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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날 Nov 17. 2024

벌써 15년

나와 자카르타

  이제 우기 시작인가? 1년 내내 여름인 이곳 자카르타에도 계절의 변화가 있다. 바싹 마르는 건기와 비가 오는 우기. 건기에서 우기로 계절이 바뀌는 간절기에는 계절 간 온도 변화가 크지도 않으면서도 한국의 간절기처럼 아픈 사람들이 늘어난다. 우리 집 막내도 그래서인지 요 며칠 기침과 콧물을 달고 살더니 큰 아이까지도 콜록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갈 일도 없으니 창 밖에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도 마음이 편하다. 이곳은 조금만 비가 많이 쏟아진다 싶으면 또 도로 곳곳에 물이 차 올라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니 외출했다가 이런 비를 마주하게 되면 덜컥 걱정이 앞선다. 며칠 전에도 큰 비가 좀 오래 지속된다 싶더니 아이들 하굣길이 난장판이 되었다. 3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를 서너 시간이 넘어 걸렸다니 이럴 땐 학교 가까이 사는 게 다행이다 싶다.


  자카르타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나면 꼭 채워 15년이 된다. 자카르타에서 일을 하는 남자와 만나 결혼해 이곳에 살게 되었는데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첫날 자카르타 공항에서 집으로 들어오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달리던 차 안에서 깜깜한 창 밖을 내다보는데 방금 막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나도 모르게 순간 이동을 해서 자카르타에서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된 거지?” 기억력이 좋지 않아 지난 일들은 많이 잊고 지내는 내가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면 걱정이 많이 되긴 했었나 보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도 적응을 잘하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살아보니 이곳은 나에게 찰떡이지 않은가.


  처음 와서 첫 아이를 낳고 한 3년간은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고 그러다 보니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거의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워낙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이다 보니 그 시간 동안 불편함도 지루함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둘째도 태어나고 잔잔한 시간을 보내던 중 큰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가 친구를 사귈 기회가 생기면서 덩달아 나에게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집순이 생활의 한계가 다다르기 전 우리의 생활에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한국에 살 때에도 맛집을 찾아다닌다거나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며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니 동네 카페에서 엄마들과 커피 한 잔 정도의 변화에도 꽤 즐거웠다. 자카르타가 아무리 큰 도시라고 해도 문화생활을 할 곳이 많다거나 틈틈이 방문할만한 흥미로운 장소들도 다양하지 않다 보니, 만약 내가 늘 새로운 곳에서 에너지를 얻고 단조로운 생활에 지루함을 쉽게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좀 지내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뿐인가? 이곳의 언어는 배우기 위한 첫 문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도, 언어에 소질이 없는 나에게는 참 감사한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어는 한국인들에게 아주 생소한 언어이지만 알파벳은 영어 알파벳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일단 새로운 알파벳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 수고로움이 덜했다. 인도네시아어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언어이지만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간단한 대화를 구사할 정도의 수준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편이다. 기초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생활이 되다 보니 십 년을 넘게 살면서도 언어가 늘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다. 몇 년을 인니어를 좀 더 배워 보자 생각은 하지만 쉽게 마음먹고 시작하지 않게 되는 이유도 사는 데에 크게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자카르타에 와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영어 공부였다. 아이가 영어로 수업하는 유치원을 들어갔는데 들어간 첫날부터 선생님과의 대화를 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미국에서 몇 년을 살다 왔음에도 절대 비밀로 간직해야 했던 내 영어 실력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는 숨기면 그만이었지만 그때는 당장에 영어를 써먹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큰일이다 싶었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평생을 담쌓고 지냈을지도 모르는 영어 공부까지 해야 했으니 갑자기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물론 어느 한 언어도 중급을 넘어서는 실력은 안 되지만 그래도 분명 한국에서 살았다면 갖지 못했을 나의 성장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곳 생활은 매우 만족스럽다.


  계절은 또 어떠한가. 한국에서 가끔 지인들이 자카르타를 방문하게 되면 문만 열고 나가면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힘들어한다. 물론 여기 살고 있는 우리도 덥다고 느끼지만 그들보다는 잘 참아낸다. 어려서부터 추운 것보다는 더운 것이 낫다며, 좋아하는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일 년이 여름인 나라에 살고 있으니 그 또한 잘 됐다 싶다.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꽃이 만발하는 봄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지만, 더울 때보다 오히려 너무 추울 때 버럭 짜증이 나는 나에게는 겨울을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 나라에 적응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건 확실한 듯하다. 내가 저 멀리 겨울이 긴 어느 나라에 살아야 했다면 일 년 내내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 년 내내 여름옷만으로 지내다 보니 옷 입는 센스가 부족한 나에게 간절기 옷 코디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덤으로 감사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뿐이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듯,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살아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자카르타에 내가 이만큼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여기가 나와의 궁합이 꽤 잘 맞는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하나도 없는 천국일 리 없다. 어디에 살든 좋은 점이 있으면 안 좋은 점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감사해야 할 그리고 나에게 참 다행스러운 일들에 눈을 감아 버리고 매일을 눈물을 흘리며 우울해한다고 변할 건 없다. 그래서 나는 불평보다는 좋은 면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이곳 생활을 누리며 살기로 했다. 지금 계신 곳에서 행복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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