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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B Oct 30. 2022

요양병원에서 본 외로움과 고독

이젠 요양병원에서 일할수 있을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가, 친한 친구가 요양병원 운영에 관심이 있어 서울 외곽에 지인이 병원장으로 있는 요양병원을 둘러보러 같이 가자고 해서 간 적이 있다. 요양병원은 다른 병원들에 비해 더 어둡고 칙칙하면서 에너지와 산소가 결핍된 질식할 것 같은 병동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요양병원에서 일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방문한 요양병원의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가장 관심이 갔던 병실 안에 쭉 늘어선 침대 위에 누워있는 힘없는 환자들(노인들)을 보았다. 희망을 포기한, 웃음이 보이지 않는 환자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순간 일분일초라도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나의 큰엄마와 큰이모도 요양병원에서 몇 년간 계시다 돌아가셨다. 큰 엄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혼자 사셨는데 허리 통증이 점점 심해져 혼자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졌을 때 자녀들의 권유로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셨다. 허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했을 뿐 지팡이를 짚으면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었고 정신은 정상이었고 오장 육부에 큰 문제가 있진 않았다. 그런데 입원하고 얼마 되지 않고부터 아예 혼자 걷지를 못하셨다. 병원에서 허리가 아프니까 못 걷게 하였고 걷다가 낙상을 당해 골절이 될까 봐 누워 있게 한 것이다. 근육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결국 걷는 걸 포기하고 2년 동안 누워만 계시다 돌아가셨다. 서랍에 넣어둔 과자가 밤에 먹고 싶어  조용히 끄내 먹는다는게 어쩔수 없이 나게 되는  부스럭 거리는 과자 포장지소리에 옆 환자를 방해하는 환경속에서 2년을 사신 것이다. 큰이모도 노환으로 자녀들이 돌보기 힘들어지자 요양병원에서  일년넘게 계시다 돌아가셨다.


내가 아는 연세 드신 분들 중 요양병원에 가고 싶어 하는 분은 계시지 않았다. 다만 나이 들고 병든 부모가 자식들을 힘들게 할까 봐 죽기 전 마지막 종착지로 요양병원을 마지못해 염두에 두고 계신 분들은 계셨다. 자녀들이 돌볼 수 없고,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재활이나 치료의 의미보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서 원하지 않는 침을 맞는 것이 과연 환자가 원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의 부모님도 연세가 들고, 친척분들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옷장속에 숨겨놓은 비밀 쪽지처럼 영원히 들춰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부딪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기인 것 같다. 자연의 순리이며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는 뻔한 진실로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좀 더 의미를 둘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병이 들어 생명이 꺼져가고 있을 때 별것 아니었던 평범했던 생활이 많이 그리울 것이다. 그저 돈 버느라 일하며 세상 재미를 느껴보지 못했을지언정 죽음 앞에서는 그것마저 귀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이반 일로치의 죽음'에서 불치병으로 고통 속에서 죽음을 앞둔 이반 일로치가 그저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는 것처럼.


왜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수 없을까? 왜 나는 저런 좋은 집에 살수 없을까? 끝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며 느끼는 삶의 무게와 부담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아왔더라도 죽음을 앞둔 고통 앞에서는 세상과의 이별을 좀 더 미루고 싶어 한다. 어차피 사는 게 고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부인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살면서 좌절과 슬픔, 절망으로 힘들지라도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감사히 사는 것이 나중에 죽음을 맞이할 때 잘 살아왔노라고 말하며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할 말이 없어진다. 사는 게 고통이었는데, 살아봐야 고통이라고 여긴 삶인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냐고 할 것이 아닌가.


하루하루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변화 없는 삶을 빼앗기기 전에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저 일상으로 돌아가게만 해 달라고 애원하기 싫다면 우리는 매일 열심히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


요양 병원에서 본 표정 없는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다. 숨만 쉬고 있는 듯한 감정 없는 외로움이 얼굴을 덮었던 환자들에게 마지막 여정을 고독하지 않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의사, 한의사, 간호사, 간병인 및 병원 직원들이 환자가 느끼고 있을 고독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에는 요양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은 내게서 열정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인 생각들을 모조리 다 빼앗길 것 같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묻어두지 않고 수면에 떠 올리는 순간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계발된 약들과 첨단 의료장비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환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의료인으로서 존엄성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적어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가을이 깊어져 낙엽들이 땅에 쌓인다. 떨어진 낙엽들은 내년 봄에 새로 돋아날 새싹을 위해 희생하고 그 자리를 양보한다. 낙엽이 되기전 무성한 잎들은 우리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산소를 공급해 주었다. 낙엽을 밟으며 그동안 고마웠고, 수고했다고 말하고, 발밑에서 낙엽의 포근함을 느끼며 가을과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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