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끄라비>>는 「끄라비」를 비롯해 「아르판」, 「무한의 흰 벽」, 「티마이오스」, 「Q·E·D」, 「맥락의 유령」, 「어떤 고요」까지 총 7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아르판」과 「티마이오스」에는 와카족의 소설가 아르판과 가온의 이야기꾼 초아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설가의 운명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끄라비>> 뒷부분에 있는 평론 글에서 알 수 있듯, 박형서가 창작한 각각의 작품들 속에 소설가 박형서가 직접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절 문제를 다뤘다고도 언급되는 「아르판」에 그의 작품인 『자정의 픽션』을 언급하면서 현실과 허구를 왕복하며 소설에 대한 소설, 즉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고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아마도 소설가로서 그의 고백으로도 읽힐 수 있다. “등단하기 전부터 나는 나 자신이 잘 쓰는 작가가 아니라 다르게 쓰는 작가라 생각해왔고, 그게 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어떤 고요」, 269쪽)
2. 첫 번째 단상 - 여행.
다르게 쓰고자 하는 소설가 박형서의 의도는 사소하게 ‘끄라비’라는 해외 소재지에서부터 드러난다. 태국 여행하면 흔히들 방콕과 푸켓을 선호하지 끄라비는 태국여행에서 일 순위가 되는 장소는 아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은 풍경, 레포츠, 휴식 등 제각각이겠지만 해외여행은 움직이는 시간 대비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 가성비를 따지기 마련이다. 비수기에 항공권을 사기 위해 수많은 여행 사이트와 앱을 들락거리며 가격 조사를 하고 각종 나라에 대한 여행 정보를 알기 위해 카페에 가입한다. 사람들은 카드 포인트를 모아 조금이라도 싸게 호텔을 예약하려 애쓰고 그 호텔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프로모션은 무엇인지 검색하고 묻고 또 물어서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방문하는 곳곳마다 내가 왔다는 증거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작가는 소설 도입부에서 끄라비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들을 전체 분량의 거의 4분의 1에 걸쳐 서술한다. 대중적이지 않은 지명이기도 하기에 그곳은 마치 비현실적인 이국적 공간으로 다가온다. 또한 끄라비는 신의 섭리로 빚어진 매끈하고 아름다운 자연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뚝 떨어진 기이한 공간으로 서술된다. 주인공은 그 공간에서 핏줄을 따라 번져오는 듯한 열대의 친근한 기운을 느낀다. 마주치는 모든 풍경과 사람들은 나와 친화력을 가지며 온기를 나눌 수 있다. 마치 만물에 대해 친화력을 지닐 수 있는 유아기처럼.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친화력과 온기를 끄라비는 가지고 있었다. 주인공은 처음으로 끄라비를 방문했던 엿새 동안 전에 느끼지 못했던 평화를 누린다. 그래서 끄라비를 떠나는 날에는 몸에 충분한 기운이 자라나 다음 목적지가 어디든 쉽게 적응할 것 같은 에너지를 얻어 귀국하게 된다. 끄라비를 방문한 후 얻게 되는 충만감은 첫 번째 연애 실패 후 혼자 다시 방문했을 때에도 지속된다.
그에게 있어 끄라비 여행은 “나태에 가까운 평화가 내 하루를 먹고 이틀을 먹고 일주일을 먹는 걸 보고만 있었더니 종내는 보름까지 먹어치우는” 소진만을 행해도 아무런 해가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행위는 침묵에 가까우며 감각이나 욕망은 목적을 갖지 않는다. 어둡고 적막하지만 두렵지 않은 곳.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곳. 또 한 번의 끄라비 여행으로 그는 그의 마음 어느 여린 부분을 치유하고 다시 현실로 떠날 힘을 얻는 듯 보였다.
3. 두 번째 단상 - 기억.
불현듯 한 소설가의 문장이 떠올랐다. “어떤 날 어떤 일을 기록하기 위해선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이 필요하다고. 그것도 냉장고의 얼음이 아니라 북빙양(北氷洋) 깊숙이 천만년 침묵과 한기로써 동결된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라야 한다고.” 기억의 부패를 막기 위해 그렇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리 심혈을 기울여 기록할 의지나 능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문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기억이란 부패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부패에 부패를 거듭하도록 내버려 두면 온전히 분해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스스로 자정작용을 통해 텅 빈 공간이 되도록 놔두는 것. 작가도 기억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그게 전부였다. 매번 새로운 감각이 밀려와 전의 감각을 덮었지만 돌이켜보면 기억은 그처럼 단순하게 뭉뚱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기억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착각이다.”
소설 속 나는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첫 번째 연애를 경험한다. 서로가 공유했던 연애에 대한 기억이 실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 학교에서 겉도는 것 같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시작했던 관계가 무르익어 사랑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 그러나 실상 그녀는 나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는데 미안해서 그 호의를 받아주다 보니 결국 연애로 귀결되었다는 고백. 그는 관계가 진행되면서 발생했던 수많은 밀고 당김의 감정과 기억들이 실상 사랑이 아니라 부담스러워하는 그녀의 감정과 기억들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변심하게 된다. 물론 습관이 된 관계에 익숙해진 그녀는 그의 변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감정과 기억의 공유가 사랑이라면 애초에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어떤 면에서 각자의 의식 속에서 절대 고립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지내도 서로 다른 개인들의 기억들을 융합할 수는 없다.
