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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내열 May 13. 2024

학원비를 배운 만큼만 낼래요

대한민국이 폭망 한 시기에 퇴사를 했다. 명퇴자에게는 3-4개월분 급여를 더 얹혀 준다기에 차제에 색다른 도전을 해보자고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국민들은 부도난 나라를 살리자고 금 모으기를 하고 있는데 회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보겠다고 수십 년 동안 몸 바쳐 일해온 종업원들을 빗자루로 낙엽 쓸듯이 무차별하게 해고를 했다.  


나는 그나마 잘리는 게 아니라 명퇴를 했던지라 그래도 마음의 상처를 덜 받았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회사에 사표를 쓰고 왔다고 했더니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묻기에 "여태껏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렸는데 앞으로도 내가 책임 지겠다"고 객기를 부렸다. 그러나 딱히 무슨 대책이 있거나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년 근무하고 받은 퇴직금을 미국 달러로 환전하니 고작 7만 불 이었다.  이게 내 전 재산이었다. 어렵게 장만했던 아파트 한 채가 있었지만 6년 전에 미국지사 발령을 받고 가면서 이를 팔아 신생 백화점에 투자했다가 일 년 만에 부도가 난 바람에 해외지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살 곳이 없는 거지가 된 꼴이다. 회사에서는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거지 같은 팀 메니져였다. 그러나 퇴사할 때까지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어 낮과 밤의 생활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7만 불을 손에 쥐고 중학교 3학년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짜리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을 한다기보다는 일 년 정도 마음을 추스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눈여겨보기로 작정했다.


우선 지출부터 최소화 하기로 했다.  네 식구가 살만한 방 두 개 짜리 아파트를 렌트했고 자동차는 제일 저렴한 도요타 코롤라로 리스를 했다. 집 살림살이는 식재료를 보관할 수 있는 중형 사이즈 냉장고 1대가 전부였다. T.V. 도 없이 살았다. 식탁은 한국에서 가져온 밥상으로 대체했다. 애들은 밥상을 책상 대용으로도 사용했다. 동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자동차가 한대뿐 인지라 애들에게 라이드(ride)를 줄 수 없어 그들은 꼼짝없이 집에 갇혀 상을 펴놓고 공부를 해야만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일 년 이상 백수로 살아본 적이 있나요? 마켓에 가서 쌀 한 푸데를 사더라도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놈의 돈이 무언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마치 방충망에 바람 빠져나가듯이 어찌 그리도 빨리 줄어드는지----


내일 모래 고등학교에 진학할 아들을 둘이나 키우고 있는 가장의 어깨는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시리기까지 했다. 미국이라는 먼 타국에 와서 취업을 해보려고 이력서를 수십 장 만들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문을 두드려 봤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공장이나 창고에 취직을 해보려고 했으나 나이가 많아서 였는지 아니면 경력이 너무 화려했는지 그마저도 실패했다.


나는 뭐 먹고살만한 게 없나 하고 주변에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30-40만 불 정도 갖고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이것 해봐라 저것 해봐라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들 그렇게 많은 돈을 갖고 와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더군요.  그러나 내가 들고 온 돈 7만 불 이 거의 반토막이 났으니 그들과는 다른 출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둑놈에게 왜 도둑질을 했냐고 물으니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했듯이 타이어회사에 다녔다고 아는 게 타이어밖에 없어 타이어와 연관된 일을 찾다가 폐타이어를 주어다 재생공장에 파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려면 대형트럭을 운전할 수 있는 class A 운전 면허증을 따야 했다.




일반 승용차 면허증과는 다르게 class A  면허증은 대형트럭으로 운전실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운전학원을 다녀야 했다.


학원비가 3천 불 에서 3천5백 불 정도 하는데 용케 860불짜리 학원을 찾아냈다. 학원은 멕시칸 동네에 위치해 있었으며 학원건물은 학원 이라기보다는 창고와도 같이 허름했다.  


