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우혜우 Dec 30. 2021

공상이 가진 힘-삶을 지속하는 한 가지 방법

양치승에서 코리까지 앨리스 먼로, <<디어라이프>>, 문학동네, 2013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에 헬스 트레이너이자 방송인인 양치승이 나와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을 접했다. 그는 그 시절이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게임이 아닐까 이 게임이 끝나면 더 나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지옥 같은 일상을 견뎠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오은영 박사는 "가정 폭력이 현실이라고 느끼면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이 현실이 게임이라는 "공상"으로 공포스러운 시간을 버텨낸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공상 혹은 상상력으로 열악한 현실을 뛰어넘는 긍정적인 인물을 몇몇 더 알고 있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빨강 머리 앤이다. 입양과 파양으로 앤의 깊숙한 내면은 외로움과 슬픔으로 가득했을 텐데 상상으로나마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현실을 벗어나 위안을 삼으며 일상의 모든 것을 찬란하게 변화시켰던 앤.



 

 앤을 처음 만나는 누군가는 그녀를 다소 허황되고 엉뚱한 사람으로 보겠지만 자주 만나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녀의 솔직함과 엉뚱함에 익숙해지면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빨강 머리가 항상 콤플렉스여서 마릴라에게 어른이 되면 이 머리 색깔이 다른 색이 되지 않을까요? 묻기도 했는데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마릴라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희망이 또 하나 사라졌네요. '내 인생은 희망을 묻는 묘지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 나온 말인데, 전 실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로 절 위로해요." "그게, 아주 멋지고 낭만적으로 들리잖아요. 제가 꼭 책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요. 전 낭만적인 게 정말 좋아요. 그리고 희망이 가득 묻힌 묘지라니,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말 중에 최고로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런 묘지가 있다니, 전 오히려 기뻐요."


 이렇듯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앤의 모습은 우리를 흐뭇하게 한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좌절하고 누구는 스스로 위로를 하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이유로 빨강머리 앤은 지금까지도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린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라는 노래가사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만화영화로 두고두고 되새겨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 정작 내가 말하고 싶었던 주인공은 헬스 트레이너 양치승도 빨강머리 앤도 아닌 코리다. 코리는 20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디어라이프>>의 단편소설 <코리>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부잣집 외동딸이지만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보지 못한 여자이다. 그런 그녀가 유부남인 하워드와 사랑에 빠져 몇 년간 연인관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십수 년 간 자신의 돈을 갈취한 사람이 릴리언이 아니라 자신의 연인인 하워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아주 잠깐, 방황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옷을 입고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이 새로운 사실을 가구들에게 전한다. 그 순간에 그녀는 어디에나 구멍이 있다고 느낀다. 특히 그녀의 가슴에 생긴 구멍은 차마 말로 형상화하기 민망할 정도로 비참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침대로 돌아오고 다시 처음부터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해야겠다며 자신을 다독인다. 이 짧은 순간의 장면에서 나는 불행을 견디는 삶의 긍정성을 읽었다. 상상력의 힘,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적 상상력의 효능. 이러한 장면은 「코리」가 실린 『디어라이프』 속 여러 단편 곳곳에 나타난다. 자전적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디어 라이프」에서 그녀의 부모가 전 재산을 투자한 모피 사업이 망해갈 때, 모피를 위해 길렀던 많은 동물들이 죽어갈 때도 그녀는 『빨강머리 앤』이나 『은색 덤불숲의 팻』에서 영감을 받았던 장면을 상상해낸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샘물은 목초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말들과 한 마리뿐인 소에게 물을 공급했고 앨리스 먼로 그녀도 머그컵을 챙겨가 물을 마셨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녀는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가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파킨슨 병에 걸리는 악재가 겹쳐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마 당시의 그녀는 「자갈」에 나오는 닐의 말을 자신에게 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라구.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

 

 그렇기에 하워드와의 사랑도 온전히 거짓은 아니라 생각된다. 사실, 그 사랑이 거짓이었는지 진실이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돈 많은 당돌하고 버릇없는 처녀라 생각했던 그녀가 불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순간에 하워드가 느꼈을 법한 인간적인 연민은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잠자리에서 그녀의 다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떤 다른 부분보다 매력적으로 느꼈던 처음의 설렘도 그 찰나만큼은 진정성이 있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둘은 상상력을 요하는 자극은 전혀 없는 관습적인 섹스를 지속하며 심지어는 그러한 무자극을 기뻐하기까지 한다. 그건 아마도 코리에게는 변함없는 관계에 환상이고 하워드에게는 자신의 가족에게 여가와 여유를 주는 코리의 돈이라는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나타난 일시적 행복이었다. 환상은 그 시기가 언제냐의 문제일 뿐 결국 깨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코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코리는 불륜이라 불리는 하워드와의 사랑에서 얻었던 다른 반작용, 오래된 사랑에 지워진 무거운 짐, 적어도 그 토할 것 같은 그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니다. 이런 의미부여나 해석도 필요 없다. 그녀는 그냥 내버려 둘 줄 안다. 이는 「디어 라이프」 마지막 문장들과도 의미를 함께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코리도 역시 그럴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끄라비>>에 대한 몇 가지 단상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