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부산 집에 내려가면 종종 이런 대화가 펼쳐진다. 내가 최근 한국 미술가의 작품이 얼마에 팔렸는지를 엄마에게 말한다. “그니까 내가 미대 간다고 했을 때 그냥 보냈어야지. 뭔 생각으로 말렸수?” 엄마는 항변한다. “나는 니가 서울대 법대는 갈 줄 알았지.” 아마 그 말에는 ‘영화 잡지사 들어가서 최소 생활비나 벌면서 일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라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뭐, 그런 시절이었다. 요즘에야 부모들이 예쁜 아이는 아이돌, 건강한 아이는 프로 운동선수, 똑똑한 아이는 스타트업 차리기를 바랄 수 있다지만 그 시절 부모들은 자식을 의대 아니면 법대에 보내고 싶어 했다. 나로 말하자면 깨진 와인잔 조각에 손을 살짝 베어 피가 햄스터 오줌만큼만 나와도 기절할 것 같아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이다. 의대? 꿈도 꾸지 마셨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로 말하자면 뉴스를 보다가 매우 합리적인 판결 소식을 듣고도 “뭐? 그게 법이냐! 사람 위에 법이 있냐!”라고 외치는 약간의 아나키스트 기질이 있는 자유주의자다. 법대? 꿈도 꾸지 마셨어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미술을 좋아했다. 미술이라는 걸 배운 적이 없는 유아시절에도 혼자서 천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고 한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은 스케치북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묘사가 세밀한 그림들을 매일 스케치북이 가득 차게 그리곤 해서 외할머니는 그걸 그렇게 지우개로 빡빡 지워댔다. 아깝게 매일 스케치북을 사는 것은 꽤 부담이었을 것이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자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자연스레 미술이 됐다. 태권도학원과 주산학원과 웅변학원은 매일매일 빼먹고 도망치면서도 미술학원에 가는 시간은 그렇게 좋아했다. 재능이 없던 것도 아닌 것 같다. 국민학교 내내 해마다 서울에 올라갔다. 전국 사생대회 참석을 위해서였다. 어린이회관에서 받은 트로피만 열 개가 넘어가자 엄마는 더 이상 그 트로피들을 거실에 진열하는 것을 포기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미술 선생이 말했다. “너는 보는 눈이 다른 애들이랑 달라. 미술을 하자. 유화는 날고 기는 애들이 많으니까 수채화를 중점적으로 해보자.” 방과 후에도 미술 실습을 계속하면서 미대에 가자고 했다. 일찍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는 스승이란 정말이지 훌륭한 존재다. 엄마는 말했다. “미술? 미술은 안 돼. 니는 법대에 가야하는데 무슨 미술이고. 안 된다고 해라". 다음날 그 말을 전했더니 선생은 이미 수백 번은 들어본 이야기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알았다. 됐다. 집에 가라.” 나는 그게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법대’라는 단어는 매우 고상하게 들렸다. 미래를 내다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었다. 미술은 취미로도 충분했다. 외할머니가 “우리 손자는 그림쟁이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것도 같다. 미술을 하면 영화관 간판이나 그리게 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아, 당시에는 영화관 간판을 그림으로 그렸다!).
부모님은 큰 실수를 했다. 그들은 내 손에서 붓을 꺾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 유년기부터 다른 형태의 예술을 아무 생각 없이 나에게 주입하고 있었다. 영화였다. 부모님은 스스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는 80년대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잊지 못할 할리우드 영화 <벤지>였다. 똑똑하고 용감한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이를테면 ‘반려견 주인공 영화’의 어떤 출발점이었다. 미국에서도 대히트를 한 그 영화는 7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도 개봉해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엄마는 말을 갓 시작한 나를 안고 <벤지>를 보러 갔다. 나는 칭얼거림도 없이 뚫어지게 영화를 봤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지’가 “멍! 멍!” 하고 짖자 나도 카랑카랑한 소리로 “멍! 멍!”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극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물론 나는 그걸 기억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었다. 이 이야기는 엄마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영화 관람은 1984년 작 <인디아나 존스 2>다. 엄마는 그 영화가 어찌나 보고 싶었는지 국민학교 저학년생인 내 손을 잡고 극장에 갔다. 사실 그 영화는 당시 검열 제도로 따지자면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엄마는 사람의 가슴을 손으로 갈라서 심장을 빼는 장면이 있는 영화를 아이와 보러 가야 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캄캄하고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어두운 극장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 놀라운 모험담을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날로그 특수효과로 만들어낸 광산차 추격 장면이 시작되자 정말이지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런 것은 예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특수효과로 만든 인공적인 장면이라는 걸 깨달을 정도로는 영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도무지 유추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영화의 정보를 알 수 있는 경로가 극장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뿐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기억에 새겼던 것은 감독의 이름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어머니 맙소사. 당신은 나중에 사춘기가 될 저에게서 앤디 워홀이 될 가능성을 제거했지만 대신 스티븐 스필버그를 하사하셨습니다. 미대 대신 법대? 그럴 가능성은 어머니가 직접 없애셨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2>를 본 순간부터 나는 이르게 영화광이 됐다. <주말의 명화>는 절대 놓치지 않았다. 