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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푸스 Jul 05. 2024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누가 이쁘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버틸 수 없는 길

어느덧 내 나이 34살이다.

20살에 멀쩡히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21살에 우리나라에 몇 없던 푸드스타일리스트과를 들어갔다.

몇 개월동안 부모님과 싸우고 싸워 이뤄 낸 결과였다.


푸드스타일리스트과란, 너무나도 생소한 과였으며 제대로 된 대학교에는 더더군다나 존재하지 않는 과였다.

고지식한 우리 아빠는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길.

하지만 고등학교 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던 나는 그 당시의 꿈이 푸드칼럼니스트였다.

단순하게 먹는 행위를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으며 사진 찍고 여행 다니는 게 좋아서, 거기에 그 당시엔 글 쓰는 것도 좋아했었고 그렇게 단지 좋아하는 것들을 합쳐 놓으니 푸드칼럼니스트가 너무 딱이었던지라 꿈꿨던 직업이었다.


당시엔 우리나라엔 생소한 직업군이었기에 푸드칼럼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차선책으로 택한 게 푸드스타일링이었고 그렇게 나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직업학교에 있는 과였기에 일반 대학과는 분위기가 영 달랐다.

나이대도 너무나도 다양했다. 20대 초반인 우리를 비롯해 20대 중후반부터 30대까지 있었고 이미 사회생활을 꽤나 오래 겪어오다 이 길을 꼭 가고 싶어 일을 그만두고 온 분들도 상당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20대 후반~30대 초중반 언니, 오빠들은 정말 열심히 과 생활에 임하였고, 뭐 우리 20대 초중반은 다들 상상하듯 그리고 다들 그랬듯 젊음을 만끽하느라 과 생활은 뒷전인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단순히 내 판단이긴 하지만, 지금도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동기들 중에 여전히 이 길에 남아있는 사람은 손에 꼽히며 우리 외에 나이가 어느 정도 있었던 언니, 오빠들은 여전히 이 길 또는 이 길과 유사한 길을 지켜오는 분들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다.)

여하튼 학교 생활을 짧게 얘기하자면 그 당시 몇 없던 푸드스타일리스트과였기에 교수진은 정말 빵빵했다.

중식에는 여경래 교수님 형제분들, 그리고 남자 푸드스타일리스트의 원조인 김현학 교수님, 푸드스타일리스트 홍신애 교수님 등등 지금 생각하면 참 유명하고 대단한 분들은 다 교수님으로 계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교수님들 밑에서 적당히 재밌게, 또 적당히 힘들게 그렇게 2년의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졸업과 동시에 본가로 내려와 호텔에 취업을 하였다.

호텔 주방이 아닌 프론트로...:)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현장실습을 다녔었는데 현장실습을 통해 내린 결론은 '아, 이 길은 안 되겠다.'였다.

밤, 낮 없이 길게는 24시간 이상을 일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당시에는 푸드스타일리스트 실장님 밑에 어씨로 들어가면 달에 50-70만 원 정도의 열정페이를 받으며 일해야 했다.

내가 가 본 실습 업체 중 가장 심한 곳엔 실장님 집에 들어가 살면서 집 청소도 해주고 아이 케어도 함께 해주며 일하는 어씨 언니들이 있었다.

현장 실습을 나갈 때마다 느낀 건 본가도 아닌 서울에서 월세살이 하는 내가 과연 이 월급으로 저 스케줄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게 맞을까? 였다.

지금은 많이, 아주 많이 좋아졌다지만 그 당시에는 열정페이가 너무나도 당연했기에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모님과 싸워가며 선택했던 길을 포기해 버렸다.

도전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나는 호텔에서 1년을 근무하고 여러 안 좋은 상황들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다음 파리바게트 지방지사 vmd로 취업하게 되었다.

나름 전공을 살린 길이었지만 사람으로 인해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쯤, 다시 푸드스타일리스트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써 배운 것들을 써보지도 못하고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이었을까?

나는 다시 서울로 가게 되었다.

내 나이 25살이었다. 


서울에서 약 2년을 생활하며 결국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 3개월은 여러 스튜디오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여전히 열정페이였다.

1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주 6일을 원하는 곳들이 많았다.

월세에 생활비까지 감당하려면 100만 원은 턱없이 부족한데 투잡도 가능하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여러 스튜디오 면접을 보다 결국 요리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엄청난 내향형인 나는 요리강사로 일하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입술이 시퍼레지고 머리가 핑핑 돌아 수업 직전에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감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굴 가르칠 정도가 아닌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누굴 가르치고 있지?라는 의구심이 늘 있었을 때니까.

그렇게 요리강사도 하고 관심 있었던 마케팅분야에서도 일하며 서울살이를 버티다 결국 또다시 본가로 내려가게 되었다. 


두 번째 실패였다.


치열하게 서울살이를 버틴 결과 급격히 안 좋아진 몸을 다시 회복시키려 운동만 죽어라 하던 그때, 한 업체의 케이터링 구인공고를 보게 되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곳이었고, 그곳에 케이터링 부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만 내가 사는 이 지역에도 푸드스타일링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싶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날, 새벽 내내 자소서를 고쳐 쓰고 다음 날 바로 지원했다.

그렇게 나는 20대 중후반에 케이터링 일을 하게 되었다.

촬영 스타일링은 아니지만 케이터링도 엄연히 푸드스타일링에 포함된다.

(정말 뷔페식 식기만 쓰는 업체가 아니라면 더더욱 미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는 케이터링 업체들이 많다.)


이렇게 나의 본격 푸드스타일리스트로써의 삶이 시작되었다.

고되고 치열한 그 현장이 드디어 나의 손으로 들어왔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본격 푸드스타일리스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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