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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L Oct 26. 2022

‘우리들의 사랑’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연애 연반인과 저널리즘의 눈

연결관계와 연애 연반인, 일반인이라는 착각

연반인 전성시대다. 주지하듯이 ‘연반인’은 ‘연예인’과 ‘일반인’의 합성어다. 연반인은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활약하는 일반인이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조어된 것이다. 연반인의 활동영역은 거의 전방위적이다. 김어준으로 대표되는 정치 팟캐스트는 물론 수백만 부수의 저술 판매고를 올린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지식 토론, 코로나19를 경유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한 각양각색의 경제 채널, <매불쇼>와 같이 다양한 관심분야를 아우르며 꾸준한 사랑을 받는 팟캐스트 또는 유튜브 채널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위치하는 곳은 레거시 미디어의 전형적인 연예인과 그들을 소비하는 대중 사이다. 연반인이란 말 자체에서 보듯이, 그들은 연예인이라고 하기에는 대중에 가깝고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연예인스럽다.


2022년 지배적인 예능 장르가 된 ‘관찰 연애’는 연반인의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찰 연애 프로그램은 Tving의 <환승연애>, <결혼과 이혼 사이>, SBS플러스의 <나는 솔로>, MBN의 <돌싱글즈>, MBC의 <결혼지옥> 등 편성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들 프로그램은 이른바 ‘연애 연반인’을 매개로 담론화된다. 연애 연반인은 일반인의 연애 서사로 높은 ‘참여지수’’(구독자 수, 이용 수, 좋아요 수, 링크연결 등 다양한 네트워크 활동)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일반인이라는 ‘착각’은 시청의 재미에 기름을 붓는다. 저널리즘은 진짜 드라마 속 청춘남녀의 사랑에 대한 ‘탕비실 비평’처럼 그들의 연애를 이 시대의 표본처럼 다룬다. 오늘도 어느 연애 연반인의 스토리가 감동을, 웃음을, 눈물을 자아낸다고 떠들썩하다.


방송산업에서 연반인은 특정 채널만을 위해 창작활동을 하는 ‘전속 모델’, 그런 기획사가 스타를 양성하여 그런 방송산업에 연예인을 공급하던 ‘대중스타 모델’ 이후 나타난 ‘참여 모델’이다. 참여문화에서 연반인은 ‘연결관계’(connections)의 자원을 가진 주요 인플루언서(influencer)로서 인터넷을 넘어 방송산업에서도 주체가 되고 있다. 그들의 능력은 인터넷 상의 참여를 얼마나 끌어내는가에 달렸다. 10대 어린이에서 7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연결관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연반인이 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초기 연반인으로 재재가 있다. 팟캐스트 <불금쇼>로 쌓은 인지도로 2018년 KBS의 <저널리즘 J> 패널에 이어 <더 라이브>를 진행하는 최욱도 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초기 백종원이 그랬고 <가짜사나이>의 이근 대위 또한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대중스타가 아닌 비레거시 미디어 캐릭터가 새로운 유형의 대중스타이자 장르가 된 것이다. 이들 연반인들은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참여지수로서 경쟁력을 가진다. 그 경쟁력은 대중스타로 들어서기 위한 등용문이자 각종 콘텐츠 창작의 동력이다. 연반인은 기성 연예인과 섞이기도 하고 따로 작업하기도 한다. 지금 방송 예능과 연예 저널리즘은 참가자들이 연기(?)하는 스토리텔링과 그들의 실제 사생활을 오가며 ‘연반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관찰 연애와 탈일반인, 그 특별함의 욕망