영화를 밥 먹는 것처럼 습득했다. 영화광 꼬맹이에게 남은 다음 프로젝트는 ‘혼자 극장에 가기’였다.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80년대에는 국민학생이 홀로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안전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극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인디아나 존스 2>를 본 이듬해, 나는 티브이에서 영화 광고를 보고는 완전히 홀려버렸다. <고스트 버스터즈>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이걸 보러 함께 극장에 갈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는 가격은 1,000원이었다. 국민학생 버스비는 50원이었다. 버스 안내양이 있던 시절이니 100원짜리 동전을 내면 50원을 거슬러 줄 터였다. 나는 용돈을 모아 1,100원을 마련했다. 관람료와 교통비는 해결이 될 터였다. 영화 시간을 대충 맞춘 나는 버스를 탔다. 어럽쇼. 안내양이 없었다. 그 사이에 정부는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을 없애버리고 대신 기사 옆자리에 돈 통을 설치했다(자동화 시대의 시작이었다). 말을 하면 기사가 거스름돈을 내주기는 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사가 말했다. “야야 탈끼가 말끼가.” 나는 아무 말 없이 버스에 오르면서 100원짜리 동전을 돈 통에 넣었다.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용기를 냈다. 걸어서 오면 된다. 어쨌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버스를 혼자 탔다. 영화도 혼자 볼 것이다. 각오는 비장했다.
극장에 도착하자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1,000원이 아니었다. 그 사이 영화관람료는 1,000원에서 1,200원으로 올랐다. 나는 완벽하게 잘못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제 나를 영화도 보지 못한 채 무려 1,000원을 버스비로 내고 집에 돌아가는 패배자로 만들 차였다. 나는 극장 앞 계단에 앉았다. 서러운 표정을 하고 앉았다. 한두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여대생으로 보이는 20대 여자가 말을 걸었다. “너 왜 그렇게 앉아 있어 여기?”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엉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영화를 보러왔는데 1,000원밖에 없어요.” 그는 나에게 말했다. “누나가 보여줄게. 같이 들어가자.” 그는 영화비를 대신 내고 나를 극장 자리에 앉힌 다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왔다. “누나는 다른 사람이랑 영화를 봐야 하니까 이거 먹으면서 영화 잘 보고 돌아가.” 나는 또 울었다. <고스트 버스터즈>는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할리우드’만이 유일한 ‘꿈의 공장’이던 시절의 영화들을 혼자서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언제나 주머니에는 2,000원 정도가 있었다.
마침내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1987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엄마와는 달리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거의 없던 양반이라 꽤 설렜던 것도 같다. 당시 마산에는 태양극장이라는 낡은 극장이 있었다. 최신 영화들은 시민극장과 중앙극장에서 상영했다. 태양극장은 이를테면 재개봉 전문관이었다. 극장 건물 자체가 고딕적이고 항상 뭔가 무서워 보이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남동생은 극장에 들어가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공포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우주왕복선이 우주에서 발견한, 옷을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여자가 갑자기 지구에서 되살아나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기를 빨린 사람들은 좀비처럼 바싹 마르고 뒤틀린 채 죽었다. 그녀는 영화 내내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런던 시내를 돌아다녔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역시나 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안고 섹스를 하다가 긴 칼로 서로의 몸을 궤뚫어 버렸다. 영화가 끝나자 부모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동생은 그 모든 걸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어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극장에서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의 나체와 섹스와 피가 넘쳐나는 호러 영화를 본, 갓 사춘기가 올락 말락 했던 나는 순식간에 어른이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영화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으로 유명한 토브 후퍼의 <라이프 포스>였다. 당시 개봉 제목은 <벰파이어>. 지금도 B급 영화광들이 열광하는 컬트 영화 중 하나다. 절대 부모가 10대 초반의 아이들을 데리고 볼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느 날 <주말의 명화>에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방영했다. 두 시간이 넘어가는 그 영화를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봤다. 갑자기 주인공이 촛불을 불어서 끄자 사막의 여명 장면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것이 영화구나. 이것이 편집이구나. 촛불을 불어서 끄는 장면 뒤에 사막 장면을 이어서 붙인 것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밀을 알아챈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순간에 나는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아마도 영화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에게는 꿈이 생겼다. 영화가 너무 길다며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도 꿈을 꾸고 있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큰아들이 서울대 법대에 가리라는 꿈을. 사막의 여명처럼 헛된 꿈을.
<계속>
김도훈
前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前 「GEEK」 피처디렉터
前 「씨네21」 기자