믿기지가 않아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 중에 운전 면허증을 딴사람이 있냐고 물으니 어제까지 합격한 수강생들의 명단을 보여준다. 한두 명이 아니라 빼곡히 적여있다. 등록을 하겠다고 하니 860 불을 지불하고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란다.


책상이 달랑 3개 놓여있는 골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가로 1미터 세로 1미터 크기의 합판 위에다 도배하듯이 시험 학습지를 붇혀놓고 이를 주면서 공부하란다. 그러고 나서는 나가 버린다. 둘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외우기에 도통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 나이 드신 분들은 일찍이 국민교육헌장 이란 것을 달달 외웠고 군복무를 마친 대한민국 남자라면 3년 내내 군복무신조, 애국가 5절, 군가등을 달달 외웠으니까.  나는 150개 항목의 시험 학습지를 한 시간 만에 달달 외우고 나서는 다 끝냈으니 다음에 할 것이 무엇 이냐고 물었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놀랜다.  외웠던 것을 더 공부하란다.


다음날도 어제 외웠던 그 합판을 주면서 계속 공부하라고 한다. 더 이상 공부할 게 없었기에 집에서 가져온 책만 읽었다. 그렇게 5일이 지나니까 DMV (운전면허시험 보는 곳)에 가서 필기시험을 보고 오란다. 시험을 봤는데 학원에서 준 예상 문제지에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떨어지고 나서 학원으로 달려가 너희들이 공부시켰던 내용은 한 문제도 안 나왔다고 했더니 믿기지가 않은 듯 내게 건네준 예상문제지로 공부했던 학생들이 어제까지 시험에 합격했던 사람들의 명단 이라며 보여준다. 그래도 합판 위에 붙여놓은 학습지를 계속 공부하란다. 어이가 없었으나 이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전부라 생각하니 달리 방도가 없어 보였다.


이틀 후에 DMV를 찾아 두 번째 도전을 했다. 역시 공부했던 내용은 하나도 없어 두 번째 시험도 떨어졌다. 다시금 학원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불평보다는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니 도와 달라고 사정을 했다. 내가 그들로부터 들은 대답은 내가 시험을 본 날부터 시험문제 내용이 바뀐 것 같다면서 별다른 묘책이 없으니 계속 공부하라는 말 뿐이었다.. 다음날 세 번째 도전을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또 떨어졌다. 시험장을 나오면서 시험 감독관에게 오늘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 돈만 내면 가능하단다.


미국 운전면허 시험은 A.B.C. 세 종류의 타입으로 돼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나는 오늘 시험 문제지까지 합하면 세 종류의 시험문제를 다 확보했다 싶어 사람들이 오가는 DMV 벤치 위에다 시험 문제지를 펼쳐놓고 문제를 외우기 시작했다.(미국에서는 시험 보고 나면 문제지를 수험생들이 집으로 가져가도록 허락해 줌).  창피도 체면도 가릴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감뿐이었다.


돈을 지불하고 네 번째 도전이다. 내 생각이 적중했다. 이번 시험은 벤치에다 펼쳐놓고 공부했던 내용들이었다. 식은 죽 먹기만큼 쉬었다. 100문항을 20분 만에 끝내고 합격증을 받았다. 학원으로 돌아가 합격했다고 했더니 다음 학원생들을 위해 내가 갖고 있는 시험 문제지를 달라고 한다.


내가 돈 주고 확보한 것이니 이것을 사라고 했다.

싫다고 한다.

집으로 가져와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그들이 미웠기 때문이다.


내일부터는 실습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대형 트럭 위에 올라가 운전을 하는 과정이다.

아침 6시까지 학원에 나오라고 해서 동이 트기 전에 당도했더니 덩치는 소 만 하고 시컴시컴한 멕시칸 학원생들 5명이 모여서 모닥불을 켜놓고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영낙없는 대형트럭 운전수 예비 후보생 다웠다. 모닥불 앞에 그들과 함께 섥여있는 비리비리한 동양인 나는 마치 타조농장에 닭과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들은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 위에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소고기를 집어던져 굽는데 시커먼 재와 뒤범벅이 된 고깃 덩어리는 개를 줘도 먹지 않을 것 같은데 손으로 재를 털어 내면서 냠냠하고 개걸스럽게도 먹는다. 고기 한 덩어리를 건네주면서 먹어 보란다. 기똥차게 맛있다고 한다. No Thank you 사양했다. 속으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했다.   