예전의 연애 프로그램이 청춘남녀들의 순수한(?) 짝짓기 프로그램이었다면, 최근 관찰 연애 프로그램은 제목에서도 보듯이 이혼, 돌싱, 첫사랑, 지옥과 같이 매우 자극적으로 소재화되어 있다. 전자가 상호간의 호감에 따라 짝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데 반해, 후자는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어떤 미션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결된다. 뚜렷한 각자의 의도에 맞는 사람을 찾거나 심지어 같이 살아보면서 그 의도를 탐색하기도 한다. 따라서 관찰 연애 프로그램은 단순한 ‘사랑의 작대기’가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설정에 충실한 캐릭터와 서사를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반인이라는 외피를 썼기 때문에 ‘훔쳐보기’에 가깝다. 특별하게 표현된 일반인들의 연애가 역사상 최악의 결혼율과 출산율과는 정반대로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그들은 왜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대중은 무엇 때문에 관찰 연애에 열광할까? 연애 연반인들은 그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간에 이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욕망과 권력의 대리자들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탈일반인’의 욕망, 쉽게 말해 네트워크화된 시대 주목받는 특별한 상태다. 관찰예능에서는 연애에 관한 한 그 경쟁력을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애초에 특별하지 않은 일반인은 그 무엇으로도 텔레비전에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2022년 대한민국은 충격적인 저출산율을 기록하는 가운데 텔레비전과 유튜브에서는 일반인의 연애 이야기가 봇물을 이룬다.


관찰 연애 프로그램은 그 욕망을 ‘낯설게하기’ 기법으로 표현한다. 연예인보다 더 뛰어난 연애 연반인들의 용모와 몸매, 매너는 익숙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연애 서사를 무기력하게 할 정도다.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감정선은 감정에 익숙치 않았던 전통적인 연애 태도를 환기시킨다. 서술적 자아로서 참가자는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정당화하고, 관찰조력자의 전지전능한 판단은 상황전개를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내린다. 관찰 연애의 특별한 사랑방식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사랑의 판타지에 빠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사랑이 그와 다름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시청자들은 일반인의 ‘현실 사랑’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며 묘한 긴장감을 경험한다.


연애 연반인을 싸잡아 탈일반인의 욕망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같은 진단을 내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참가자들의 상당수는 모델, 유튜버, 예비 연예인, 몸짱 등 미디어 활동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다.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서사화하고, 그걸 다시 뉴스나 블로그, SNS 소재로 삼는 순환고리는 사실 일반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신체 노출과 같은 선정성은 물론 프라이버시, 개인정보 등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애 연반인들이 인내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는 것을 넘어 구독자 수나 밈과 같은 참여지수의 보상이 있어서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걸 탐하지 않더라도 참가자 저마다의 탈일반인의 욕망은 프로그램 곳곳에 묻어난다.     


()반인의 연애를 대하는 저널리즘의 태도

연애 연반인을 바라보는 저널리즘의 시각 또한 여기에 맞춰져 있다. 그들의 연애는 마치 텔레비전 연기자가 직접 연기하는 것처럼 중계된다. 프로그램 서사도 그렇지만, 관련 뉴스는 참가자들을 특정한 ‘캐릭터’, 즉 착한, 시크한, 몸짱, 로맨티스트, 이기적인, 시대에 뒤떨어진 등의 개념으로 묘사한다. 언론은 참가자들 중 어떤 이의 대사, 제스쳐, 이벤트 등은 과도하게 미화하는가 하면 누군가에게는 비호감의 굴레를 덧씌운다. 심지어 악플을 유도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출연자의 개인정보까지 찾아내어 관찰 연애 프로그램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관련 뉴스를 보노라면 어떤 이들의 연애는 멜로고 어떤 것은 순수한 사랑, 비극, 심지어 막장이 되기도 한다. 사전 미팅과 장시간 촬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저널리즘적 의제설정으로 강력하게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디어로 표상되면 미디어 논리에 충실한 서사가 된다(이론적으로 이를 ‘미디어화’라고 한다). 사랑과 연애라고 다를 리 없다. 연출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관찰 연애에서도 캐릭터가 살아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온갖 종류의 표상된 사랑을 간추려 말하면 그 서사는 대체로 경제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귀부인과 기사의 사랑을 그린 중세의 기사문학은 전쟁이 상시화된 시대 기사의 생존전략이 기사도 정신과 버무려져 있다. 19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낭만주의 문학은 상속 귀족과 전문직 젠트리들이 장원 자산을 배경으로 경쟁하는 이야기다. 여전히 익숙한 20세기 불륜 서사는 경제적 근대화와 도시화와 함께 급성장한 익명적 개인의 욕망을 표현한다.


