에 해법이었기 때문에 결국 겉으로 보이는 ‘정상성’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이런 방식으로 부부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잃는 방식으로 공존’ 하거나 ‘우리라는 구성 요소를 유지하면서 공동체가 파멸’해 가는 것을 지켜보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데, 우선은 결정의 시간을 유보하기 위해 전자를 선택한다.

 그런데 말이 너무 많아 문제여서, 처세로서의 ‘거짓 침묵’을 선택한 이 부부는 서술자인 남편의 이모가 안락사를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유산을 남기는 상황을 접하고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진짜 침묵’에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모의 안락사’라는 사건은 그들 부부가 그토록 많은 말을 해왔지만 그들은 실재적인 것, 그들과 직접 연관이 있는 구체성을 지닌 대화 주제에는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문제적 상황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이 부부는 관념적인 것, 그들과 먼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구체적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현실에서 선택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를 직면해야 하는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관념적인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더 편하다.  

 로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애라는 단어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하는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을 돕는 도덕성의 범주는 상대가 나와 비슷한 도덕성과 이성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공감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정서의 경계 범위가 ‘우리’라는 범주를 어디까지 설정하고 있느냐라는 매우 솔직하고 현실적인 가치관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설 「인간적인 말」 속의 부부는, 우주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며칠이고 떠들 수 있지만 이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또 사형 제도에 대해서는 며칠이고 논쟁을 이어갈 수 있지만 이모가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쉽게 열지 못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스위스로 떠나는 이모가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어색한 상황이 되는 것처럼, 안락사를 돕는 의사가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에 들어서는 이모를 배웅하며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그동안 고마웠다고 잘 가시라고 인사말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가 된다. 이모라는 가까운 사람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은 박민규의 「깊」에서 인류가 안락사를 자살의 툴로 제도로 정착했다는 서술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그 부부는 말하는 법을 상실한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침묵한 채 기다릴 수밖에 없고, 또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되었을 때의 ‘침묵’과 ‘무위’의 자세이다. 대체로 공허하고 무심한 정영수의 소설들이지만 이 지점에서는 그나마 따뜻한 기미를 엿볼 수 있다.

 정리를 해보자. ‘이제 어디로?’라는 질문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시대와 역사의 영향에서 벗어난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로티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앞서 말한 공허라는 실재를 일상으로 들여온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라는 과감한 결론을 수정한다. 인간에 대한 서술은 오로지 재서술에 대한 재서술이 있을 뿐, 본질적인 진리는 없다는 로티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인 이상은 “치료(治療)를 기다리는 무병(無病)”이 병적인 상태라는 문제제기를 했지만 공허라는 무병(無病)은 그것이 현대성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거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다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세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들 부부처럼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가까운 사람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일과 같은 문제적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본질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발생한다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구체적 상황’에서 방해를 받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심해 19251미터를 향해 엄청난 수축을 견뎌야 하는 새로운 인류인 디퍼처럼 공허라는 실재와 함께 하며 “죽지도 살지도 않는” 우리는 이미 신인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찮지만 또 대단하다. ‘거리감각’과 ‘침묵’이 대세라면 이에 편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단 ‘침묵’의 질을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세계와 타자에 대한 일반적인 ‘거리감각’을 두기 위한 도구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모를 보며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배려로서의 ‘침묵’으로 말이다. 이것은 차이만 남은 지루한 질 나쁜 세상을 아주 천천히 바꾸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무위(無爲)의 침묵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무는 ‘치유적 피로’(한병철, 김태환 역,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2, p.81쪽.)로 일상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에서 언급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이상, <<날개·권태 외>>, 하서출판사, 1999. 박민규, 「깊」, <<황순원문학상 수상 작품집>>, 중앙일보·중앙books, 2007. 박사랑, 「#권태_이상」, <<창작과 비평>>44(2), 2016.06 손보미, 「임시교사」, 「대관람차」,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문학과지성사, 2018. 임현, 「그 무언가의 끝」, 「좋은 사람」, <<그 개와 같은 말>>, 현대문학, 2017. 정영수, 「레바논의 밤」, 「하나의 미래」, 「여름의 궤적」,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 <<애호가들>>, 창비, 2017. 정영수, 「인간적인 말」, <<제 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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