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다소 무거운 소재의 영화를 봤다. 하지만 담담하게 '인생 뭐 별거 있어..'라는 식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소외된 삶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과 삶을 마감하는 모습까지.. 삶의 외로움에 대해서 들여다보고 인생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제목은 '죽여주는 여자', 주연으로 윤여정, 전무송이 나온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 연령대가 높은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기에, 반갑기도 하고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었다.
줄거리
종로에서 박카스 할머니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는 소영. 그녀는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소문난 여성이다. 트랜스젠더 집주인에게 셋방을 얻어 살며, 장애를 갖고 있는 청년과 이웃주민이기도 하다. 그녀는 성병 치료로 방문한 병원에서 코피노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무작정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필리핀 여성이 폭행 가해자로 감옥에 있을 때 아이를 보살피며, 일이 힘든 시기에 자신에게 잘해주던 단골손님들의 소식을 묻다가 친구로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저마다의 사정으로 그녀에게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기억에 남는 대사
날씨가 참 좋네요. 앞으로 우리가 이런 가을날을 몇 번이나 맞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건지.. 어..
사람들은 진실에 다 관심 없어. 다 지 듣고 싶은 얘기나 듣지.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그냥 다들 거죽만 보고 대충 지껄이는 거지.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코피노와 미혼모, 노인,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장애 등 당사자나 주변 인물이 아니면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삶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인 죽음까지도 드러내며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허를 찌르듯 보여주고 있다. 성을 팔고 사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소외계층과 연결시켜 일생의 삶과 죽음과 관련된 노인문제까지 다뤘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제목만 보고, 겉모습만 본다면 절대 보기 싫은 영화겠지만 자세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일 것이다.
소영은 자신의 삶을 무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내고 있지만 상처와 아픔, 자책감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코피노를 무작정 집에 데려온 그녀는 "그래야 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자신이 키우지 못하고 시설에 보냈던 아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생판 모르는 아이지만, 어떤 사정인지 뻔히 알게 된 상황에서 그 아이만큼은 시설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선택에 대한 후회가 낳은 자기 위안, 대리만족일 수도 있겠지.
그녀는 같은 주택에 사는 트랜스젠더 집주인과 장애를 가진 청년과 나름 평범한 삶처럼 웃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떳떳하게 살아간다. 무덤덤하게 인터뷰를 이어나가는 장면에서는 평생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소외된 삶을 그린 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들과 현재 가진 직업만 다를 뿐,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 남편은 기술자로 일하고 있지만 노년이 됐을 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는 현재 주부지만 갈수록 높아져가는 생활비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야 할 것만 같다. 현재는 그럭저럭 살고 있다 하더라도 넉넉한 노후자금이 없다면 100세 시대에 노년층이 되더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세대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괜찮다 할지라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 성 소수자는 현재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없다는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렇듯 당장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녀가 동두천에서 알고 지낸 동생 전복희가 어느 누군가를 만나 풍요롭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사람 일은 알 수 없고, 도훈처럼 다쳐서 장애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삶이듯, 그들와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모두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같은 나이대 여성들이 삼삼오오 웃고 떠들며 지나갈 때 홀로 외로이 길을 걸었다. 평범한 삶이란 그런 거겠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공원 나들이를 가면 꽃 구경하러 나온 중년 여성들이다. 반면 이렇게 홀로 외로이 길을 걷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여기서도 그녀와 평범한 삶의 모습이 달라 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혼모로 생계유지를 위해 아이를 시설로 보내고 평생을 혼자 힘겹게 벌어먹고살며 살았으며 자식이 잘 살아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결국 가족으로써는 혼자인 셈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노년을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재우(전무송)처럼 자식을 일찍 잃고, 아내마저 죽어서 홀로 외로이 노년을 살아가는 삶도 있다. 어떤 삶을 살고 있든 죽음의 문턱과 가까워져 갔을 땐 외로움이 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혼한 부부에게 "자식 안 낳으면 노년이 외로워. 그러니깐 자식 낳아."라는 말을 흔히 하기도 하는데, 자식을 낳는다고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나름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비로송 노인 역시 자식들은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에게는 어쩌다 한번 찾아와서 얼굴만 비치며 그의 삶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식이 있어도 함께가 아닌, 괴롭고 외로운 삶이다. 세비로송에게는 자식과 손주보다 그녀가 외로움을 달래주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삶의 친구다.
이렇게 겉모습이 다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다르지만 누구든 가질 수 있는 사회 문제이며 근본적인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질수록 생겨나는 노인문제와 외로움은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닌 같은 사람일 뿐이다. 눈썹 문신한 여성(박승태)이 그녀가 남편이 없다며 무시했던 것처럼 사정이 다르다고 무시할 필요도 없으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영화에서는 코피노와 관련된 허를 찌르는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지만 힘든 일을 직접 겪거나 주변에 일어난 자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회에서 약한 자들인 경우가 많다. 지켜보게 되는 사람들은 평범한 서민들이다. 이런 사회문제는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같은 이미지로 만들어버린다. 법이 약한 자를 도와야 해결될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 이렇게 영화로써 사회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주는 것 또한 약한 자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