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제 Mar 06. 2023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아니, 바보 같은 마츠코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한번 시작하는 거야.



2007년 개봉했던 코미디, 뮤지컬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다시 한번 보게 됐다. 워낙 감명 깊게 보기도 했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해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장면들이 마치 동화, 만화처럼 극단적으로 나와서 코믹한 느낌을 주지만, 그 안으로 파고들면 내용들이 절대 코믹하지는 않다.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도 하며 자신의 삶을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전환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은 소설이며, 영화에서 주연배우는 나카타니 미키이다. 이 배우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제80회 키네마준보 베스트 10 여우주연상, 제31회 호우치영화상 여우주연상, 제30회 일본아카데미영화상 여우주연상 등 여러 상을 휩쓸었다.





줄거리


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고 있던 쇼는 아버지로부터 고모 마츠코가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연락을 받는다. 쇼는 그녀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마츠코의 일생을 접하게 된다.​

마츠코는 공부를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며, 성격도 착했지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컸다. 그녀는 교사가 되고 평탄한 삶을 살아가다 제자가 일으킨 절도 사건에 누명이 씌어 해고당하게 된다. 그 후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기억에 남는 대사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한번 시작하는 거야.

그 순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반년 후 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사는 게 시시한 건 내가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말만 하고 나 자신은 아무 행동도 안 해서야.​


집으로 돌아가자.





카와지리 마츠코의 일생은 정말이지 다시 봐도 파란만장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밝고 명랑한 소녀였지만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보다 컸다. 아픈 여동생이 있어서 아버지의 관심은 온통 아픈 막내딸에게 쏠렸었고,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곤 했다. 이 행동은 성인이 되서까지 습관처럼 이어지게 됐고 당황하게 되면 이상한 표정을 짓게 돼 주변에서 반감을 샀다. 그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을 더욱더 미워하게 된다. 자신이 그 표정을 습관처럼 짓게 된 이유가 동생에게 쏠린 아버지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습관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녀 정도면 거의 틱 장애 수준이었다.

이 부분은 너무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 가족 구성원으로서 받은 사랑이 얼마나 성격과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기도 하는 내용이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어느 누군가는 사랑만을 위해, 어느 누군가는 돈만을 위해, 어느 누군가는 가족만을 위해, 그렇게 되기까지 어린 시절 자아 형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도 '나에게 산다는 건 뭘까?' 하며 나 자신과 마주 보게 됐다.




영화에서는 독특하게 그녀의 일생을 연도와 그녀의 나이를 표기하며 보여준다. 살아보니 세월이 참 빨라서 금방 나이를 먹던데, 그녀의 삶은 너무 파란만장해서 이 짧은 세월 동안 어떻게 이런 사건들을 마주할 수 있었는지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녀는 사랑만을 위해서 살았다. 작가지망생 야메가와의 동거 생활에서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지만 사랑받고 싶고,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그 고통을 참으며 곁에 머문다. 야메가는 자신 때문에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껴서 자살을 하고, 야메가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는 유부남 오카노는 그녀를 사랑하는 척 만남을 갖고, 아내에게 들키자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매몰차게 버리고, 그렇게 그녀는 창녀가 된다. 차라리 창녀로 원탑을 찍고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또다시 기둥서방 오노데라에게 배신당해서 분노로 살해하고, 그 후 도쿄에서 만난 이발사 시마즈와 만나 행복한 듯했지만 체포된다. 형무소행을 끝마치고 이발소로 돌아갔을 때 시마즈는 이미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있다. 당연하다.. 8년 만이니까. 그리고 그녀가 시마즈와 살았던 세월은 고작 1개월뿐이고,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채 감옥에 들어갔으니까. 마지막에 절도를 일으켰던 학생 류를 다시 만나 사랑에 마지막을 내걸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집착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만 들면 자신의 인생을 걸어버리는 그녀는 사랑을 정말 알긴 아는 걸까.. 차라리 그녀의 친구 메구미가 보여주는 모습이 사랑이었다. 꼭 이성 간의 사랑만 사랑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비관했고, 메구미와 자신의 처지가 비교돼서 그 우정을 괴로워한다.