관찰 연애 프로그램은 어떤 경제활동으로 설명되는가? 서사장르가 현실을 감정의 외피로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면, 저널리즘은 그런 서사장르의 이야기를 밑천삼아 주목해야 할 포인트를 지시한다. 그래서 관찰 연애 프로그램은 연반인이 끌어오는 클릭수와 유명세에 힘입어 시청률을 극대화하고, 연예 저널리즘은 그것을 기사 클릭수와 함께 광고를 가져오는 자산으로 삼는다. 이 모든 것은 시청률과 클릭, 좋아요, 광고노출과 같은 일을 수행하는 ‘진짜 일반인’의 자유노동(free labor) 덕분이다. 연애 연반인의 자산인 연결관계에서 시작된 관찰 연애 프로그램과 연예 저널리즘이 사랑이라는 숭고한(?) 감정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커뮤니케이션 소외, 특별함을 욕망하는 사람들

연반인들에 의해 낯설게 표현된 일반인의 연애와 이를 충실한 서사적 포인트로 잡아내는 연예 저널리즘은 훔쳐보기의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가운데 우리를 ‘커뮤니케이션 소외’로 내몬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저마다 손에 들린 미디어로 인해 사회적 소통의 양과 질이 실시간으로 계측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셀럽은 못 되더라도 동료집단 안에서 연반인 비슷한 존재라도 되기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그 경쟁은 몇몇 소수 외에 우리를 대부분을 패자로 만든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소외는 우리들 안에서 돋아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온갖 종류의 유사 연반인과, 그럼에도 결코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일반인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심리 상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소외는 특별한 연예인이나 엘리트 그룹에게만 허락되던 과거 미디어 환경에서는 겪지 않아도 될 감정이다.


디지털 전환이 가져온 연결된 시대, 일반인만큼 무기력한 존재가 있을까? 커뮤니케이션 소외는 계급 소외, 지역 소외, 젠더 소외 등 숱한 소외의 바깥에 새로 움트는 실존의 문제다. SNS는 물론 레거시 미디어조차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 시대에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자존감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얻는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탈일반인의 욕망이 정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관계의 동력이 되고 있다.


결국 이 시대의 일반인은 연결관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정치인, 연예인, 그리고 당선‘인’처럼 특별한 호칭이 없다. 네트워크화된 세계에서 주목을 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실적을 낸 기자나 PD, 영화감독, 비평가 같은 문화권력자와 함께, 고위공무원, 재벌가의 상속자들, 그리고 연반인 등은 연예인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력한 미디어 영향력자가 되었다. 그런 호칭을 못 받더라도 ‘관계자’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인정받는다. 한때 군인의 반대말로 민간인 또는 일반인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지만, 어느듯 민간인 또는 일반인은 어떤 특별함도 없는 낙오자의 대명사처럼 들린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권력자는 숨고, 일반인은 드러나는..

관찰 연애 프로그램이 급기야 동성애 서사로까지 확장한다고 한다. <메리퀴어>와 <남의 연애>가 그것이다. 모두 지상파 연합 OTT인 웨이브여서 논란이 예상된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연예 저널리즘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궁금하다. 만약 그간의 관찰 연애 프로그램처럼 동성애 연반인의 서사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사회는 성에 관한 지금까지와 다른 족적을 내딛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들 프로그램이 내거는 ‘다양성’의 지평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단정하지는 못한다. 반대로 도덕적 적의를 드러낸다면, 우리는 가야 할 길이 저 멀리 있음을 다시금 실감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권력자는 자신을 드러내면서, 일반인은 이름없는 상태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연결관계가 중요한 자산이 되면서 일반인은 점점 더 세상에 드러나는데 반해, 권력자는 오히려 카메라와 연결관계 저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어떤 ‘여사’에게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어느 법률가는 “일반시민들은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반시민의 세계와 다른 특별한 세계는 다른 공정, 다른 윤리, 다른 미학이 적용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 시대의 권력은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 우리와 그들을 양분하여 장차 다가올 삶의 궤적마저 선제적으로 결정하는 이른바 ‘존재권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권력자들은 필요한 때가 되면 자신을 드러내지만, 일반시민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특별해지지는 않는다. 자꾸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는 진정한 권력자가 아니다. 연반인의 특별함은 방송과 저널리즘이 그들을 비출 때 뿐이다. 시청자들이 연애 연반인을 특별하게 느끼는 것은 방송이 연애마저도 일반인으로서는 쉽게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낸 것처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사랑’이 진짜로 특별해지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방송> 2022년 8월호에 실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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