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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Jan 06. 2022

나에게 옷이란

"우리 회사에 지원한 동기가 어떻게 되는지 왼쪽 김현주 씨부터 차례대로 말씀해주세요."


회사 면접날,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곧은 자세로 앉아 면접관에게 상냥한 미소를 날리는 중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으니 면접관으로 실장님 옆에 앉아있던 여자 과장님이었다.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에게서도 저런 아우라가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무척 작은 얼굴에 눈코 입이 옹기종기 균형 있게도 모여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컸고 부담스럽지 않은 쌍꺼풀을 갖고 있었다. 피부는 너무 하얗고 매끄러워서 메이크업이 도자기처럼 완벽하게 된 것인지 쌩얼인데 베이스만 간단하게 한 것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완벽하게 예쁜 얼굴에 마르고 아담한 키를 가진 과장님은 경쟁사에서 실장님이 직접 스카우트 해온 인재라는 것도 입사 후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이 분을 '과장님 A'라 칭하겠다)


그 과장님은 나의 첫 번째 사수였다. 그런데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기는 커녕 매일 외근에 출장에 어찌나 바쁘시던지. 본격적으로 업무를 배웠다기보다 귀동냥으로 혼자 알아서 눈치껏 업무를 배워나갔다. 그렇게 한 3개월이 흘렀을 무렵 과장님이 갑자기 나를 회사 1층 카페로 불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갸우뚱하며 조용히 나만 따로 불러 커피를 사주시는 이유가 대체 뭘까 싶었다. 과장님은 어떻게 말을 꺼낼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운을 뗐다.


"현주씨, 있잖아.. 현주씨 옷을 좀 다르게 입어보는 게 어때? 한섬 알지? 타임이나 마인, 시스템 등 있잖아. 그런 곳에 가서 옷을 좀 사 입어봐. 이런 복장 말고"     


순간 모든 게 정지 상태가 되었다. 이런 복장이라니. 예쁜 얼굴과 달리 말투는 터프한 분이라는 걸 입사 후 알게 됐지만 이번 건 좀 셌다. 이렇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브랜드까지 언급하는 이유가 뭔지 자존심이 무척 상하고 황당했지만 나는 그저 알았다고 대답하며 카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직급이 높으신 분들이 과장님께 내 복장을 보고 말을 전하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과장님이 정말 내 꼬락서니를 볼 수가 없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내 스타일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내 분수에 맞게, TPO에 맞게 옷을 입어왔다 생각했는데 대놓고 그런 지적을 받으니 속상했지만 윗분들이 원하는 대로 한번 포멀 하게 입어보자 싶었다. 그때의 설움은 나의 멘토와도 같았던 과장님 B를 만나면서 치유가 되었다.(이전 글 '길 안내자'에 나오는 과장님이다)  B 과장님께 A 과장님이 전에 나를 카페로 불러 한섬 옷을 입으라는 등 업무 이야기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 너무 황당하고 속상했다 털어놓으니 B과장님은 A과장님의 실체(?)에 대해 얘기해주며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었었다. 어찌 됐든 카페에서의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오기였고 나중에는 옷에 대해 진심으로 변했던 것이.


그 이후로 나는 월급에 반 이상을 쇼핑에 투자했다. 회사는 마포에 위치했기에 명동, 신촌, 목동이 다 가까웠다. 퇴근 후 백화점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타임, 마인, 시스템 신상은 고가이기에 명동에 있던 한섬 아웃렛에 가서 옷을 자주 구매했다. 명품 카피, 유명 디자이너와의 콜라보,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옷들이 많은 자라(ZARA)도 그 시절 내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곳이다. 다양한 옷들을 구매하며 자연스레 옷 소재에 대해 까다롭게 보게 되었고 멀리서 보아도 대략 어떤 소재인지까지 파악하게 되었다. 박음질은 제대로 되었는지 고급 단추를 사용했는지 암홀은 내 몸에 맞게 편안한지 모든 게 다시 보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폴리에스터와 아크릴 같은 소재로 된 옷은 기피했고 캐시미어를 좋아했는데 캐시미어도 모와 혼방으로 되어 있는 옷보다 완전한 캐시미어를 즐겨 입었다. 나중에는 캐시미어를 어떻게 얻어냈는지 그 과정까지도 궁금해졌고 되도록이면 윤리적으로 캐시미어를 얻어내는 회사에 마음이 가게 됐다. 캐시미어는 염소에게서 나오는데 염소의 털들을 염소가 불편하지 않도록 살살 빗어내 털을 가공하는 의류 회사가 좋았다. 면 같은 경우도 다 똑같은 면이 아니라 등급이 있기에 톡톡하고 두께감이 있는 오가닉 코튼을 좋아했다. 청바지는 코튼 백 프로보다 엘라 스테인이 이프로 이상 섞여 있는 것을 입어야 움직임이 자유로워 엘라 스테인 함유량도 꼭 살펴보았다.


한섬 브랜드를 입으라는 과장님의 직접적인 지시로 한섬뿐만 아니라 SPA 브랜드부터 하이엔드 브랜드까지 두루두루 관심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레 옷에 대한 안목이 생겼다. 이태리 사람들은 평생에 거쳐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본인에게 맞는 색깔의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그렇게 뭘 사들이느라 모아 놓은 돈도 없었지만 요즘 언어로 '내돈내산' 인데 뭐 어때 하며 자기 합리화에 빠졌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내게 어울리는 디자인과 색깔을 찾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옷을 잘 고르는 방법 또한 터득하게 됐다.


편안하게 몸에 착 감기는 가벼운 옷은 마치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톤온톤 코디나 색을 맞춘 코디로 오늘의 날씨와 기분에 어울리는 옷을 옷장에서 꺼낸다. 무난하고 깔끔한 스타일에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마스크 때문에 귀걸이는 안 한 지 벌써 2년째이고 시계도 생각나면 가끔 찬다. 가죽 가방들은 고이 모셔져 있고 아이들과 다닐 때 들기 편한 종잇장 같은 에코백과 착화감이 편한 신발이면 하루가 가볍다.


내가 새 옷을 입고 출근하면 '코트 이쁘다 나 한번 입어봐도 돼요?' 말하는 부담스러운 팀 여직원들과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백화점을 가면 '어머 이 옷 때깔이 남다르네요 이거 캐시 백프로죠?' 말 거는 직원들도 이제 없다. 그때는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옷차림이 주가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옷차림에 집중한다. 살이 쪄 몸에 안 맞거나 낡아서 결국엔 버려지는, 옷은 넝마라며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옷이란, 한순간 한 계절 한 해를 돌고 돌아 추억을 함께하는 친구 같은 존재로 여전히 그것에 무한한 애정과 소중함을 느낀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산뜻한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가족 친구들과 함께 또 다른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 갈 날들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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