"비슷하게 보여도 사와무라 씨에겐 남편이 있고 살아갈 목표도 있고 하지만 고모는 외톨이고 애인도 가족도 아무도 없고.."

​​

나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나의 인생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나를 멀리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내가 다른 이의 인생을 휘두를 수 없으니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며 나의 인생에만 집중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게 되기까지 나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도 하곤 했었다. 나는 나대로 나의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세월이 흘러있고, 그리고 또다시 연락해 보면 조금 더 상황이 바뀌어있기도 하고 그렇더라. 때론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비록 산다는 것을 이성과의 사랑에 올인했다고 해도 말이다. 살아보면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어린 자아의 상처로 인해 생긴 삶의 의미는 미성숙하고 섣부른 판단을 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비교'와 '비관'이지. 현실적인 처지는 아니다. 삶의 가치관이 오로지 사랑, 사랑받는 것이었기에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런 삶의 의미는 다시 바로잡기만 하면 그만이다. 나는 그녀가 남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에서 그녀는 참 안타까웠다.

그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죄책감도 있었을 테고, 남동생의 이제 앞으로 오지 말라는 말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어린 자아에 상처를 받은 이는 성인이 됐어도 그 작은 한마디 말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오지 말라는 말은 가시로 박혔을 것 같다. 남동생은 그녀의 삶을 시시하고 형편없게 바라보고 있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고향과 비슷하게 생긴 강가 근처에 초라한 아파트에서 마지막까지 살았고, 고향의 강은 아니지만 비슷한 강을 바라보며 슬퍼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돌아간다.



류는 그녀를 신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신이 아닌 상처받은 어린 자아가 보였다. 그래서 사랑에 매달리는 미성숙한 모습이 있었고, 사랑받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은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는 결심 해놓고 왜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가.. 이 부분도 참 안타까운 부분이다. ​정신과에는 못된 사람이 아닌, 착한 사람들만 오게 된다고 하는 말도 있던데 공감되기도 했다. 더럽게 살고 있는 그녀의 망가진 모습만 보면 주변에 피해만 주는 사람이지만, 삶 전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녀는 친절했지만 그녀가 만난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만약 상처받은 어린 자아가 존재하더라도 그녀를 진정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순수해 보이는 그녀.. 사랑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순수했기에 그렇게 보이나 보다. "그 사람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갈 거야. 그게 내 행복이야"라고 말하는 그녀는 행복의 정의가 자신을 해치게 만든다. 행복한 사람들은 힘든 일이 몰려와도 서로 기대며 웃는다. 하지만 그녀는 울고 괴로워하며 또 웃다가.. 그게 자신의 행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정말 진정한 행복일까, 사랑과 행복은 자신을 갉아먹지 않는다. 성장하게 만든다. 힘들어하면서도 그게 행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상처받은 자아로 생긴 어설픈 합리화일 뿐이다. 그저 혼자인 것이 외롭고 쓸쓸해서 곁에 누군가 있어주기만을 바랬던 걸 지도 모르겠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이를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더라. 그래야만,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부디 하늘에서는 그녀가 가족의 곁에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는 의견에 대한 내 생각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것도 자존감이 많이 결여된 상태라 그렇기도 하죠. 마츠코에게 못된 행동들을 했던 그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자신과 잘 맞는 상대를 알아볼 수 있고, 서로에게 시너지를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 바라는 행복은 상대방을 지치게 만듭니다. 반대입장에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이를 보면 자기 자신이 못된 사람이 된 것 같고, 나로 인해 상대가 불행하고, 그러다 보잘것없는 것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형편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자괴감을 느끼겠죠. 그들 또한 괴로우니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 질 테고요. 마츠코는 상대방들이 왜 떠나는지조차 모릅니다. ​자아존중감이 충만한 사람의 경우 스스로 창출해 내는 행복이 상대방에게도 전해지므로 함께 하는 이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전해지는 느낌이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죠.. 함부로 하기 어렵고, 그들 또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며 발전의 요지가 마련되기도 하니까요. ​사람에 기대서 사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 또한 사랑이니까요. 자기 사랑이요.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모험을 두려워하는 당신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