두 시간을 기다려도 실습을 하자고 부르지를 않는다.  사무실을 찾아가 언제 실습을 시작하느냐고 물으니 그때서야 나를 데리고 트럭 위로 올라간다. 실습은 고작 10분.  이것은 클러치, 브레이크, 기어 쉬프트. 내가 평소에 타고 다닌 자동차에 다 있는 내용. 그것도 교육이라고 오늘은 이만 집에 가도 된다고 한다. 내일 6시까지 다시 나오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다들 이렇게 해서 면허증을 땃겠지 하면서 달랬다.


 두 번째 날도 두 시간가량 기다렸다가 어제와 같이 사무실로 찾아가 다그치니 교육관을 한 사람 붙여준다. 교육관은 나더라 트럭을 몰고 도로주행을 시작해 보라고 한다. 어느새 프리웨이를 달리고 있다. 높은 트레일러트럭에 앉아 운전을 해보니 마치 전망대에서 고속도로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액셀을 살짝만 밟아도 금방 120-130킬로의 속도로 달린다. 오히려 교육관이 나더러 속도를 줄이라고 말린다. 멋있고 신났다 이 순간만큼은.

   

교육관의 지시에 따라 프리웨이를 내려 로컬 언덕길에 차를 정차했다가 다시금 시동을 걸어 언덕길을 오르는 코스였다.  시동을 걸고 브레이크를 해제하니 그 큰 트럭이 뒤로 밀린다. 나는 서둘러 기어를 넣으면서 액셀을 쌔게 밟았더니 트럭이 튀어서 인도로 올라와 버렸다. 교육관도 놀라고 나도 당황했다.  얼마나 놀랬는지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등뒤는 땀으로 흠뻑 젖는다. 교육관에게 핸들을 빼앗겼다.


세 차례에 걸쳐 도로주행연습이 끝나니 DMV에 가서 도로 주행시험을 보라면서 일주일 후로 시험 날짜를 예약해 준다. 시험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뜻하지 않게 한국에 중소기업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 출장 중인데 나를 만나보고 싶단다. 내용인즉 자기 회사 미국지사로 일해달란다. 직급은 이사 대우, 연봉은 십만 불. 대기업에서 근무한 경력이 쓸모가 있었는지 이곳 미국까지 찾아와서 스카우트를 하다니 아직은 나라는 사람이 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통장잔고를 들여다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연봉 십만 불 짜리 봉급쟁이로 화려한 부활을 하다니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아들들 책상도 새로이 들여놓고 30인치 T.V. 도 사고, 식탁도 들였다.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


트럭시험도 물론 포기했다. 팔자가 좋아진 지 한 달 정도 지나니 트럭운전학원이 괘씸하고, 무성의하고 혹여 무면허 학원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솔솔 피어올랐다.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 학원에 등록하고 나서 지금껏 교육받았던 내용을 값으로 치면 360불 정도 받았던 것 같다.  당신들같이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학원에서 교육을 더 받을 수 없으니 나머지 500불을 환불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당신네들 학원이 정식으로 면허를 받고 운영하고 있는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보름 후에 학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가 환불을 요구한 500불짜리 체크와 수 십 년 돼 보이는 누렇고 허스름한 business license (영업 면허증) 복사본이 동봉돼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토록 엉터리로 학원을 운영하면서 이 짠도리의 돈을 먹겠다고?

어림도 없지--------


비록 한국 보다 더 잘사는 선진국으로 찾아온 이민 초년생 이지만 고객을 농락하고 무성의한 서비스에 항의할 줄 아는 사람으로 시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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