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마 Nov 10. 2021

믿고 거르는 스타트업 Ⅰ

레이더가 생기다

*제가 이 글과 이전 글에 적어놓는 '스타트업'은 혁신적 산업을 주도하는 스타트업이라기보다는 창업자 스스로 '스타트업'이라고 자칭하는 회사들에 가깝습니다.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숙하고 모자란 회사를 창업자가 셀프 두둔하는 자칭 스타트업에 가까우니 참고해주세요. 


레이더가 생기다


   앞전의 시리즈에서 일명 '스타트업'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난 뒤, 내게 하나의 레이더가 생겼다. 뭔가 좀 쎄하다? 싶은 곳을 거르는 레이더! 언젠가 트위터에서 보았던 짧은 글이 있다.

   

이 짧은 글이 요즘 계속 떠오른다.

   아무튼, 최근 난 다시 프리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가끔 떠오를때마다 슬쩍 잡코리아를 들어가본다. 그리고 집 근처의 구인공고가 올라오면 이력서를 넣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집 근처의 회사들은 '스타트업'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고민해봤더니 간단했다. 우리집은 신도시에 위치해있는데 신도시의 산업지구에는 지식산업센터들이 많다. 그 지식산업센터들은 10평 남짓한 소형 사무실들도 많고 무엇보다 대부분 텅텅 비어있어서 월세가 저렴하다. 그러다보니 새롭게 시작하는 회사들이 몰려오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의 이유는 집근처의 창업지원센터가 바글바글하다. 경기도에서 진행하는 창업지원센터, 여성 창업지원센터, 청년창업지원센터 등등 올라오는 공고들의 대부분이 지식산업센터 혹은 창업지원센터 입점 기업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 업체들은 정부에서 직원 뽑으라고 지원금도 준단다.

   물론 그 회사들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크고, 제대로 굴러가는 스타트업 혹은 이제 스타트업 딱지를 뗄만큼 제법 성장한 회사들도 있다. 문제는 그런 곳은 구인공고가 잘 올라오지 않는 다는 것이겠지? 전설 속의 '스타트업'처럼 수평적 사내문화, 성장 가능성 등이 보이는 진짜 스타트업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설속 스타트업들 말고 걸러야하는 스타트업들의 면접을 다녀오면서 느꼈던 쎄한 느낌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이전의 회사들에서 겪었던 그 빅데이터들을 가지고 생긴 레이더에 대해서 말이다.



그놈의 성과주의


   어제 보았던 따끈따끈한 면접 후기이다. 어제 오전 갑자기 전화가 한통 왔다. 프리로 작업하던 곳의 미팅이 잡혀있어 막 외출을 앞두고 있던 참이라 정신없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을 준다며 오늘 면접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예? 오늘이요?"

  "네 오늘이요. 오늘 오후에 면접 가능하신가요?"

  전화를 받은 여자는 굉장히 나긋나긋하다고 해야할까, 느리다고 해야할까, 답답하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런 목소리로 다짜고짜 당일 면접을 요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내 포트폴리오를 보았는데 웹디자인이 직무가 맞냐, 하려던 업무가 맞냐 등을 물어왔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 근무하고 싶은지도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아, 내가 이력서를 넣은 곳이 아니고 어디서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그냥 연락을 한건가? 근무형태를 왜 나에게 묻지?' 싶었다. 통화를 하는 내내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는데 지금 잘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사람은 직원을 뽑는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죄송한데 혹시 회사명을 좀 알려주시겠어요?"

  무언가 대화가 계속 산으로 가는 느낌이라 듣던 중 회사명을 물었다. 외출을 앞두고 신발을 신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회사명을 듣고는 지원한 공고를 살폈다. 전화 건너의 여자는 내게 공고 속 홈페이지를 보면 브랜드 디자인 스타일을 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공고 어디를 살펴도 홈페이지가 보이지 않았다. 우선 나는 외출을 해야했고 오늘은 면접이 불가하다고 전했다. 내일이나 모레 일정을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맞추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신발을 신고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정리하는데 문득 쎄했다. '이상하다. 쎄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정을 정리해서 문자를 보내달라 요청했지만 문자는 그뒤로 오지 않았고 나 역시 무언가 쎄해 따로 연락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후의 일정을 모두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화가 짧게 울렸다가 끊어졌다. 스팸전화인가 싶어 번호를 살피지 않았는데 곧이어 바로 문자가 왔다.

  'OO씨 혹시 4시에 줌 면접 가능할까요?'

  오전의 그 번호였다. 집에 도착하면 5시쯤이 될 것 같아서 5시에는 가능하다고 답을 보냈는데 그럼 4시 30분에 보잔다. 어지간히 급한가? 싶었다. 아니 그리고 오늘은 불가하다고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결국, '쎄려밟으며' 집으로 돌아와 4시 30분 영상 면접을 시작했다.

  하, 결국 그 쎄한 느낌은 현실이 되었다.