그래서 5년을 함께 만난 두 번째 그녀와의 연애가 권태로워졌을 때, 관계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마지막 돌파구로서 또다시 끄라비로 향했을 때, 그 결과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끄라비를 그녀와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기억에 대한 고립성은 비단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연애 실패에 이어 이 년간의 결혼 생활이 파탄 난 이후 다시 찾은 끄라비와의 기억 역시 각자의 우주 속에만 존재하는 다른 세계들이었다. 열대나무와 길가의 돌멩이, 한때 체온을 나눴던 그 관계의 징표들은 모두 변해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두운 도로변에 앉아 어느 단절된 과거를 그리며 마시고 모두 게워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억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마음이 헛헛해질 정도로 슬픈 감정들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젖은 공기가 별 의미 없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온기라고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흘러버린 건 시간보다는 마음일 것이다.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잊었기 때문에 나는 서러웠다.”
4. 세 번째 단상 - 초월.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현실’과 ‘현실 너머’라는 두 세계에 산다. 현실을 초월해보고자 현실 밖을 상상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아마도 결핍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현실의 결핍을 어떻게든 초월해보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으며 이것이 곧 소설을 쓰고자 하는 욕망 자체이기도 하다.
소설 속 나는 꿈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끄라비의 밀림 속에서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존재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꿈에서 어머니를 본 순간에조차 마냥 반가운 마음만 있지는 않다. 어머니가 없다는 상실감이 주는 유년시절의 결핍은 현재에 어머니가 존재하게 된다 해서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핍은 모성 외에 다른 측면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에 관한 것이다. 끄라비에서 끄라비의 숨소리를 듣던 날 나는 그 숨소리보다 더 작게 바깥 세계에 두고 온 고단한 감정들을 늘어놓으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그 막막함을 더 부풀리려는 자신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종종 나에 대해 말을 하면 할수록 왜곡되고 진정한 나 자신과는 멀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가 가진 결핍이기도 한데 이 결핍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힘든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문학의 본질이 있다. 일상의 언어가 가진 결핍을 초월해보고자 하는 욕망. 내 속에 있는 진짜 감정의 언어를 복원해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욕망. 사람들보다는 끄라비와 같은 자연, 혹은 동물(고양이)과 교감을 선호하는 행위는 달리 보면 그가 매우 외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통해서는 근본적으로 교감하기 어려운 사람들, 그렇기에 차라리 혼자 있기를 택하는 사람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소설 속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먼 인도차이나 반도에 내 마음과 공명하는 어떤 인간적인 의지가 도시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버스를 타며 버스가 지나온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반투명한 정념 한 줄기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끄라비와 교감했었다. 그래서 그는 오토바이에 앉아 기쁨과 슬픔이 중첩된 끄라비의 거리를 달린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조바심을 느끼며 그는 자신에게 친밀감을 주었던 예전의 끄라비를 끌어내야만 했다. 그것은 다시 세상에 대한 친화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절실한 몸부림이다. 그래야만 그의 고독이, 외로움이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초월한다. 대기가 열어주는 몸의 세포들 사이로 뛰어든다. 그는 오토바이에 탄 채 땅으로 내동댕이쳐지고 크게 다치며 피를 흘린다. 그 손상된 육체는 ‘죽음’을 향함으로써 끄라비와 한 몸이 된다. 그가 원하는 고독의 소거, 온전한 교감은 아마도 ‘죽음’ 그 순간에만 가능할 것이다. 여행의 ‘떠남’이 설레는 건 그 이면에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떠남’이 영원으로 남기도 한다. 끄라비와 한 몸이 된 그처럼.
5. 나오며
박형서의 「끄라비」를 읽고 떠오른 세 개의 단상들 가운데 좀 더 내 안에 다가온 주제는 ‘기억’에 대한 것이었다. 교감을 나눈 상대와 함께 했던 추억과 장소는 단순한 사건과 지명일 수 없다. 시간이 지나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제아무리 희석된다 해도 감각으로 새겨진 그 흐릿한 서정과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 희미한 흔적에 대한 끄나풀이라도 붙잡고자 하는 절실함이 박형서의 소설에서 느껴졌다. 나 역시 이미 추억이 되어 흐릿해졌지만 결코 잊지 못하는, 잊고 싶지 않은 기억과 장소가 있다. 그 기억이 온전히 지워질까 어느 시점 이후 절대로 가지 못하는 장소이다. 내가 그 장소에 다시 갈 수 있을 때는 아마도 그 기억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는 어떤 날이 될 것이다.
‘기억’에 대한 단상은 어쩌면 「끄라비」를 읽는 핵심 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소설의 곁다리에 있는 스쳐가는 일부분에 불과할지라도 그 ‘스쳐 지나감’이 내 안의 문학적 ‘영원성’이나 ‘감성’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