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탈리테, 나는 너를 따라 어디든 가리
[엄마가 뭐 하나 보냈으니까 성질 내지 말고 이번만 열어보소 미안]
한창 내 취향에 젖어 밤새도록 온라인 쇼핑몰을 뒤적거리던 이십 대 중반 때다.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였지만 이런 문자를 받을 때는 절로 한숨이 났다. 이번엔 또 뭐람, 문 앞에 놓인 작은 택배를 뜯어 보면 내 취향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반짝거리는 14k 금붙이가 나왔다. 저번에는 목걸이를 보내더니, 이번에는 팔찌를 보냈구나. 파스텔과 실버 계열의 색상이 얼굴을 환하게 밝혀 준다는 '여름 쿨톤' 진단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밝고 하얀 것만 보면 장바구니에 담던 때에 엄마의 골드 액세서리는 참으로 반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푼돈을 모아 딸에게 좋은 걸 해 주고 싶었을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택배 상자를 뜯은 순간 앉은 자리에서 타의적 불효자가 된 느낌일 뿐이었다. 아휴, 작은 한숨을 쉬면서 나는 팔찌를 둘렀다. '이번만이야 엄마 이쁘네 고마워' 문자를 보내며 손목에서 주인을 만나 좋다고 반짝거리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사실 왜 엄마가 굳이 금 액세서리를 찾아 보내는지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화생토, 토생금'. 불이 토양을 생하고, 토양은 금을 생한다. 동양철학과 사주명리를 20년 넘게 공부한 엄마에게 오행의 속성대로 딸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겠다. 가장 사랑하는 딸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잘 될 수 있도록 오행을 보완해 주는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기에 종로의 금은방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고르고 골라 보낸 팔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졌을 때에도 그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린 날에는 사주명리가 싫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변변치 않은 살림에 한 번 용기내서 같은 반 친구를 초대했더니, 우리 집에 있는 만세력이나 불상을 보고 다음 날 우리 엄마가 무당이라는 소문을 쫙 퍼트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긴 에피소드지만(사주명리와 신점이 다르다는 걸 아는 초등학생은 없을 것이므로), 그 때는 억울하게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며 왜 우리 집은 그런 걸 공부하나 하는 마음에 서러워서 벽을 보고 누워 훌쩍였던 것이다.
그러나 콩을 심은 데 별안간 메밀이 날 수는 없는 법. 문학가인 엄마를 따라 순조롭게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됐듯이, 엄마의 취미인 사주명리 또한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내 가치관을 이루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의 라일리가 가진 많은 섬들처럼, 내게는 '동양철학 섬' 이 하나의 코어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십 대 중후반 지독하게 힘들고 아픈 날들을 견뎌내면서 어찌하여 이런 시간이 있어야 하나 싶을 때, 결국 그 해답은 팔자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게 큰 힘이 됐던 하늘이 누군가를 선택하여 큰 임무를 주려 할 때는 반드시 역경과 시련을 겪게 한다는 맹자의 '천강대임론(天降大任論)'도 가만히 뜯어 보면, 결국 사주명리와 구궁운의 순리대로 결국은 해내고 이루어질 때를 위한 당연한 시간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자, 나는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동양철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흔히 사주명리를 믿지 않거나 또는 무시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지론은 '운명이 다 정해져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는 건데,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런 힘이 없는가를 덧붙이며 명리가 허상이라고 비판하곤 한다. 그렇지만 선원이 항해 전 지도와 나침반을 챙기고, 농부들이 파종에 앞서 절기를 톺아보듯, 인간이 자신의 운명 속 주어진 삶을 가장 잘 살아내기 위해서 사주명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조심하고, 준비하여 주어진 시간 나를 가장 잘 쏟아낼 수 있도록. 엄마는 '사주 공부는 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며 뜯어말렸지만, 사주 이론 책을 읽으며 무릎을 치는 딸은 말린다고 말려지는 게 아니다.
'파탈리테, 나는 너를 따라 어디든 가리'
좋아하는 노래 가사 한 문장이 동양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존중하는 마음을 가장 정확히 대변한다. 'fatalité', 불어로 '운명' 또는 '숙명'. 주어진 내 운명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최대의 행복, 만연한 복을 위해 어디든지 가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게 단순히 복채 얼마 내고 사주를 보러 다니는 게 아니라 직접 이 학문을 공부하려는 이유다. 자자, 갈 길이 멀다. 사주명리학을 다 읽고 나면 주역을 공부할 테다. 공자는 주역을 접하며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탐독했다고 하니, 나도 또 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