  나와 통화한 여자는 눈치챘겠지만 대표였다. 그녀는 내 포트폴리오를 보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영상 면접을 하면서 급하게 나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있는 눈치였다. 문제는 공유화면으로 나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있었던 것인데 나 이외의 다른 지원자들의 사진과 이름과 나이, 연락처들이 함께 보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지원자들도 내 사진과 이름과 나이, 연락처들을 보았겠지?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는 한참 내 이력서를 읽더니 혹시 인물보정한 사진이나 조금 더 여성스러운 작업물들은 없냐고 물었다. 여기서 삐용삐용 하고 빅데이터가 또 울렸다. 이미 내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보았다고 했었고 나의 작업물들을 다 보았을텐데 굳이 다른 스타일의 디자인이 있냐고 물어온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지원실수이다. 공고만 보고는 디자인 에이전시인줄 알았고 (회사명이 디자인 회사였다) 공고내용만 보고는 웹디자이너를 모집하는 줄 알았기에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회사의 스타일이면 연락을 주겠지' 라고 안일하게 다소 생각없이 지원을 했던 것이다. 알고보니 이곳은 여성의류를 디자인하는 회사였고 자체 브랜드를 만들며 웹디자이너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 실수였다.) 그렇다해도 내 디자인 스타일이 이 회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쯤은 대표도 충분히 알았을텐데? 라고 의문이 들때 쯤 눈치챘다.

  '이 사람 내 포트폴리오도 안봤구나'

  삐용삐용, 또 싸이렌이 울리며 든 생각은 '여기서도 디자이너를 툴러쯤으로 여기겠구나' 였다. 파스스 면접에 대한 의욕이 사라져갔다. 한참 내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대표가 물었다.

  "이것보다 여성스럽고 모던하게 가능하죠?"

  반쯤 영혼이 나가서 '원하신다면 가능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음 좋아요.' 라는 대답과 함께 여자는 내게 근무조건과 회사 복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근무는 탄력근무제라고 했다. (끄덕끄덕. 요즘 스타트업의 기본 조건은 탄력근무제다.) 점심은 공유 주방을 통해 직접 해먹으면 된다고 했다. (식비는 없다는 거군) 회사는 창업지원센터에 위치해있는데 샤워실과 수면실이 있다고 했다. 아주 자랑스럽게! (왜 회사에서 잠을 자고 샤워를 해야하나요?) 그리고 자신의 회사는 무려 4대보험이 가능하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4대보험이 엄청난 복지인 것 마냥 이야기하는 회사는 정말 믿고 걸러야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왜냐면 그 회사는 4대보험 말고는 복지가 없거든. 4대보험 소리를 한 다섯번 하더니 그녀는 아주 뿌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희망연봉이 어떻게 되세요?"

  삐용삐용, 사이렌이 울렸다. 이력서에 분명히 적어놓았는데 연봉도 보지 않고 연락을 했던 것인가?

  "이력서에 적어놓았는데.."

  라고 대답하니 그때서야 뒤적뒤적 또 공유화면으로 나의 이력서를 보고 있었다.

  "아, 여기있네요. 그런데요. XX씨. 아무래도 이 연봉을 바로 주기는 힘들 것 같고 우선 호흡을 맞춰본 뒤에 우리가 잘 맞는지 또 XX씨의 스킬이나 업무진행능력을 확인한 뒤에 맞춰가면 어떨까요?"

  개소리

  "그래서 우선은 xxxx만원으로 하고 그 뒤에 천천히 올려가는 걸로 하는게 어떨까요?"

  내 희망연봉에서 200만원을 깍은 금액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또 덧붙혔다.

  "아 참! 저희는 수습기간이 있어요. 3개월. 3개월은 80%만 지급합니다."

  와우!

  "아, 연봉 조정은 좀 어렵습니다."

  라고 답하자 그녀는 화면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저희가 또 성과금이 있어요!"

  성과금, 성과금이라..

  "성과금이 정해져있나요?"

  "월말에 업무평가를 합니다. 그 업무평가를 토대로 성과금이 지급됩니다"

  "지급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금액이 정해져있나요?"

  "기준표가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지급이 됩니다. 저희는 성과주의라 XX씨께서 성과를 보여주신 만큼 보답합니다."

  그놈의 성과주의! 그러니까 그 성과를 누가 평가하는지, 기준이 뭔지, 평가한 성과의 금액이 어떻게 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오로지 성과를 보여달란다. 이런식의 발언은 지긋지긋했다. 그냥 얼마인지, 어떻게 평가되는지 이야기해주면 될 걸 계속 빙글빙글돌아 대답을 회피한다.

  "또 궁금하신게 있을까요?"

  "저 말고 함께 일할 디자이너나 팀원이 있을까요?"

  "아 네, 저희는 스타트업이라 직원이 많이 없구요. 지금 에디터 직원이 1명 있습니다."

  그렇군 또 5인이하였군.

  "MD업무를 하시는건가요?"  

  "MD라기보다는 에디터입니다"

  음, 삐용삐용 무언가 사이렌이 또 울리는 게, 왠지 그 직원..당신 가족일 것 같은데?!

  "그 분이 하시는 업무는 어떤걸까요?"

  "주로 카피문구 등을 정해줍니다"

  "기획안 작성도 그 분이 해주시나요?"

  "아! XX씨 혹시 기획안은 작성하실 줄 아시나요?"

  또 싸이렌이 울렸다. 삐용삐용

  "그리고 전에 사업하실 때 마케팅은 어떻게 하셨나요?"

  2연타로 대표가 공격을 해왔다. 기획안은 그렇다치고 마케팅 방식을 왜 디자이너에게 묻나요? 불현듯 지난 기억이 스쳐갔다. 빅데이터가 말해오고 있었다. '여기는 아니다' 완전히 면접에 대한 의욕을 잃은 나는 대표의 질문에 휘둘리다가 마지막 연타에 완전히 K.O패 당했다.


  "XX씨! 그냥 내일부터 같이 일하시는 거 어떨까요? 노트북 있으실까요? 내일 들고 출근하세요."


  또 컴퓨터도 없는 회사였다.

작가의 이전글 남편의 짜증 I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