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연 Oct 10. 2024

말린 네잎클로버

우리 사이가 말라비틀어져도 행운을 빌어

나를 벼리다, 너는 버린다.

너는 우리를, 나를, 여기 남겨질 모두를 저버린다.


너가 헤어짐을 고하고 나는 진 사람이 되었다. 이 게임에 패자부활전은 없다. 진 사람이 되어 너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너는 이미 색이 바래 말라버린 무화과잎처럼 꾸깃꾸깃 고개를 숙인 채 시들어 버렸는데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내 잘못이다. 우리는 그래서 진 사랑이다. 찐사랑인 줄 알았는데 진 치고 눌러앉아있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빈 자리만 덩그러니 있다. 머문 자리엔 진한 냄새를 남기고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니 불행 중 다행이던가, 다행 중 불행이던가?서로를 넘나들며 시드는 사이가 되더니 고장난 우리가 멈춘다.


콜라를 좋아하던 너가 레몬에이드처럼 톡 쏘는 나를 만나 뒤섞이더니 찐득거리는 혼합물이 되었다.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화가 뭉쳐 찐득함의 농도와 점도가 한층 더 짙어진다. 끈끈한 혼합물은 몸집을 키워내더니 혈관을 막는다. 불쾌함이 번져 뾰족한 통증이 느껴진다. 면전에 대고 나오는 비난 섞인 대화는 신통방통하게도 잘 벼려진 칼이 되어 상대방에게 칼을 휘두를 때마다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위에 스윽 스윽 상처를 잘도 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바이러스가 상처로 벌어진 틈에 침투한다. 염증이 생긴다. 고름이 차오르더니 상처 주변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분명히 우리가 이 고름을 째면 상처가 덧나 돌이킬 수 없을 텐데 의사를 찾기보다는 바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길 기다린다. 초대장을 받은 바늘이 우리집으로 한걸음에 달려온다. 우리 사이에 도착한 바늘이 빠르게 꽂힌다. 바늘이 잠깐 머무는 동안 우리 사이에 날벼락 맞은 땅처럼 싱크홀 생겼다. 거대하고도 깊은 구멍 위로 걸쭉한 핏방울이 동그랗게 맺힌다.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혼잣말을 한다.


아! 시원해!

서로를 마주 본다.

야, 드디어 숨통이 트이네.

그러네.


바늘이 우리를 살렸다. 지지부진했던 서로를 놓으니 대한민국 독립만세다. 해방감이 장난 아니다. 이 좋은 걸 너네만 알고 있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짓는다. 앞으로 독립을 기념해야 하니 오늘을 기억해야지. 달력에서 오늘 날짜를 찾는다. 빨간펜으로 동그랗게 표시한다.


이혼, 내게 온 행운.

내게 온 행운, 이혼이다.


너가 우연히 발견해 내게 건넨 생기 머금은 네잎클로버를 책장에 소중히 보관한 이래로 우리의 일상에 종종 행운이 찾아왔다. 행복을 새길 때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은 네잎클로버였는데, 너는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도 제 할 일을 충실히 했는지 네가 남기고 떠난 버석한 네잎클로버는 나를 자유케 하는 만능열쇠가 되었다.


더 이상 속박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갇힌 채로 눈뜨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비밀투성이로 살고 싶지 않아.

이혼하자고? 오히려 좋다.

전화위복이다.


사주풀이하는 선생님이 올해 대운이 온다고 했다. 대변혁의 시대가 온다고 했다. 현실이 되었다. 네가 없는 삶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100원짜리 하나 안 나오는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금방 다른 복으로 채워내리라. 인복이 많은 나라서, 이 복이 달아나지 않게 복주머니를 꽉 잠글 것이다.


너여서 잡았고,

너여서 놓았다.

우리여서 버텼고,

우리여서 밀어냈다.

나는 너를 붙였고,

너는 나를 떼어낸다.


너는 우리 사이가 수명이 다 된 스티커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군다.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던 스티커가 어느 순간 아무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그걸 알아채자마자 너는 머뭇거리다 나를 너에게서 재빨리 분리한다. 한껏 꾸겨진 스티커는 너의 손가락에서 팅하고 튕겨져 나간다. 민트색 종량제 쓰레기봉투 안쪽면에 자리 잡은 스티커는 영문도 모른 채 주변을 돌아본다. 아, 이 모든 게 다 쓰레기 같은 고민이었구나. 어차피 버려질걸, 왜 그렇게 옆에 찰싹 달라붙어 최선을 다했니. 어차피 버릴걸, 왜 그렇게 망설였니.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서 스티커 같지도 않은 스티커가 자기 몸통을 더 꾸겨서 안으로 말아버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너가 쓰레기봉투를 잠그고 있다. 너는 쓰레기봉투를 쓰레기차에 싣는다. 시간이 됐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쓰레기차는 제 할 일을 하러 떠난다. 부착력이 떨어진 스티커는 무쓸모도 쓸모 있다고 발악하며 홀로 텅 빈 눈을 한 채 잠을 청한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기나길 모양이다.


가수: 페퍼톤스

노래: 행운을 빌어요

https://youtu.be/U6dTSMCqlp4?feature=shared


작가의 이전글 괘씸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